에스토니아는 올해로 (러시아로부터의) 독립 100주년을 맞았다.
2차 세계대전 후 다시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었다가 노래혁명 후 1991년 다시 독립을 선언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다[여담이지만, 인구 130만 명에 불과한 에스토니아가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언어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전국 노래자랑' 덕분이었다. Laulupidu라 불리는 이 행사는 1994년부터는 5년마다 열리고 있는데, 바로 내년 2019년이 27회째 송 페스티벌이 열리는 해이다(7월 4일부터 7월 7일까지).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공연장에서(노래혁명 때는 30만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참가자들이 며칠 내내 노래를 부르고, 순위는 매기지 않는다. 에스토니아 송 페스티벌을 이끈 송(song)해 아저씨 같은 분이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Gustav Ernesaks(1908. 12. 12. ~ 1998. 1. 24. 생몰연대에서 알 수 있듯, 에스토니아 현대사의 영욕을 모두 보셨다. 우리로 치면 대한제국부터 IMF 위기에 문민정부 말까지이다. 아래 사진 참조)인데, 마지막날, 이 분이 Lydia Koidula의 시에 음을 붙인 "Mu isamaa on minu arm (나의 조국은 나의 사랑입니다)"를 부르는 것으로 행사가 마무리된다. 위 노래는 소비에트 시절 비공식 국가처럼 쓰이기도 했는데, 가사와 도입부 때문에 에스토니아 국가와 곧잘 혼동되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공식페이지 https://2019.laulupidu.ee/en/와 다음 2014년 영상을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OneQRawdLv4 또 여담이지만, 에스토니아 국가와 핀란드 국가는 신기하게도 같은 멜로디를 쓴다.].
우리와 에스토니아의 인연은 물론 고려인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30982), 실질상 1988년 서울올림픽 때부터 시작되었다. 사이클 트랙에서 금메달을 딴 에리카 살루메는 "나는 (소련인이 아닌) 에스토니아인"이라고 말해 화제가 되었고, 소련 국적으로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딴 에스토니아 선수들이 에스토니아로 돌아가 소련 국기가 아닌 에스토니아 국기를 대규모 군중들과 함께 흔든 것이 1991년 에스토니아 독립의 도화선이 되었다(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8&no=101253).
계획에 없이 다른 이야기가 자꾸 튀어나오는데, 1996년 한 목사님 가족이 탈린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착하시고(지금도 올레비스테 교회를 중심으로 예배와 한인 모임을 이어가고 계신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특히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열풍에 힘입어(?) 에스토니아는 뒤늦게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비트코인의 창시자, 나카모토 사토시의 백서가 나온 것이 2008년 10월인데, 에스토니아에서는 그보다 1년 전부터 유사한 보안 기술이 개발되고 있었고, 이제는 국가 차원의 ICO를 고민하고 있다. https://www.coindeskkorea.com/비트코인-이전에-에스토니아에-블록체인이-있었다).
사실 에스토니아는 이미 2005년경부터 국가 전략을 '디지털 공화국'에 두고 꾸준한 혁신을 해왔다. 일본과 유럽 여러 나라들은 일찌감치 이를 눈치채고 긴밀한 교류협력을 이어오고 있다(NATO는 탈린에 합동사이버방어센터를 설립했고, 최근 룩셈부르크에는 데이터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에스토니아 전자영주권자이기도 한데, 2018년 첫 방문국을 에스토니아로 잡을 정도로 에스토니아를 중시하고 있다(일본은 전자영주권 제도를 먼저 확립한 에스토니아의 도움을 받아 주민등록제도를 개편하였다 https://www.economist.com/europe/2017/07/06/estonia-is-trying-to-convert-the-eu-to-its-digital-creed 사실 내가 에스토니아에서 심상찮은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한 것도 이코노미스트지 덕분이었다). 반면 우리는 케르스티 칼률라이드Kersti Kaljulaid 에스토니아 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 때 자국 선수단을 격려하기 위해 제 발로 한국을 찾았을 때에도 의례적인 회담만 가졌을 뿐인데, 지난 10월 칼률라이드 대통령이 세계지식포럼 등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방한하였을 때에야 국회에서 초청강연을 여는 등 법석을 떨었다[칼률라이드 대통령 이 분은 상당히 흥미로운 과정을 거쳐 대통령이 되셨는데, 우선 네 아이의 어머니이시고, 2016년 8월부터 시작된 에스토니아 대통령 선거가 9월까지 연장되어 세 차례에 걸친 원내투표(간선제이다)를 하고도 당선자를 가리지 못할 때까지 대통령 후보로 등록조차 하지 않은 무명의 정치인이었다. 각 정당 원내대표와 국회의장, 부의장 등으로 구성된 원로회의가 소집되어 이 분을 잠재 후보로 삼기로 한 뒤 9월 30일에야 공식적으로 후보 등록을 하였고 타 정당의 유력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싫어하였던 정당들로부터 두루(?) 지지를 받아 결국 당선까지 되었다(토머스 제퍼슨을 선출한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도 연상된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않은 대통령이었지만 지금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여하간 에스토니아는 전 세계로부터 폭발적 관심과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고, 유럽의 실리콘밸리, 4차 산업혁명의 허브로 도약하고 있다(세계은행 디지털 국가 순위 1위, 세계경제포럼 기업가 정신 1위, OECD 평가 조세 경쟁력 1위...).
에스토니아는 작은 크기에, 인구가 적고 젊음으로 인한 기동성을 십분 활용하여, 작은 아이디어의 단초라도 바로 실행전략을 짜서 행동으로 옮긴다(맨날 '창의', '혁신', '실험' 이런 생각만 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던 것이, 다소 가벼운 자리에서 내가 지나가는 말로 툭 내뱉은 아이디어를 메모하더니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당장 회의를 잡아야겠다며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다른 글에서 에스토니아 고위직이 대단히 젊다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 참고로 대통령은 1969년생, 총리는 1978년생이고, 국가 CIO인 심 시쿳Siim Sikkut은 01학번, 전자영주권 총괄대표인 카스파르 코률루스Kaspar Korjus는 07학번이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은 오히려 이들의 젊고 열린 생각을 보좌한다). 국가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업처럼 민첩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그 바탕에는 "기술 분야에서 국가가 민간을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부는 기술 개발에 투자하는 '주체'가 아니라 '퀵 팔로워'일 뿐이다. 정부가 할 일은 단지 기술 진화를 위해 법적인 토대를 만들고, 민간이 경쟁에 뒤처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기술 개발 자체는 민간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이다."(책 65쪽)라고 하는 확고한 철학이 깔려 있다(서울시가 추진하는 '제로페이'를 보면 역시 서울시에서 개발했다가 사라진 택시 호출 앱 '지브로'를 떠올리며 한숨짓지 않을 수 없다).
블록체인에 관해서도 상당히 합리적이고 균형있게, 실사구시적으로 사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블록체인 기술을 현실에서 가장 활발하게 적용하고 있는 기업, 가드타임의 Martin Ruubel 사장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블록체인이 바꿀 세상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지 않아도 된다. 블록체인은 아파트로 비유하면 재건축이 아니라 리모델링 기술이다. 불록체인이 기존 시스템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블록체인은 기존 시스템에 통합되어 새로운 장점을 찾아가는 기술로 봐야 한다. 블록체인을 논의하면 일반적으로 암호화폐, 스마트 컨트랙트부터 떠올리지만 이보다 중요한 가치는 상호 간 신뢰성에 기반한 새로운 기술이다. (...) 블록체인 기술이라도 보안 측면에서 100%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정치가나 행정가들이 100% 완벽한 사이버 방어 장치를 만들겠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불가능한 목표이며 100% 안전한 사이버 보안 장치는 없다. 책임 있는 리더라면 취약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가정하고 어떻게 대처할지, 잠재적 가해자 배후에는 누가 있을 수 있는지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책 129~132쪽)
모든 행정망과 민간 DB를 연결하는 X-Road도 부럽기만 하다. 조금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민관 각 참여 주체들이 개인정보들을 분산 저장하되 필요할 때 당사자 동의와 기관의 승인을 통해서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건강기록은 핀란드와도 연결하여 에스토니아, 핀란드 사람들은 서로의 나라에서 편리하게 진료받을 수 있다(핀란드인으로부터 에스토니아를 '작은 동생little brother' 정도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도를 보면 헬싱키는 탈린의 정북 방향에 있다. 비행기로는 이착륙까지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탈린의 서쪽으로는 스톡홀름이, 동쪽으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있다. 어떻게 한자동맹의 중심 무역항이 되었는지를 지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바다 진출을 위해 많은 희생을 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가 훗날 탈린에 당도하여 '이 곳을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하고 아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좌우간 이러한 것들도 우리나라의 현재 인식수준과 논의지형에서는 거의 꿈꾸기 어려운 일이다.
책은 중언부언 나열식에, 수박 겉핥기, 용두사미가 된 감이 없지 않지만, 기자로서 할 일은 충분히, 그것도 때맞추어 신속히 잘 해주셨다고 생각한다. 기업들이야 기회가 있으면 알아서들 할 것이고, 이제 개발자, 연구자들과 위정자들이 파고들 차례이다(에스토니아 연구정보 포털 https://www.etis.ee도 기가 막힌데,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그동안은 어떤 연구를 해왔고, 지금은 어디서 돈을 받아 누구와 함께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투명성'이라는 무기를 통해 더 많은 기회와 협업을 도모하겠다는 거다.). 알고 있는 것을 어딘가에는 풀어둘 필요도 있을 것 같아 주저리주저리 간략하게나마 써보았다.
덧1. 5장에 실린 법인 설립에 관한 여러 팁과 정보는 어느 정도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에스토니아는 정말 많은 것을 (특히 그것이 외국자본 유치에 필요한 사항이라면) 온라인에, 영어로 공개해두고 있다.
덧2. 6장은 나머지 발트 3국 멤버인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를 짧게 다루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 아래에서부터 리투아니아(수도 빌뉴스), 라트비아(수도 리가), 에스토니아인데, 인구도 아래에서부터 280만, 190만, 130만 정도이고, 면적과 GDP도 그 순서이며, 놀랍게도 각각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쓰기 때문에 서로 말이 안 통한다(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사람들이 각자 자기네 말로 떠들어도 소통이 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1인당 GDP는 에스토니아가 2만 달러 정도로 가장 높다. 삼성전자가 1999년, LG전자가 2006년 리가에 진출하여 현지 법인을 두었는데, 올해 9월 우리와 라트비아가 항공협정에 서명하여 주3회 직항노선이 생길 예정이다.
덧3. 국내서 몇 권을 보태어 본다. 책이 많이 부족하다. 티나 유진선 님의 『북유럽 셀프 트래블』은 매우 훌륭한 책이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여 탈린(에스토니아) 정보가 많이 부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