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신법관제라는 미국적 맥락에서 조금 더 있을 법한 이야기이긴 하나, 썩 괜찮은 이야기를 두 배우의 훌륭한 연기가 잘 살렸다. 추천할 만한 영화.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대법관으로서 2006년 치매 남편을 돌보기 위하여 사임한 샌드라 데이 오코너는 지난 10월(88), 스스로 알츠하이머 치매의 초기 단계임을 밝히며 모든 공적 활동에서 물러났다. 현역 최고령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은 2009년 췌장암 수술, 2014년 심혈관 스텐트 시술을 받은 데 이어, 며칠 전(85) 낙상사고로 갈비뼈를 다쳐 입원한 바 있다.

  (상대적으로) 문제'풀이'가 아니라 문제'해결'에 조금 더 무게를 두는 커먼로 전통에서, "경험 많고 현명하고 성숙한 법관"(촌장)에 대한 요청과 그 자연스러운 연장일 수 있는 종신법관제는, (어느 조직에서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실질적으로 일을 하는 젊은이, 즉 방대한 기록을 샅샅이 검토하여 법정의 썰과 대조하고, 판결문 초고를 '실제로' 쓰는 로클럭(law clerk)에 의한 보충을 필요로 한다(참고로, 미국에서 연방판사들은 대개 2명, 연방대법관들은 4명의 로클럭을 둘 수 있고, 이들은 1~2년의 임기를 마친 후 주요 로펌에 거액의 연봉을 받고 스카우트되었다가 연방검사, 행정부, 로스쿨 교수 등을 거쳐 다시 연방법관으로 임명되곤 한다).

  여담이지만, 이른바 '숙의민주주의'의 유행으로 양산되고 있는 각종 위원회에서도, 논의거리를 실제로 미리 작성하는 젊은 실무진이 없이는 갖가지 즉흥적 뇌피셜과 카더라만 난무하게 되기 일쑤다(스스로 정보를 탐색하여 자료를 준비하는, 독립적, 비판적, 적극적이며 실력 있는 토론자가 있지 않는 한, 주재자가 논의 방향을 적당히 이끌어 결론을 특정 범위 안에 닻 내리게 하는 것은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논의대상에 따라 토론은, 참가자들을 타협하게 하기보다는 수사적 우위rhetorical supremacy를 가지는 한쪽 방향으로 실제보다 더욱 급진화시킬 위험을 품고 있기도 하다. 어떤 사람을 위원으로 위촉할 것인가도 투명하게, 객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고, 전문성보다는 이름값을 주로 따지게 되기 쉽다. 그렇기에 여러 위원회들은 이해당사자가 원하는 결론,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대중영합적 결론에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한 장치로 악용될 위험이 크다).


  한편 디지털 혁신을 통해 미래를 앞당긴 나라, 에스토니아의 경우, 사법부 수장인 Priit Pikamäe 대법원장이 1973. 11. 22.생이고(https://www.riigikohus.ee/en/supreme-court-estonia/chief-justice-supreme-court), 각급 법원장이 40대 초중반이다. 심지어 법관의 평균 연령이 더 낮아지고 있다고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는 힘들어진다. 개인들 사이에 땅이나 물건을 사고파는 전통적 유형의 분쟁도 아직은 많지만, 재판은 그저 옛일에 대한 한가한 말놀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문화되고 가속도 붙은, 첨단의 현실을 다룬다. 새로운 분쟁을 해결하려면 좋은 인문주의자(humanist)인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거대조직과 전문가들의 말과 생리도 구체적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사법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디지털화에 대한 이전 세대의 저항과 부적응이 몇 년만 지나면 그들의 (생물학적) 퇴장과 더불어 '자연히' 극복될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사법판단에는 기술적 요소와 가치판단의 요소가 혼재한다. 문제를 넣으면 자동판매기처럼 답이 재까닥 튀어나오는 자동함수가 아니다. 실제로 있었던 객관적 사실과, 관련된 이들 각자에게 기억된 주관적, 현상학적 사실(혹은 진실)과, 증거에 의하여 가상적으로 구축된 소송법적 사실 사이에는 틈이 존재하기 때문에, 재판이라고 하는 기계 혹은 상자(函)에 무슨 문제를 입력 것인가에서부터 의견이 뜨겁게 갈린다. 그리고 당연히, 사회와 시대의 산물인 법관마다도, 소송'게임'에서 사실을 정리하는 방식과 그렇게 정돈된 사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법판단을 인공지능으로 대체하는 것이 흔한 생각처럼 간단하지만은 않다[개인적으로, 도그마틱적 논증(논리적 판단)의 영역에는 규칙 기반 알고리듬이, 가치판단(혹은 양적 판단; 빅데이터 기술의 요체는 질적 판단으로 여겨졌던 분야의 양적 판단으로의 "질량전화"가 아닐까)의 영역에는 빅데이터 학습에 기반한 딥러닝 기술-사례 기반 알고리듬-이 응용될 수 있겠다는 기초적인 생각을 가지고는 있다]. 게다가 인공지능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습하기 때문에, (이론상) 선례가 분포한 기왕의 범위에서 결론 낼 수밖에 없다(양형기준도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정녕 그와 같은 법규주의적(legalistic) 판결을 원한다면, 경험 많고 노회한(?) 경력자에게 재판을 맡길 것이 아니라 고강도의 포괄적 공부를 갓 마친(말 그대로 '틀리지 않기 위한', 문제'풀이' 훈련을 최근까지 집중적으로 한), 세상과 세월의 여러 인연과 영향력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울 젊은 법관들에게 재판받는 것이 나을 수 있다(법관 임용 시에 변호사 등으로서의 법조경력을 요구하지 않는 국가들은 어느 정도 그러한 생각을 밑에 깔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이 더 순수한 열정으로, 기운 넘치게 - (읽어야 할 분량이 아주 많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덜 지치고 감퇴한 '시력(視力)'을 가지고 - 일할 수 있기도 하다. 다만, 현대사회는 기본만 두루 다루는, 알아야 할 지식의 최소한인 시험공부만으로는 도저히 자족적 판단력을 갖출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해졌는데(시험공부는 내용이 아닌 '프레임'을 갖추어줄 뿐이다), 아무래도 새로운 다른 분야를 빨리 습득하는 데는 젊은 감각이 비교적 유리하다(통섭함에는 개인의 품성도 중요할 텐데, 호기심을 샘솟게 할 진취적이고 열린 태도와, 응용력의 텃밭이 될 견문과 철의 적절한 조합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사법판단에 내재한 가치판단(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판단'이라고도 할 수 있을) 요소의 존재를 허심탄회하게 인정한다면, 문제는 그 내용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있다. 잠정적 결론이기는 하나,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것이 열어준 사회적 깨달음의 증대(사회적 합의), 둘 간의 서로 되먹임에서 답을 찾아야 하지 않나 싶다. 여성과 성소수자를 포함한 인간의 자유와 권리 확대, 바꾸어 말해 도덕적 진보는 사실은 돌이켜 보면,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이성, 합리성, 경험주의, 회의주의)가, 갖은 비합리적 억견(臆見)들을 비가역적으로 물리치면서 쟁취될 수 있었다(물론 여전히, 우상을 파괴한다면서도 시대를 거슬러 분별 없이 우상을 추종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전 세계에 매우 많다). 데이터 분석도 앞으로는 점점 더 중요한 판단 근거로 작용할 것이다. 한편, 교과서적으로 사법부는 다수 유권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입법부, 행정부와 달리 '다수주의로부터 소수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관념되지만, Brown v. Board of Education, Roe v. Wade 같은 가장 대담한 판결들조차 당대의 다수 의견에 결코 반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시대 혹은 다수의 인식이 무르익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어느 정도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이를 확인하는 그 반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예컨대, 얼마 전 선고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한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이 10년 전, 혹은 논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20년 전에 선고되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반응했을지를 상상해보라. 그렇기에 재판을 통한 변화는 어떤 면에서(누군가에게는) 느리다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법관도 '있어야 할 법'을 고민하면서 '있는 법'을 적용하는 판단자이기 이전에, 사회적 인식 지평에 영향 받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여하간 쓰다 보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였는데, 법관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생물학적 존재이자, 제한된 지성[Bounded Rationality, H. Simon(1955)]으로 불확실성의 바다를 더듬고 있는[Judgment under Uncertainty, A. Tversky & D. Kahneman(1974)] 심리적, 사회적 존재라는 제약조건하에서, 사법판단의 문제해결 기능을 제고할 차분한 숙고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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