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홍신 세계문학 9
앙드레 말로 지음, 박종학 옮김 / 홍신문화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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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추천 권유도 6

 

내가 독서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한 30여 년 전 초기에 읽었던 작품으로 본 작품을 처음 접한

당시, 어떤 느낌으로 작품의 내용과 주제를 이해했었는지 기억조차 아스라한 그런 작품이었는데,

작품을 책장에서 마주할 때마다 빛바랜 작품 겉표지만큼 그 무엇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는

했었다. 책장에서 작품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면 나는 꼭

너는 어떤 작품인데 왜 여기에 꽂혀 있냐?’

당시 나는 어떤 느낌으로 저 작품을 읽었었지?’

등등의 질문을 해 보지만 항상 동일한 대답인 나도 몰라였다.

그러던 중 고전을 반복해 읽게 되면 나름의 재미와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들어 다시 도전하게 되었으나 솔직히 책장을 덮은 지금, 아무런 감흥도, 느낌도 없는 그런 작품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생각 밖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을 뿐이다.

 

작품은 중국 혁명을 무대로 1927년 실권을 장악한 장개석의 국민당이 공산주의자에 대한

숙청에 나서자, 이에 저항하여 일종의 쿠데타가 일어나지만 결국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작품은 이런 배경을 갖고 전개되고 있었다.

작품이 진행되는 속에 몇몇 유형의 인간이 등장한다.

허무주의에 젖은 고독한 테러리스트 ’, 착실하게 경력을 쌓은 러시아인 직업 혁명가 카토프

그와 반대로 반혁명 세력에 속하는 페랄케니히’, 마르크스 사회학자이자 아편중독자

지조르와 그의 자식인 혁명가 기요그리고 그의 아내 메이.

이들이 펼치는 저항 운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 각종 서평이나 출판사가 제시하고 있는 분석 내용을 그대로 따온 인물평인데, 내가 볼 때는

이 역시 동의할 수 없는 분석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의 견해로는 작품 속 인물들은 그저 그런

평범한 인물들이었고 혁명을 완수시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 혼란의 시기에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런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의 심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은 테러에

실패하고 감옥에서의 심리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 작품의 의미를 더 살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

 

작품이 갖는 의미가 불후의 명작이라는 평가가 하도 많아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 작품 행간에

숨겨진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려 노력했으나 솔직히 가슴에 와 닿는 측면이 거의 없었던 그런

작품이다

- 이 작품 역시 시대와 환경이 많이 다른 지금의 판단 기준으로 작품을 살펴봐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작품 맨 뒷장에 소개되고 있는 일부 문장을 인용해 본 작품을 평가해 본다면

[작품은 혁명과 전쟁, 테러리즘이 만연한 세계 속에 여러 유형의 인간을 던짐으로써 인간 존재가

갖는 한계 상황과 행동의 의미, 삶과 죽음의 차이, 동지애, 인간의 가치 등 인간의 조건을 탐구한

작품이다. 작품을 접한 독자들에게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보다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있다]

나의 견해로는 작품의 뒷부분에 나오고 있는 주인공들이 감옥에서 나누고 있는 말과 행동에 대해

그리고 기요의 아내 메이가 남기고 있는 이야기만을 별도로 구성해 보면 하나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었다.

 

작품을 읽으며 나는 생뚱맞게도 작금의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어느

권력기관의 인물과 금전 권력의 최정상에서 형제간에 보이지 말아야 할 추악한 분쟁 이야기를

들으며 또 고고도 방어 미사일(일명 : 싸드)’를 두고 벌이는 정신나간 오피니언 리더들의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사문난적같은 패악질을 보면서

그들에게 이 땅에 존재하는 인간들이라면 진정한 인간 조건이 무엇인지를 한 수 가르쳐 주고

싶은 생각이 절실하게 밀려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상을 살아온 나의 견해로 위와 같은 구역질나는 삶을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한마디 충고를 해 준다면 오늘날 이런 근원적인 부패의 문제는 바로

가정 교육이 무너졌기 때문이며 또 다른 원인 하나는 바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 가진 자들의 어이없는 패악질과 반대를 위한 반대의 몰염치적 군중 심리를 이용하는

자칭 식자(?)라는 인간들이 벌이는 수준 이하의 행동을 보면 여러 신문칼럼이 공통으로

단 한 줄로 명쾌하게 우리 스스로를 질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남들과의 싸움은 등신, 우리끼리 싸움은 귀신

라는 문구인데 나는 1000% 동감한다.

그럼 이런 일이 왜 발생했을까?

나의 견해로는 이 모든 것이 개발연대를 치열하게 살아왔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알게

모르게 강조했던 어떻게 해서든 이기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도 안 되는 교육을 시켜

왔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싶다.

 

가끔 매스컴을 통해 중국인 요우커들이 해외여행을 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각종 기행과

추태를 부려 중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을 스스로 깍아 먹고 있다는 해외 토픽을 접하고는

하는데, 이런 기사를 접한 어느 중국인이 나름대로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는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투쟁적으로 자란 부모세대들이 자녀 교육을 잘못시켜 저 모양

이라는 단순 명쾌한 분석으로 요우커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있는데,

작금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병폐 모습 - 대기업의 갑질, 방산 비리, 원전 비리,

법조 비리, 세정제 파동 등 - 도 요우커들이 해외에서 벌이는 그런 모습과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철저히 무너진 가정 교육환경 속에서 자란 인물이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 어린 시절 가정교육을 통해 정의가 무엇이고 이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듣고, 보고,

배운 게 없다보니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 가지려 욕심을 부리다 보니 오늘날과 같은

그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작금 벌어지고 있는 국가의 안전이 걸린 문제와 연관된 싸드문제만 해도 그렇다.

제주 해군기지의 강정마을 사건, 찬안함 사건, 세월호 사건과도 같은 일만 벌어졌다

하면 듣보잡단체들과 인간들이 득달같이 나타나 앞장서서 사사건건 파당과 지역과

이념을 앞세워 짓밟고, 헐뜯고, 헤집어서 국난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나라가 됐으며

또 어느 교육 공무원이란 작자는 국민을 개, 돼지라는 표현했는데 그런 개, 돼지들이

내는 세금으로 월급을 꼬박꼬박 받는 자기는 개, 돼지에 붙어사는 기생충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나 씨부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과거의 비리는 가짜 고춧가루, 불량 냉면, 가짜 두부, 저울과 되박 순박한 눈속임 등과

같이 먹고 사는 것에 기초한 애교 수준의 비리가 주를 이루었다면 작금의 비리는 어떤가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 갖고 해 쳐 먹으려니 문제가 단단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긴 이야기를 해 봐야 내 입과 손가락만 아플 뿐이다.

더 이상 이런 사건이 나오지 않는 그런 사회, 이 난국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또 그런 세상 속의 인간이라면 어떤 조건을 구비해야 하는지를 나의 자손들에게 정말

차분히 가르쳐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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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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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6

 

시는 쓰는 사람이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다

 

우연히 접한 신문 칼럼에 어느 인문학 연구모임에서 이 작품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모임도 만들어 탐독과 토론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작품을 택해 읽게 되었는데, 솔직히 그 깊이와 감흥이랄까 작품에 대한

색다른 느낌이 기대와는 달리 별로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책 뒤편에 있는 작품 해설까지 철저히 읽으며 작품이 던지고 있는 주제성이나 문학사적 가치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을 해 보았으나 아직도 왜 이 작품이 불후의 명작처럼 문학에 관심이 있는

후세들이 높이 평가하는지 잘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 이 작품은 여러 작품 중 그냥 단순한 한 작품에 불과했다.

- 과거 위대한 갯츠비를 읽고도 같은 이야기를 해서 나중에 무지 후회했지만 나중에 그런

  실수를 반복한다 할지라도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 -

 

출판사가 제공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 보면

[작품은 어느 무명 저널리스트의 회고로 시작한다. 1970년대 초 칠레의 작은 어촌마을

이슬라 네그라라는 곳에는 외딴 지역에 살고 있는 파블로 네루다라는 인물에게 우편물을 전달

하는 것이 유일한 업무인 젊은 우체부 마리오 히메네스가 있다.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스를 보고 첫눈에 반한 배달부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소녀를 위한

()를 써달라고 조른다.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메타포를 가르쳐주고 베아트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한다. 마침내 결혼하게 된 마리오와 베아트리스. 이후 네루다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

되어 마을을 떠난 후에도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간다.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네루다가 위험에 처했을 때 마리오는 목숨을 걸고 그를 찾아가 곁을

지킨다.

작가는 마리오의 개인적인 삶과 칠레의 냉혹한 정치사 사이에서 절묘한 평행선을 만들어 낸다.

작가의 표현대로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는이 이야기는 칠레 민중들에게

바치는 헌사인 동시에 사랑과 시와 문학을 이야기하는 감동적인 노래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어느 대목이 칠레 국민의 감정과 냉혹한 칠레의 정치사를

이야기하고 있는지 말이다.

내가 문학사적으로 보았을 때 고전이라고 분류되는 작품을 읽으며 항상 주장했듯이 어떤 작품

이던간에 그 작품이 쓰여질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 사회적 KEY요소를 철저히 이해하지 않고

작품을 읽게 되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작품은 아무런 의미 없이 다가선다는 것을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작품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어떤 특정한 ()’에 대한 정밀한 이해와 분석

없이는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는 작품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 작품으로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런 시들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나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본 작품에 대해 별반 감흥을

얻지를 못했다.

앞전에 남미 작가들 작품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가리), ‘백년 동안의 고독

(G. 마르케스)‘ 등도 솔직히 이런 범주의 작품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내가 남미의 정치, 역사적 이해도가 높아진 다음 본 작품을 다시 접하게 된다면

그 때가서 심사숙고하며 읽어볼 생각이다. 작품을 읽으며 나름 타인에 비해 많은 독서를 해

왔다고 자부는 했지만 하여간 남미 작가의 작품만 접하면 내가 그간 가졌던 그런 모든 생각은

가장 큰 자만이었음을 스스로 느끼고는 한다. 좀 더 자중해야겠다.

그리고 무식해서 미안 - 작품과 저자에게 - 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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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전 -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
성철.법정 지음 / 책읽는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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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3

 

우리 불교계의 거두(巨頭), 아니 큰 별이셨던 두 분 성철법정스님의 어느 젊은 날  대화

내용을 엮은 것으로, 작품을 홍보하고 있는 출판사의 홍보와는 달리 그 내용이 한마디로

빈한((貧寒)’하기 짝이 없는 작품집이었다는 말 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하여간 출판사에 속았다는 느낌 밖에는 달리 할 이야기가 없는 그런 작품이다.

 

기독교 신자인 내가 불교 내용을 다룬 이런 작품에 접근했다는 것은 얼핏보면 무식한 개신교인이

이단 종교를 찾았기 때문에 내가 소속된 종교 집단으로부터 큰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 이유는 내 종교관이 확실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부터의 감사를 항시 온 몸으로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에 또 나는 종파적 초월주의와 박애주의를 매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작품을 아무리 읽어도 종교관이 흔들리거나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오히려 진정으로 자신의 종교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이런 타 종교를

믿고 따르는 타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접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 바이다.

, 자신의 종교와 자신이 믿는 절대자에 대한 더욱 확고한 확신을 갖기 위해 또 자신의

종교관이 틀렸는지를 확인하고 스스로 마음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꼭 내 종교와 비교가

되는 종교관이나 작품이 있다면 한번은 읽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이유는 내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한 법이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내가 내 종교를 통해 깨달은 나름대로의 심오한 진리(?)를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 전도

(개신교의 입장에서 볼 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날 전철 속에서 마주한 개신교를 열렬히 전도하시던 분이 전철 안에 조용히 앉아 계시던

나이 지긋한 스님을 향해

하나님을 믿어야 천당 갑니다

라고 이야기하자 대다수의 승객들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 스님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던 모습이 지금도 내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런 볼쌍사나운 현장에 우리의 주님이 살아 계셔서 그 모습을 목격하셨다면 무어라 이야기하셨을까를 생각하니 지금도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버트란트 러셀이

개신교의 이기주의적 행동이 오늘날 개신교를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다

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간음을 했던 여인이 군중에 쫓겨 도망쳐 왔을 때 군중을 향해 조용히

"죄 없는 자가 먼저 나와 간음한 여인을 먼저 정죄하라

는 말씀을 전하시던 주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 몸에서 나온 열 손가락의 크기가 다 다르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엄지가 새끼나 약지 손가락을 향해 내 엄지가 최고라고 이야기할 수 없듯이 내 종교가 너의

종교보다 더 우월하다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관점과 받아들이는 측면이 사람과 인종 그리고 지역에 따라 전부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작품을 고매하신 스님들이 어떤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큰 마음을 먹고 접하였으나 불교적 깊이가 적어서 인지 아니면 내 마음의 벽이 높아서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솔직히 동의할 수 없는 구석이 있는 듯하여 그리 흔쾌히 작품내용

전체를 받아들이거나 동의하기에는 약간은 거북스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위에 이야기한 내용보다도 내가 실망한 것은 스님들의 고매한 명성을 이용해 출판사가 너무

얄팍한 상술로 불교를 알고자 노력하는 초심자나 불교라는 종교에 그리 높은 정신적 영향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상대로 너무 고매하게 포장을 해 작품을 선전하고 있기 때문에 혹시 이

작품으로 인해 큰 실망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작품 내용도

내용이지만 출판사에 실망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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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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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작품 제목과 같은 행동을 한 인물로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영웅중의 영웅이라고 항시

생각하고 있는 분의 이름이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지 않아 무척 실망스러웠던 작품이지만 나름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어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르고 살고 있는 요즘 세대 인간들이 읽었음

하는 작품이다.

그의 이름은 어니스트 새클턴이다.(그가 누구인지는 여러분들이 찾아보시길...)

내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주제로 다루었던

인간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쓰러질 수는 있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 자체였기 때문이며, 오늘날 크게 칭송받고 패배자이면서 패배자의 범위가 들어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부하들을 자신의 목숨같이 아껴서 생환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한 채 저자가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위대한 패배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 정리해 보고자 한다.

작품은 최악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로 타이타닉호 선장인 에드워드 스미스’ - 그는 아마 그 어떤

형태의 선박 사고가 나도 매번 그의 이름이 언급될 것이다 - 와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

예로 들었고, 반대로 영광스런 패배자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별칭인 사막의 여우라 불리었던

에르빈 롬멜과 새로운 사고를 부르짖으며 글라스노스트(개방, 투명성 서구 여론에 대한 신중한

접근)와 페레스트로이카(국가, , 총체적 개혁)를 천명하며 썩은 물처럼 정체되어 있던 소비에트

체제를 부숴버린 고르바초프를 들고 있다.

(이들의 세부적인 이야기는 본 작품을 사서 읽을 것을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나는 누가 뭐래도 작가의 주장에 전혀 동의를 하지 못하는 인물이 하나 있는데 그는 바로 쿠바의

영웅이요 사회주의 영웅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체 게바라라는 인물이다.

저자는 그를 위대한 패배자라 외치고 있는데, 나는 그를 이전의 체 게바라 평전통해서도

접하고 평하였지만 그를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인물로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작품에서 전 세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고 평가하면서 게바라는 이 세계에 비해

너무나 선한 모든 사람이 결국 악한 세상 때문에 죽고 마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였다며 영광스런

패배자로 선정하고 있는데,

나는 그가 정말 그런 숭고한 정신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했는지가 궁금하며 오히려 그를 보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IS’알카에다가 생각났으면 생각났지 과분하게도 위대한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정도의 인물로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의 행동을 읽다 보면 우리의 문학작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속에 등장하는 곽오주라는 인물

- 작품 속에서 그는 어린 아이를 자신들의 행동에 걸림돌이 된다고 죽이고 있다 - 과 뭐가 다른지

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의 이런 관점과 시각에 대해 무식한 놈이라고 욕을 할 수도 있다.

역사도, 자본주의에 맞서 처절히 싸운 용사도 모르는 놈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시각도 있지만 나의 이런 시각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는 단순히 현실 세상에 부적응 상태를 보이다 우연히

그런 길로 들어선 인물이고 거듭난 것이지 어떤 시대적 사명감에 의해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절대 동의하지 못한다.

나의 관점으로는 그는 현실에 부적응을 보여 일상의 돌파구를 찾아 분쟁 지역을 찾아 나선 그런

평범한 인물이었거나 분쟁지역만 찾아다니며 자기 스트레스를 풀 요량으로 게릴라전에 참여한

인물(전투 용병)이 아니었을까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어니스트 새클턴’(그가 누구인지 궁금하면 찾아 보시라)같은 인물로

나는 미국의 엘 고어부통령을 들고 싶다.

그의 행동은 지금도 툭하면 우리 대통령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질하는 한국적 민주주의

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행동을 했기 때문이며 아직도 좀 세상을 안다고 외치는 인간들과 매스콤을 통해 민중적 스타일의 스타적 자질이 있다고 스스로 자평하고 있는 일부 모자란 인간들이

툭하면 지랄치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배워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그는 행동으로 보여준 인물

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패배자로 또 매리 스튜어트스코틀랜드 여왕(헨리 7세 증손녀)헨리 16그리고

독일의 황제이자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빌헤름 프리드리라는 인물을 들고 있다.

이들이 왜 그런 평가를 받는지는 작품을 사서 읽으며 느끼기 바라고 나의 경우는 그들의 이름을

마주하다 보면 우리 정치판에 항상 문제를 몰고 다니는 문제적 인사들이 항시 떠오르고는 하는데 실명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쯤 읽어 보면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 다 알 것이다

그런 인간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 헨리 8세와 둘째부인 에블린 사이에 태어나 일세기를

풍미한 엘리자베스영국 여왕이 후사 없이 죽자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왕위로 올랐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상세한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도 그들이 그런 찬스를 잡을 수 있을지가

오늘도 궁금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독일 수상까지 될 뻔하다 실패한 독일의 라이너 바르첼이라는 분이 1962자신이

속한 당의 전망 보고서에서 주장했다는 문구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어 여기에 옮겨 보면

앞으로는 히틀러와 전쟁 그리고 궁핍을 경험하지 않았고 복지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신세대가 사회의 주류가 될 것이다. 종교적 관심은 뒷전으로 밀리고, 권위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으며, 원자력 시대와 자동화 시스템이 새로운 조건들을 만들어내고, 일보다는 자유가 더 중요

한 시대가 올 것이다"

이 문구는 시간이 흐른 지금 읽어도 섬뜩한 예지력에 놀랄 뿐이다.

 

작품에는 여러 유형의 실패 인물들이 나오고 있다.

비록 후세들이 접하고 있는 대부분의 역사가 승자들의 자랑거리로 일관된 천박하고도 승리

지상주의적 편향된 비망록이고, 일부 패배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행위가 승리자의 비망록 못지

않게 작금의 시대에 고귀한 이야기와 교훈처럼 전해지고 있는 이유는 억울하지만, 분하지만

그리고 애통하지만 패배깨끗이 승복하고 인정할 줄 아는 그런 아름다운 행동과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패배를 패배로 인정하지 않고, 승자를 승자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소아병적 인물들에게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는 후세들은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대 놓고 아주 크게 이야기하고

기록하여 후세에 전할 것이다.

- 세계사적으로 보면 대표적인 게 일본이고,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사적으로 보면 하여간 엄청

  많다. -

아마도 이렇게 말이다.

역사 속에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인물의 대부분은 자신의 팔뚝이 엄청 굵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자 자신의 팔뚝을 여러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해 이리저리 휘두르다

 팔뚝에 지가 맞아 쫄딱 망했    

 

그 밖에 언급되고 있는

- 요한 스트라우스(아들에게 가려진 영광)

- 렌츠(괴테에게 발길질당한 천재 작가)

- 라살(마르크스에 눌린 패배자 - 노동 운동의 메시아)

- 트로츠키(스탈린에게 쫓겨난 패배자)

- 오스카 와일드(시대의 방랑자)

- 크누트 함순(경솔한 말로 세계적인 명성에 먹칠한 작가)

- 리제 마이트너(노벨상을 빼앗긴 물리학자)

- 앨런 튜링(2차 세계대전을 도운 수학자, 그와 관련된 사항은 영화로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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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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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5

   

가슴 속 추억은 추억일 뿐

 

작가께서 살아오신 지난하고 어려웠던 시대를 소재로 작품은 일기장처럼 무덤덤하게 전개하고

있는데 작가와 같이 대 작가분들이 더 이상 이런 주제를 축으로 하는 작품을 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나온 이문구의 관촌수필’,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김원일의 마당 깊은

혹은 늘 푸른 소나무(10)’,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같은 작품으로 부모님들의 어려웠던

시기의 이야기는 충분하다고 여겨져서이다.

- 나도 어느 정도 작품 속 배경이 되고 있는 생활을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

또 다른 측면은 어렵고 힘든 시절의 이야기가 신세대 독자들에게 얼마나 호소력 있게 다가 설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이런 작품으로는 그런 세월을 살아오신 일부 기성세대들

입맛을 맞추고 그런 독자들에게 과거의 삶을 회상하게 해 줄 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신규 독서

인구를 새롭게 창출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요즘의 젊은이들이나 학생들에게 부모 세대가 경험했던 어렵고 가난했던 주제를 갖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 본들 어느 영화의 한 대목으로 이해할 뿐이지 그게 얼마 전 우리들이 살아왔던

세상 이야기라는 점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독서 인구의 저변을 넓히려면 이런 류의 작품보다는 좀 더 참신한 소재가 다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

- 실제적 역사 이야기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어진다. 우리 부모들이 겪은 가난과

  어려움을 역사의 한 범주로 넣어 판단한다면 할 이야기는 없겠으나 단순한 가난과 어려움만을

  극화시키는 이야기로는 취업문제, 내집 문제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세대에게 공감을 못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내가 그랬고 당신이 그랬듯이 내 앞의 현실이 지난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부모세대의 고난 역시 해결책이 아닌 쓸데없는 잔소리로만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 

 

초등학교 시절 서울의 중심부에 살았었지만 정말 점심시간만 되면 도시락 대신 수돗가에서

허기를 채우던 친구들이 있었으며, 한 학급 학생수가 거의 90명이다 보니 휴식 시간에 화장실

가는 게 데모 군중 속을 뚫고 다니는 듯 했었던 시절이 있었으며 채변 봉투와 쥐꼬리를 의무적

으로 제출하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엔 다른 동네로 이사해서 동네 또래 친구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정작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나와 이웃집 친구 외에는 없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하나 밖에 없는

외길로 거기에서 버스를 기다리면 학생, 좌로 방향을 틀면 연탄 공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언제나 나와 친구만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동네의 또래 친구들은 전부 좌향좌하여 공장으로

출근하는 그런 동네였고 삼일이 멀다하고 동네 사람끼리 머리채를 잡고 싸움이 벌어지던 그런

동네였다.

고등학교 시절은 대학만이 살 길이라는 일념 속에 다른 것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추억이나 기억이 별로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동네에 아이들이 무지 많았던 기억과 함께 서울 변두리다 보니 집집마다 시골에서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해 뭔가 이뤄보겠다고 힘차게 살아가던 어느 작품의 주인공과도 같은 봉순이 언니들도 상당히 많이

보이던 시대이기도 했었다.

학교에서는 선배와 선생님들로부터 툭하면 얻어맞은 기억 밖에는 없다.

- 당시 학교에서의 구타는 일상화 된 행사와도 같은 시기였으며 학생들에게 행해지던 구타가

  당연시되던 시대로 기억되는데 지금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

어렵게 들어간 대학에서 나름 열심히 공부했었고 ROTC를 거쳐 대기업에 입사해 결혼도 할 수

있었고 자식들도 두었다. 그리고 어언 30년이 흘러 정년퇴직하고 한 권의 책도 썼으며 경쟁력

있는 유망 중소기업에서 제2의 길을 걸었으나 그것도 잠시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다고 나가라고 해서 지금은 집에서 책과 글 쓰기 그리고 잠깐잠깐 운동하며 소일 거리를 찾고 있는 이 시대의

평범함을 가장한 베부른 실직 가장이다.

내가 살아온 궤적을 작품과 같은 방식으로 풀어 보니 작품 내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조용히 입가에 미소만 지어질 뿐이다.

하지만 작품 행간에 숨어 있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절절한 애환은 작가가 아니고는 또 작품 속 주인공이 아니고서는 절대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작품은 이를 긍정의 힘으로 승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어느 작가분께서 황 선생님을 황구라라고 칭하시면 그 분의 창작에 대한 열의를 잘 표현해

주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분이 동료 작가들로부터 그렇게 불리웠던 이유는 아마도 이 땅에 살면서 누구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북으로, 남으로 다니시며 정말로 많이 체험하고, 들으시면서 집필

하셨던 손님’, ‘개밥바라기별’, ‘여울물 소리등과 같은 작품을 통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이를 극복하는 해법을 제시하려 노력하시다 얻은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추억과 그 추억 속에 옹심이처럼 박혀있는 눈물겨운 고난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의 그 모든 것을 어렵고도 힘든 추억으로만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그리 바람직한 삶을 영위할

수는 없음은 물론 남은 인생을 그런 과거에 얽매어 산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서두에 작가와 같은 대 작가님은 본 작품의 주제와 같은 내용의 작품을 앞으로 저술하지

말아달라고 주장한 이유는 더 이상 이런 작품을 통해 부모세대가 사셨던 어렵고 힘든 시대를

잊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부모 세대가 겪으셨을 고통으로 인해 유, 무형으로 제약받을 수 밖에

없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이를 떨쳐 일어나자는 의미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 부모 세대가 겪었을 그런 어려움이 이 땅에서 재발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사는

우리가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또 우리 모두의 희망과 꿈을 그리고 모두가 잘 어우러져 사는

세상을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자는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지 이런 작품이 식상하다

던가 의미가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다시 말해 좀 더 적극적인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런 책이고 작품이라면 한 사고 안 읽으면 되는데 뭔 외침인지 모르겠다.....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고 했으니 그렇게 살면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은 해 보지만 선생의 작품에 자꾸 손이가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항시 이런 작품을 접하면 느끼는 좀 생뚱맞은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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