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역사 - 죽음은 어떻게 우리의 세상을 변화시켰는가?
앤드루 도이그 지음, 석혜미 옮김 / 브론스테인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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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게 부지불식간에 닥쳐올 수도 있지만 예정된 죽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죽음의 종류에 대한 이야기다.

, 작품은 인간이 태어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만날 수 있는 여러 죽음의 경로와 종류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관련 역사와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지식 수준의 내용과 함께 전문

과학지식 내용이 함께 수록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각 소단위에서 이야기하는 내용 모두를 

갑자기 당신들 앞에 펼쳐질 죽음 앞에 공포를 갖지 말라

는 나만의 해석으로 받아 들이게 되었다.

 

작품은 각 소단원(21) 모두가 앞부분은 일반적인 죽음이 찾아오는 상황에 대해, 후반부는 그에

관련된 여러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의학적 상식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나름 유익한 과학 상식을 

전해주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하였으나 부분적으로는 너무 의과학적 접근이 많아 접근

하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게 사실이지만 어려운 부분을 몇 번 반복해 읽다보니 그리 난해

하다고 여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간단한 의학 상식으로 다가왔다.

어찌되었던 작품은 인간이라면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부지불식간에 맞이할 수 있는 죽음에 

관련된 사항을 쉽게 풀어쓰려 노력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할만하였다고 판단한다.

 

단순히 읽으며 죽음에 대한 여러 생각을 갖게 한 작품이었는데 작품의 결론부분에서 마주한

첫 문장

인생에서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이해해야 할 뿐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덜 두려워할 수 있도록 , 다 이해해야 할 때다.‘(위태로운 터전) 

이 문구가 무엇을 의미하고 왜 이 대목에서 튀어나왔을까를 고민하면서 나는 작품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작품이 알려주고 있는 일반적 사실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했고 부분적으로 의학도가 아니면

쉽게 알 수 없는 사항에 대해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접했다.

 

 

[서 문]

- 중세사회는 1340년대 유럽에 퍼진 흑사병(Black Death)으로 한계점을 맞는다.

  흑사병은 13481피사 항구를 통해 토스카나지방으로 들어와 확산된다.

- 흑사병과 함께 기근’, ‘전쟁은 죽음 그 자체와 더불어 중세 아포칼립스(Apocalypse, 종말을 

  뜻하는 그리스어)4대 재앙이었다.

-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비중이 큰 사망 원인은 흔히 심장마비로 불리우는 관동맥성 심장질환

  이고 두 번째는 뇌졸증이며 그 다음은 폐질환(천식, 폐렴 등)이다.


[1장 죽음이란 무엇인가?]

- ‘는 자아의 변화 없이 이식할 수 없는 유일한 기관으로, ‘뇌사는 완전하고 역전 불가능한

  ‘뉴런 활동의 정지로 정의할 수 있으며, 회복 불가능한 혼수상태, 뇌간 반사 부재, 호흡 부재로

  판정할 수 있다.

- ‘뇌간으로 사망 여부를 판단하는데 운동 뉴런감각 뉴런이 뇌간을 통과하여 뇌 상부와 

  척수를 연결되는데, ‘뇌간은 뇌가 신체에 보내는 운동 제어 신호를 조정하고 의식과 각성에 

  필수적이며 호흡과 혈압, 소화, 심박 등 기본적인 생존 기능을 제어한다.

  따라서 뇌간이 기능하지 않으면 의식을 차리고 있거나 기본적인 신체 기능을 유지할 수 없다.

  뇌신경과 관련된 반사 작용이 기능하는지를 기준으로 뇌간이 기능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2장 사망자 통계표를 관찰하다]

- 1592년 영국에서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유럽 보건기록 최초로 사망자 통계표가 작성되나

  증상이 확실한 천연두홍반열등과는 달리 사망 원인이 불분명한 역병의 경우 조사관들이

  사망원인을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 결정적인 증거인 가래톳이 썩어 가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 역병 사망자가 발생하면 격리소를 만들어 28일간 사망한 사람들과 같이 살았던 사람들을 

  격리했으나,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는 죽음의 경우 사망원인을 기록하지 말라고 압박하거나

  뇌물을 주기도 하여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졌다.

- 조사관들이 작성한 사망원인을 종합해 주 단위로 통계표를 출간, 런던 사람들은 발표되는 주간

  발표를 보고 공공장소로의 외출 여부를 결정했다고 한다.

   ---> 초기에는 단순 출생과 사망 건수 그리고 역병을 그 원인으로 나누어 기재했으나 1962

          부터 60개 항목으로 나누어 통계를 냈다.

-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런던에서 마지막으로 역병이 창궐했던 해는 1665년으로 18개월 

  만에 런던 인구의 25%인 약 10만 명이 사망했다.

   ---> 역병이 문제가 되자 찰스 2도 런던을 떠났. 이듬해 런던 대화재이후 역병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화재로 인해 역병의 주요인이었던 의 서식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으로 추측.

- 사망자 통계표가 역병의 진행을 파악하는 용도에서 보험사의 생명보험과 관련된 비용 계산을

  목적으로 하는 등 금융 분야와 관련된 리스크 관리를 맡게 되면서 변화되기 시작

   ---> 기대수명 계산.

- 1662존 그랜트에 의한 제 관찰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질병 및 건강관련 상태의 분포양상과

  그 원인을 연구하는 역학의 기초 마련

   ---> 인구 통계학, 통계학, 보험계리학, 역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됨

   ---> 한 개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나 한 집단의 미래를 타당하게 

         추론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 ‘존 그랜트가 개발한 생명표는 지금도 다양한 미래 예측의 근거가 된다.

  공공 보건의 수요를 판단하고 시대에 따라 사망 원인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이해하려면 죽음

  분류해야 한다.


[3장 건강하게 오래 살기]

- ‘기대수명은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하나의 수치로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고대와 중세의 기대수명은 30세 전후였으나 오늘날은 80세 전후로 기대 수명이 유의미하게 

  변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해야 한다.

- 최근 발생한 기대수명의 큰 변화는 인구학적 천이.

  과거 출생률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질병영양실조’, 때때로 찾아오는 기근’ 및 

  ‘전염병으로 인구 증가는 더뎠다. 시간이 흐르며 가장 큰 사망 원인을 극복하기 시작하면서

  출생률과 사망률이 높은 사회에서 모두 낮은 사회로 전환이 이루어진다.

  ,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는 세대가 생기면서 다음 세대는 아이를 훨씬 덜 낳게 

  되는데 이런 번식 방법의 전환이 인구학적 천이.

   ---> 대부분의 국가에서 인구학적 천이는 일어나고 있으며 기대수명은 74세 이상, 영아

         사망률은 낮고, 노인 인구는 늘어났으며 출산율은 여성 1인당 2명 이하다.

         역설적이지만 기대수명이 높아지면서 인구 감소가 일어난다.

- 대부분 국가에서 2.1명 이하로 출생률이 하락하면서 세계 인구는 2064100억 명 이하에서

  정점을 맞을 전망이다.

   ---> 노년층이 많아지고, 감소하는 청년 생산 가능 인구가 노인과 은퇴자들을 떠받치는 구조가

         심화될 것이다. 중동, 북아프리카,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유럽과 동아시아는 줄어들 것이다.

- 사회적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전반적인 건강 상태는 나빠질 것이다. 따라서 건강 상태를 전체

  적으로 개선하고 싶다면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4장 흑사병]

- 유럽과 북미에서부터 기대수명이 높아지기 시작한 지 약 25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2016

  세계 기대수명은 72세로 로마 시대에 비해 세 배가 됐다.

- 인간이 지구에 살았던 시간을 통틀어 매우 최근까지 삶의 방식은 채소, 과일, 견과와 뿌리가 

  대부분인 수렵과 채취였기에 전염병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만 년 전 농경이 중동, 인더스강 유역, 황허강, 안데스 산매, 중앙아메리카 등 10개 지역에서

  인간의 삶의 방식에 가장 위대한 변화가 일어났고 신석기 시대가 열렸는데 수렵-채취 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은 농민의 건강에 재앙이었다.

   ---> 다양한 식단 구성이 어려워 인간이 주로 먹던 곡물에는 철분 흡수에 필요한 '지방산'부족

         으로 인해 빈혈이 고질적인 문제였다.

- 곡물 생산 증가와 여성이 아이를 더 많이 낳을 수 있게 되었음에도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지

  않은 이유는 영양 문제 외에 수많은 질병이 새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전염병 1천 종 이상은 한 때 동물의 몸에 살았으나 지난 1만년 

         사이 어느 시점에 종의 장벽을 넘어 미생물로 인해 발생한다.

         예로서, 홍역(소의 우역 바이러스), 인플루엔자(가금류)가 그렇다

- 고고학 사료를 근거로 초기 국가들을 보면 자연재해와 외부의 침략으로 인구가 줄거나 도시가

  파괴된 것으로 보여 지기도 하지만 전염병이 원인일 경우도 배제 못한다.

   ---> ‘결핵’, ‘티푸스’, ‘천연두는 농경의 결과로 나타난 최초의 질병으로 여겨진다.

   ---> 질병을 이겨낸 인구 집단은 병을 겪은 적이 없는 다른 인구 집단에 치명적 위험

   ---> 무역이 활발해 지면서 다양한 질병을 서로 교환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전염병이 창궐했을

         것이다. 대표적인 질병이 로마군에 퍼진 안토니우스 역병으로 로마군의 25%가 죽는데,

         중국도 왕조가 무너졌다.(역병 = ‘천연두로 추정)

- ‘폐기물을 남기고 이동하는 유목형태와는 달리 같은 장소에서 일생을 보내는 농경사회는 식수

  오염 등의 문제를 초래하는 하수 처리의 문제가 골칫거리였음

   ---> 신석기 시대 5천 년 간 인구 정체는 이 때문으로 추정된다.

- ‘페스트는 인류를 괴롭힌 최악의 전염병으로 전염성이 매우 높고 전파가 빠르고 치명적

  다른 시기에 가 인간에게 전염병으로 치명타를 주는 데 그것은 6세기 유스티아누스 역병

  1340년대의 흑사병이다.

- 서기 527, 동로마(비잔틴) 제국 황제인 유스티아누스 대제는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541년 

  이집트에서 발생한 치명적 질병으로 인해 4달 만에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40%를 잃고 국력 

  약화로 인해 제국의 꿈을 접게 된다.

   ---> ‘역병의 대유행이 없었다면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의 인구는 줄지 않았을 것이고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힘을 받은 아랍 제국이 7~8세기에 강성했을 것이다.

- 유스티아누스 역병은 처음 나타난 이후 200년간 종종 다시 유행했고, 750년을 마지막으로 

  발발한 뒤 사라졌다. 이후 600년간 유럽에 이 병이 발생하지 않다가 흑사병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 페스트를 일으키는 페스트균은 현재 아프리카, 아시아, 미국 시골 지역에서 발견되는 소형 

  설치류(, 다람쥐, 토끼, 마멋 등)에 사는데, 1346년 이 역병이 나중에 흑사병이란 이름을 

  얻는다. 나중에 대형 상단과 말을 탄 몽골인들이 자주 이동하면서 신종 질병이 동서양을 오갔다.

- ‘흑사병이라 불리던 페스트는 1331~1334년 사이 중국으로 퍼졌거나 심지어 중국이 기원일 수

  도 있다. 1330~1360년 사이 중국 인구가 대대적으로 감소했는데 일부는 전염병 때문이고 

  '기근'과 '자연재해', '정치 불안', '전쟁' 탓도 있었다.

-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최대 60%가 죽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흑사병이 4년 내내 계속되어

  인구의 80%가 증발된 사례도 있었다. 1430년이 되자 유럽 인구는 1290년보다도 적어졌고

  수 백 년간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 살아남은 농민들의 노동력 수요가 훨씬 높아지면서 임금과 사회적 유동성, 법적권리

          생활수준이 모두 향상되었다.

- 페스트는 치명적인 전염병의 전형적 사례로 6세기에 최초로 유스티아누스 역병이 발생한 시점

  으로부터 800년이 지나서야 효과적인 통제 방법이 최초로 발견되었다.

   ---> 이탈리아 정부와 의사는 역병이 창궐하는 조건인 더럽고 열악한 주거 환경, 오염된 

         빈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1650년 이탈리아는 최초로 흑사병을 벗어난 지역이 되고

         전염을 막는 시스템이 개발되는 데 바로 검역조치.

- 검역을 위한 격리기간을 30일에서 40일로 연장하였는데 명칭도 트렌티노에서 40을 의미하는

  베니스 방언 콰란타(quarnta)'를 딴 콰란티노(qurantino)'로 바뀌었다.

  오늘날 검역을 의미하는 콰란틴(qurantine)'이 여기서 왔다.

- ‘파스퇴르로베르토 코흐는 질병의 세균 유래 가설 수립의 개척자들로 특정 미생물이 감염

  원인이라는 이론을 제시한다. 1897폴 루이 시몬드가 쥐와 벼룩을 해결해야 페스트를 예방

  할 수 있다는 합당한 추론을 해 낸다.

- 흑사병을 일으킨 균이 모든 현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병원균 종의 조상임을 확인

- 최근 DNA 연구에 따르면 신석기 문화의 붕괴는 역병때문이라고 한다.

  즉, 신석기 정착지의 합장 묘지에서 유골을 분석해 본 결과, 페스트균 고대 종이 발견되었고 

  유럽에서 신석기 인구 감소시기와 일치한다고 한다.

- 페스트균 박멸은 불가능해 보인다. 페스크 균은 호주와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발견되며

  설치류 숙주의 종류도 다양하기 때문으로 다양한 설치류 종에 기생하고 있는 페스트균을 

  멸종시키기란 불가능하다.

 

[5장 우유 짜는 여자의 손]

- ‘천연두는 기침이나 재채기로 전염되며 전염성이 매우 높고 치명율도 높은 질병으로 1만 년

  전 아프리카 설치류 바이러스에서 진화하여 아프리카 북동부에서 농경이 시작됐을 때 인간에게

  옮겼다고 추정되는 천연두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한다.

- 천연두는 1500년 전에 유럽에 전파된 질병으로 18세기 유럽에서는 매년 천연두로 40만 명이 

  죽었고, 생존자의 3분의 1은 시각을 잃었다.

  프랑스의 루이 15, 영국의 메리 2, 러시아의 표드르 2, 중국의 순치제,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사 대공비 모두 천연두로 사망했고, 스탈린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도 천연두 감염자.

-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가 우유 짜는 하녀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 점에 착안하여 관련 

  백신을 개발하였는데 라티어로 를 의미하는 바카(vacca)'를 따서 시술의 이름을

  백신(vaccination)'이라고 명명했다.

- 북미(1952), 유럽(1953)에서 천연두가 박멸되어,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에만 남아있었다.

  1975년 방글라데시 소녀가 걸린 게 아시아 최후의 환자였다.

- 천연두의 치료는 몇 가지 이유로 매우 중요하다

  우선, 20세기에 4억 명을 죽인 끔찍한 질병을 인류가 퇴치했다는 점이고 이로 인해 전 세계가

  협력하면 치명적인 질병을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으로 실제로 인간이 박멸했다고 할

  수 있는 질병은 천연두가 유일하며 현재는 소아마비박멸도 앞두고 있다.

- 어떤 질병은 백신 만들기가 특히 어렵다. 평생, 최소한 수십 년 면역 효과가 유지되어야 백신의

  의미가 있는데, 이런 질병에 면역성이 오래가지 않는다,

  어떤 병원체는 너무 변이가 빨라 새로운 변이종은 백신을 만든 항체에 인지되지 않을 만큼 달라

  진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몇 시간이면 복제되기 때문에 1년에도 수 천 세대가 바뀌며 

  변이가 일어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코로나 19가 별것 아니게 생각될 정도로 심각한 전염병 대유행을 부를

  수 있는 예의 주시 대상이다. 이 바이러스는 계속 변이하여 항체가 결합하는 표면 단백질을 

  바꾸면서 백신을 피하기 때문이다

- 백신이 여러 치명적인 감염을 예방하는 기적의 전략이긴 하지만 모든 병을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과 전염병의 전쟁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6장 리버풀 슬럼가의 티푸스와 장티푸스]

- 산업화 초기 가난하고 영양 상태가 나쁜 하층민이 모여 사는 곳에 슬럼가가 형성되며 여기서

  ‘티푸스장티푸스가 창궐했는데, 도시가 대호황을 누리며 엄청난 부와 권력이 창출되는 사이

  심각한 건강, 사회 문제도 발생했다.

-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인해 영아사망이 급증하였고 각종 질병이 창궐하였는데 특히, ‘티푸스

  ‘리케차라는 박테리아와 그 유사종에 감염되어 발생하며 가 우글거리는 비참한 환경에서 

  최악의 순간에 번진다.

  1812년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군대가 전멸했는데,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후퇴 때 러시아 군인

  보다 나폴레옹의 군사를 더 많이 죽인 것은 티푸스였다.

- 아일랜드 이민자인 키티 윌킨슨1832년 최초로 리버풀 빈곤층을 위한 세탁소를 열자 티푸스

  처럼 더러운 옷으로 옮는 질병이 거의 근절되었다.

- ‘장티푸스는 티푸스와 증상이 거의 비슷해 오랫동안 혼란을 유발했다.

  사실 장티푸스의 영어 명칭 타이포이드티푸스의 특징을 닮았다는 뜻이다그러나 원인

  전염방식, 병리학, 치료법은 모두 다르다장티푸스는 원인균이 살모넬라균으로 옷에 사는 

  ‘때문이 아니라 오염된 음식이나 음료를 먹거나 마셨을 때 발병한다.

 

[7장 청사병]

- 19세기에 유럽에서 악명을 떨친 콜레라가 처음으로 들어온 건 1831년 영국 동북부 선덜랜드

  입항한 배를 통해서인데, 콜레라는 그전 수 천 년간 인도 사람들을 괴롭혔다.

- 1832년 콜레라는 영국 사망자의 6%를 차지했는데 최근 대유행이 끝난 것은 1975년이다.

  콜레라가 무서운 건 치명률이 높고 건강한 사람이 사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12시간일 

  정도로 매우 짧다는 데 있다.

  콜레라 감염 후 나타나는 현상으로 마지막 단계에서 피부가 청회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청사병(Blue Death)‘이라 부른다

- 콜레라균은 원래 염수에 서식하며 특히 게나 새우 등 갑각류 껍질에 잘 붙어 있다.

  그래서 오염된 물을 마시거나 갑각류를 생으로 또는 덜 익혀 먹을 때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오면

  서 발병한다.

- 콜레라균 번식 과정

  1) 균이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오면 위산으로 대부분 균이 죽는데 콜레라균은 살아남아 소장

     으로 이동

  2) 소장 역시 담즙과 천연 항생물질이 있어 세균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지만 상피세포에 도착해 

     상피세포 층에서 군집을 이룬다.

  3) 소장 내벽에서 콜레라균이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의 면역 체계는 침입자를 인식하고 세균을

     죽이기 위해 움직인다. 이 과정에서 상피세포에 들어가는 단백질 독소를 분비

  4) 콜레라 독소가 염소 수송 단백질을 영구적으로 활성화된 상태로 만들어 인간의 조절체계를

     장악한다.

  5) 염소, 나트륨, 칼륨, 중탄산염이 세포에서 뻐져나와 소장 내강으로 들어오면서 염도가 매우

     높아지게 되고 염분이 수분을 강하게 끌어들여 시간당 2리터, 하루 20리터의 속도로 수분이

     소장 내강으로 모인 후 설사를 유발한다.6 -

콜레라균이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활성화되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지에 대해서는 의학적

   상식 수준에서 참고하기 위해 134쪽을 참조해 보시면 좋을 듯


[8장 출 산]

- 출산 중 또는 출산 직후 세균 감염으로 발생하는 산욕열17세기 유럽 여성의 주요 사망 원인

- 인간이 두 다리로 걸으면서 동물이 스스로 큰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는 출산이라는 과업이 

  인간에게는 고통스럽고 위험한 일이 되었다.

- 17세기 여러 유럽 도시에 산부인과가 세워졌는데 출산 직후 산모에게 덮치는 산욕열은 잔인한

  병이었다. 스코틀랜드 의사(알렉산더 고든)가 산욕열 환자를 진료한 의사나 간호사 방문을 받은

  산모만 산욕열을 앓게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였고, 1843년에 발표된 의학 논문에서 의사가 

  치명적인 질병을 환자에서 환자로 옮기는 매개체라는 증거를 제시한다.

- 산욕열은 항생제(설포나마이드)와 페니실린이 개발된 후에는 완전히 정복됨.

 

[9장 치명적인 동물]

- 매년 전체 사망자 중 1%를 조금 넘는 100만 명 정도가 동물로 인해 사망하는 데 대부분 동물이

  전염병을 옮기는 경우로 그중 80% 이상은 모기가 옮기는 질병 때문이다.

  즉, 모든 동물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곤충은 약 15천만년 전에 

  출현한 모기. 말라리아가 절정일 때 당시 세계 인구의 5~10%가 사망.

- 1882년에 시작된 파나마 운하 공사를 1888년 중단하게 만든 주요 원인인 모기에 의한 

  ‘말라리아황열병이 주요 원인으로 두 병원체의 주요 서식지가 파나마

- 지카바이러스, 뎅기열, 치쿤구니아열, 황열병 등은 이집트 숲모기가 인간에게 옮기는 바이러스

  성 질환으로 감염된 사람의 피를 모기가 빨면 모기의 내장에서 바이러스가 증식다른 조직으로

  퍼지는데 특히 침샘에 들어가 새로운 희생자를 감염시킨다.

- ‘황열병의 경우 아프리카 질병으로 노예선을 통해 북미와 유럽으로 퍼졌다.

  이 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매년 3만 명 정도이고 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다.

- 모기가 옮기는 가장 중대한 질병은 말라리아.

  말라리아는 암컷 학질모기에서 시작되는데 모기의 침샘 안에 살던 실 형태의 말라리아 원충이

  사람의 피를 빨 때 혈관으로 들어간다. 원충은 간으로 이동, 한 가닥이 증식해 수 만 가닥이 되어

  ‘낭포를 형성, 낭포가 파열되면서 기생충이 적혈구로 침범해 산소를 나르는 헤모글로빈 

  단백질을 잡아먹는다.

  여기서 분열체가 만들어지고. 이 분열체는 인간의 주요 장기에 정착하는데 문제가 발생하는 

  장기에 따라 증상이 다르다고 한다. 분열체가 파괴되면 새로운 세대의 원충이 혈류로 유입 

  다시 적혈구를 감염시키고 고열, 발한, 오한 등의 증상이 며칠씩 반복된다.

   ---> 중증 말라리아 증상은 신체의 어느 부위가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장기부전이나 혈액 

         이상으로 나타난다.

- 말라리아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오래되었고 많은 진전이 있지만 아직 예방이나 치료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부분은 아직 없었다.

  참고로 1898년 미국이 쿠바를 침공했을 당시 전투 중 사망한 인원이 1천명 수준이었는데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죽은 인력은 5천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10장 마법의 탄환]

- 19세기 후반까지 백신이 개발된 질병은 천연두가 유일

- 질병은 더러운 공기가 아니라 물속에 사는 미생물에 의해 퍼지는 것

- 인간은 계속해서 감염을 예방, 치료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신종 질병은 언제든 또 나타날 것이다.

  우리에겐 언제나 마법의 탄환이 필요하다.

  즉, 인간 세포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세균을 죽이는 화학물질 다시 말해 표적 유기체를 죽이나

  다른 세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약품(탄환)이 필요하다.

 

[11장 헨젤과 그레텔]

- ‘식량 부족은 인간 개체 수를 궁극적으로 억제하는 기능을 하며, 기근은 자연의 가장 무시

  무시한 최후 전략이다.

- 악덕과 빈곤 없이는 인구가 늘어나는 강력한 힘을 막을 수 없다.(맬서스)

- 현대 영국사 최악의 자연재해로 남은 1783년 아이슬란드 화산폭발로 인해 영국에서 2만 명 

  이상이 사망한 바 있다.

- 인간의 신체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약 8주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 마라톤 선수들이 이라고 부르는 순간이 바로 글로코겐에서 지방으로 애너지원을 전환하는

  시점이다.

-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라는 학자는 각종 자료를 검토한 결과, 현대의 기근을 식량 공급 

  부족이 아닌 사람이 식량을 구할 능력을 잃었을 때, , 극히 빈곤한 사람이 식량가격을 감당할

  수 없을 때 기아가 일어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임금하락, 실직, 식량 가격 상승, 식량 분배 불균형 등 사회 경제적 요인이 특정 

  사회 집단의 기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기도 했다.

  따라서 기근은 단지 식량난이 아니라 경제적 재난이다.

   ---> 북한의 연속된 기아 현상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12장 괴혈병에 대한 논문]

- 오늘날 일반적인 남성은 키가 177, 몸무게가 78으로 아무 활동을 하지 않아도 이런 신장과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 2,280가 필요하다.

- 1848년 독일의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신체의 모든 화학 물질을 창조하는 데는 단백질

  이 필요하며 지방과 탄수화물은 에너지를 제공한다는 이론을 제시했으나 이는 틀린 이론으로

  인간에게는 아주 소량이지만 미량 영양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

- 스코틀랜드 선박의 의사 제임스 린드는 레몬즙이 괴혈병을 예방한다는 사실을 발견.

- 비타민C 결핍은 왜 괴혈병을 일으키는가?

  체내에 압도적으로 풍부한 단백질은 콜라겐이다. 이것은 피부, , 인대, 힘줄은 물론 근유

  혈관내장의 주요 구성 성분이다. 콜라겐 구조에 산소 원자를 더해주는 비타민C는 콜라겐 

  합성에 필수적이다. 산소 원자는 콜라겐 구조를 안정화된다.

  따라서 비타민C가 없으며 산소 원자가 없어 콜라겐 구조가 취약해진다그래서 괴혈병의 

  증상은 콜라겐이 필요한 부위를 따라 나타난다.

  반면 동물은 대부분 자체적으로 비타민C를 합성할 수 있다.

- 비타민은 큰 범주에서 미량 영양소에 들어간다. 대량으로 필요한 탄수화물, 지방단백질과 

  물 외에 식단에 소량으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성분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흔하게 결핍되는 

  미량 영양소는 철분, 요오드, 비타민 A, 엽산, 아연이다.

 

[13장 비너스의 몸]

- 비만은 거의 모든 국가에서 중요한 문제로 2016년 기준 성별에 따른 차이 없이 세계 인구 

  39%가 비만이다.(나도 포함된다)

- 사람의 체격은 체중()을 키의 제곱으로 나눈 체질량지수(BMI, body mass index)로 측정할 수

  있다. 정상범위는 18.5~24.9 /이며 30이 넘으면 비만이다.

- 비만 가설 중 하나가 사람을 쉽게 살찌게 하는 돌연변이가 현대 사회에서의 생존에 불리하지 

  않아서 도태되지 않고 DNA에 전해졌다는 것으로 특히 인간을 사냥할 수 있는 동물이 사라지자

  비만은 그다지 약점이 아니었다.

- 단 음식에 대한 갈망은 과일을 먹게 했고, 그래서 인간은 비타민C를 섭취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인간은 괴혈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당을 원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다.

- 백세인들은 비타민AE의 수치가 높고, 적혈구가 활발하고, 면역 체계가 강하다.

  이들은 DNA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돌연변이를 수정하는 능력이 강한데, DNA 손상은 

  노화 과정의 핵심 특징이다.

 

[14장 우디 거스리와 베네수엘라의 금발 천사]

- DNA의 기능은 세포에 분자의 생성, 특히 중요한 단백질의 생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유전자는 

  일반적으로 특정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DNA의 영역을 말하며, 단백질은 아미노산이라는 작은

  분자가 긴 사슬모양으로 화학 결합한 것이다.

   ---> 인간 염색체 속에는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유전자가 약 2만 개 존재한다.

- 유전병은 증상을 관리하는 것 이상의 치료가 어렵다. 환자와 그 후손이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구적 치료는 DNA를 바꿔야 가능하다.

- 유전자에 나타나는 돌연변이는 대부분 생성된 단백질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

  하는데, 부모 각각에게서 받은 유전자 사본 두 개 모두 결함이 있는 불행한 경우에만 증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열성 유전자의 영향은 열성 유전자 사본이 두 개 있을 때만 발현된다.

- ‘헌팅턴병은 헌팅턴 단백질을 암호화하는 헌팅턴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하는데

  이 질병은 신체를 통제하는 뇌의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전형적인 우성 유전병으로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온 영국 청교도를 통해 매사추세츠로 유입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15장 왕의 딸들]

- ‘푸마라제 결핍증은 세포에서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데 필수적인 효소인 푸마라제가 부족해 

  발생되는 유전병으로 심한 간질성 발작, 걸을 수도 똑바로 앉을 수도 없고 심한 언어 장애와 

  발달 지연, 신체 기형이 나타난다.

- 근친결혼이 지속될 경우 몇 세대가 지나면 푸마라제 결핍증이 나타난다.

  사촌 결혼이 심한 중동 지역에서 흔한데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결혼의 70% 이상은 사촌 또는

  육촌 결혼이라 자손에게서 열성 유전병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데 결국 아랍 국가의 유전병 

  환자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 캐나다 개척 초기 남녀 성비가 맞지 않아 난제에 부딪혔을 때 프랑스 미혼 여성 500명이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로 이주하는데 이들을 왕의 딸들로 불리웠는데 현재 프랑스계 캐나다인

  500만 명 대부분의 조상 중에는 이들의 후손이 많은데 대표적 인물들은안젤리나 촐리’, ‘힐러리

  클린턴’, ‘마돈나등이다.

- 프랑스계 캐나다인에게서는 강한 창시자 효과’(한 개체군에서 낮은 빈도의 대립인자를 가진 

  몇몇 개체들이 새로운 곳으로 이주했을 때, 그 대립인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효과)가 나타나

  유전적 다양성이 낮다. 그 이유는 소수의 왕의 딸들로부터 현재의 많은 인구가 비롯됐기 때문

  참고로 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의 유전자 데이터를 살펴보면,

  5천 만 명은 1천 명도 되지 않는 창시자의 후손으로 미국 원주민의 유전적 다양성이 낮다

  유럽의 질병이 전해졌을 때 원주민들이 마구 죽어 나간 이유 중 하나는 유전적 다양성이 낮기

  때문이었다.

- 인구 병목효과는 어떤 집단의 인구 매우 적은 수로 줄어들었다가 이후 다시 늘어날 때 발생.

- 세계적으로 출생 시 자연 성비는 남자가 여자보다 3% 더 많다. 또한 여성보다 남성에게 훨씬 

  흔한 유전병은 X염색체에 있는 유전자의 결함으로 발생한다.

-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보인자로 유명한데 그녀의 조상에게서는 혈우병이 나타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된 것으로 보인다.

- 아버지의 나이가 많으면 정세포에 오류가 누적되는 시간이 길어 정자에 후천성 돌연변이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

 

[16장 아우구스테의 D의 뇌]

- 헌팅턴병이나 파킨슨병과 마찬가지로, 알츠하이머병은 단백질이 응집되는 질병이다.

  원래는 정상 작동하던 단백질이 뭉치면서 독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 노년기 치매에 가장 중요한 SNP(단일염기변이)19번 염색체의 APOE라는 유전자에서 발생

  하며, ε4라는 변이가 특히 문제가 된다.

- 노년기 알츠하이머병은 다양한 유전자의 변이에 영향을 받는 다인성 유전병이다.

- 질병은 대부분 복잡한 다인성 패턴을 보인다. 한 가지 변이가 절대적으로 발병 여부를 결정하기

  보다 여러 유전자의 변이가 발병 위험성을 바꾼다.

- 거의 모든 질병은 다인성 유전이며, 특정 질병의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염기서열변이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미리 위험성을 알면 조기에 검진 받을 수 있다.

- 아이슬란든 인구 1% 정도에서 발견되는 A673T라는 희귀 SNP가 일반 염기서열과 비교했을 때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확률을 5분의 1로 낮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DNA편집기술은 아직 안정적이지 않다. 중년의 심장마비 확률을 낮췄다가 다른 시기다른 

  신체 부위에 온갖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초래할 수 있다.

  한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원인인 소위 단일 유전자 질병은 총 3천 가지 정도 알려져 있다.

 

 

[17장 출생 전 사망]

- 서구에서 몽골증100년간 다운증후군의 대체어로 쓰였다.

- 인간에게는 44개의 상염색채와 2개의 성염색체(XX 또는 XY) CHD 46개의 염색체가 있어야 

  하며 다운 증후군환자의 80%35세 미만의 여성에게서 태어난다.

- 태아의 성별은 Y염색체 보유 여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환 발달을 촉발하는 SRY 등 배아를 

  남성으로 발달시키는 Y염색체상 유전 보유 여부에 달려 있다.

- 5번 염색체 이상은 묘성 증후군’, 13번 염색체 이상은 파타우 증후군’, 21번 염색체 이상은 

  ‘다운 증후군을 유발한다.

 

[18장 살인하지 말지어다]

- 인간이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크고 사나운 동물을 제압하고 사냥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협동으로, 협동 행위는 수천 수대 동안 이어져왔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정의와 공정의 

  감각이 생겼다.

- 수렵-채취 생활양식의 특이점은 타살이 많다는 것이다.

- ‘문자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로 가장 오래된 문자는 중동에서 발견됐다.

  처음에는 회계 담당자가 무역을 쉽게 하려고, 나중에는 비문, 종교서적, 운문, 산문, 왕의 공적 

  기록에도 쓰이게 됐는데, 최초의 법률이 명문화 됐는데 기원전 2,100년 수메르 왕 우르남무

  이름을 딴 법전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보다 종합적인 법률은 이라크에서 발견된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의 법전이다

   ---> 함무라비 법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사람들은 역사 시대 대부분을 국가가 없는 사회에서 살았다. 지구의 전 지역에 국가가 세워진

  것은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거의 다 지배하게 된 1600년 이후다.

- 국가는 폭력의 적법한 사용을 독점한다.

  ‘베버는 국가는 특정영역에서 사람에 대한 물리적 힘을 행사하고 승인할 독점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조직이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국가가 죄와 벌을 판단하므로 복수는 금지됐다. 국가가 폭력의 사용을 결정할 권리를 

  독점하는 제도의 단점은 자유의 상실이다.

- 16~40세의 젊은 층에서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합친 것보다 나 한사람이 나에게 더 위험하다.

  자살은 사회적 인식이 나쁘고 심지어 불법인 곳도 있어 많은 경우 사고사로 기록된다.

 

[19장 알코올과 중독]

- 인간이 언제부터 알코올 음료를 마시기 시작했는지, 무엇으로 만들었지는 모른다.

- 러시아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건은 1천 년 전쯤 폴란드 또는 러시아에서 시작된 

  보드카의 발명이다.(보드카라는 단어는 러시아어의 ‘voda,에서 왔다)

  일반 술보다 더 강력한 술을 만드는 방법은 증류주를 만드는 것인데 보드카가 증류주다.

  15세기 러시아 수도원에서는 곡물로 보드카를 만들기 시작했다.

- 러시아에서 보드카가 국민주로 각광을 받은 이유는 황제의 수입원이라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

  졌기 때문으로 17세기에는 보드카는 러시아의 국민 음료로 확고한 자리를 잡는다.

   ---> 러시아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많은 이유는 황제와 왕실이 귀족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고의로 국민의 알코올 의존도를 높인 이유도 있다.

         1863년 알렉산드르 2세가 정부의 보드카 생산 독점권을 폐지하면서 보드카 확산의 배경.

- 레닌은 정신을 똑바로 차린 노동자만이 단결할 수 있다는 명목 하에 보드카를 금지하려 했으나

  패한다.

- 러시아에서 심각한 사회적 소요가 일어나지 않고 빠른 속도로 러시아 국유 재산이 재분배되고

  국가 기업이 사기업으로 전환된 것은 어쩌면 대중의 아편인 보드카 때문인지 모른다

                                                                                                       (메드베데프)

- 혈액뇌관문은 가장 중요한 기관이 뇌에 독성 분가가 들어가지 않도록 지키는 세포의 벽이다

  그러나 에탄올은 이 관문을 쉽게 지나쳐서 알려진 대로 정신과 행동을 변화를 일으킨다.

- 뇌가 즐거움을 주는 대상에 적응해서 이것을 갈망하게 되고 중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의 핵심은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다.

  ‘해마편도체는 만족과 쾌감의 기억을 저장한다. 중독성 물질 또는 행동에 반복 노출되면 

  계획과 임무실행을 담당하는 전두엽피질이 자극되어 중독성 행동의 쾌감을 갈망하고 추구한다.

 

[20장 고약한 검은 연기]

-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따른 폐해

  1) 신대륙 : 원주민의 90%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 질병에 대한 심각한 노출

  2) 유럽 : 매독의 창궐, 타바코스라는 식물의 잎

- 콜럼버스 항해 이후 프랑스, 스페인, 포루투칼에 비해 늦게 신대륙에 진출한 영국은 신대륙

  (아메리카)을 오가는 배를 약탈하는 해적질에 심취함.

   ---> 신대륙에 영구 정착지 조성을 통해 자국 내 빈곤층 송출 계획

   ---> 북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하면서 이익창출 기지로 활용하려는 민간 투자자들이 나타남

          (1607144명으로 구성된 투자자가 제임스 타운식민지 건설)

-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받은 식민지 개척자들은 투자자들에게 돈을 벌어주기 위해 황금이 아닌

  다른 품목을 찾는 과정에서 영국에 수출할 수 있는 유일한 작물인 담배를 발견

   ---> 담배 농사는 영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 담배로 인해 버지니아는 노예제를 찬성하는 주가 되었고, 노스캘로라이나, 켄터키 및 

         조지아는 담배 생산의 중심지가 된다.

   ---> 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통해 담배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

- 미국 최고의 대한 듀크 대학제임스 뷰캐넌 듀크라는 담배 사업자의 기부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 세계적인 대학이 되었다.

- DNA에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물질은 모두 을 유발하기 쉽다. 담배는 매우 뛰어난 돌연변이

  유발 물질로 종양 형성 유전자와 종양 억제 유전자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돌연변이

  유발 화학 물질을 폐로 바로 전달한다. ‘벤조피렌이 그 중 하나다.

 


[21장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

- 자동차는 주요 사망 원인이다.

- 최초의 판매용 차량과 엔진 제조사는 프랑스와 독일이지만 자동차 운전이 본격화된 곳은 미국

- 1965년 자동차 안전장치에 대한 변호사 랄프 네이더의 노력으로 많은 개선과 향상을 통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는 인간적인 사회라면 사고 처리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사고를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 인물이다.

   ---> ‘네이더의 영향으로 새로 만들어진 법률과 그가 만든 책으로 출간된 이후 50년간

          350만명의 사망을 예방할 수 있었다.

- 초기 자동차 소유자는 운전 면허가 없었고 자동차 영업사원으로부터 운전법을 배웠다.

- 음주 운전이 사회문제화 된 것은 차량 운행 초기부터 존재했다.

 

 

나는 위에 언급된 여러 종류의 죽음에 이르는 길 외에 한 가지를 추가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분노가 아닌가 생각한다그런 생각 속에서 우연히 작품을 정리하다 마주한 어느 

종교서적을 보니 이런 글이 있어 올립니다.

특히, 아사리판인 우리 정치현장을 보면서 이래 내용을 잘 삭혀봅시다.

 

사람이 화를 내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해 맥박이 빨라지고 혈압이 상승하며, 경련성 질환및 소화기 장애까지 유발된다. 심하면 피가 응고돼 졸도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더욱이 분노를 품고 잠자리에 들면 혈관이 축소되어 혈액순환 장애를 일으킨다.

또 불면증뿐만 아니라 소위 가슴앓이나 화병이라고 하는 신경성 질환이 분노할 때 찾아온다는

것이다. 분노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 건강까지도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라는 것을 기억하자. 나아가 인간관계도 파괴시키는 장애물이 된다.

가인은 분노를 절제하지 못해 동생을 죽이고 누군가 나를 죽일 것만 같다고 스스로 불안에 

떨었다. 분노는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성을 파괴시킨다.

분노를 절제하지 못해 인격에 큰 상처를 입을 때가 많다. 분노는 문제 해결의 답이 아니다.

인생의 황폐화를 가져오고 장애물을 만드는 요소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분노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특히, ‘영끌코인그리고 작전주에 희생 당하시고’, ‘전세 보증금 사기로 힘드신 분들은

절대적으로 힘내시기 바랍니다.

관련 법을 만드셨던 분들이 위와 같은 문제가 나오리라 생각하셨겠습니까?

그런 법을 이용해 편취한 이익이 지대한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참을 자를 생각하시며 그냥

분노를 조절하시기 바랍니다. 또 압니까? 그렇게 인내하다보면 단군 이래 최대의 치적사업을

달성하셔서 크게 이익 내신 분들이 이렇게 저렇게 손해 본 분들을 위해 일정부분 손해를

만회시켜 줄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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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스승 장량 더봄 평전 시리즈 2
위리 지음, 김영문 옮김 / 더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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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소개된 중국의 영웅호걸과 그 영웅들 주변에서 활동한 참모장수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마치 우리 역사 속 인물인양 부담감 없이 후세인들이 많이 알고 

있고, 현실 세계에서 좋은 면이던 나쁜 면이던 그들이 역사 속에서 했다는 말과 행동이

작금의 시기에 시의 적절하게 사용되고, 회자되고 있지만 자세히 역사를 들추어보면 

또 그리 많이 알지도 못하는 게 사실이 아닌가 생각하는 데, 본 작품의 주인공 장량’ 

역시 삼국지의 인물이나 일반적인 여느 중국의 역사적 인물만큼 중요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마치 이는 우리 세대라면 잘 아는 차범근선수가 ‘1976년 박스컵이라는 국제 축구경기

에서 말레이시아와의 시합에서 5분간 3골을 극적으로 성공시켜 4-4로 비겼을 때 당시

그를 지도한 축구팀 감독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과 동일한 사항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감독을 생각하고 기억하자는 뜻이 아니라 역사의 명장면 뒤에는 그 행위를 한 주역

만큼 주인공이 그런 행동을 하게 한 조력자들 역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한마디로 그는 중국 대륙의 패권을 (, 항우)’(, 유방)’이 다툴 때 유방의 

책사로 이름을 널리 떨친 인물로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운, ‘사면초가사자 성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작품을 접하다보면 그의 출중한 전략과 리더를 보필하는 내용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

된 내용이라는 역사적 사실에는 동의하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너무 미화된 측면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여러 곳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작품이 언급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관련 작품을 구매해 읽는 것이 독서인들의 자세

이기에 여기에 세세히 옮기는 것은 자제하고 주인공이 이룬 참모로서의 빛나는 전략만

정리해 본다면

1. 계책을 세워 진나라의 요충지인 요관을 함락시킨 전략

  * 요관 : 진나라 도성 함양의 남쪽 관문이자 함양을 지키는 최후의 요새

2. 진나라의 엄혹한 법률에 대응하는 약법삼정을 시행토록한 전략

  * 살인자는 처형, 타인 상해죄는 응분의 처벌, 타인 물건 훔친 자도 동일한 처벌

3. 함곡관을 점령한 후 내부자 조무상에 의한 밀고에서 벗어나게 하는 전략 수립

  * 조무상 : 항우에게 처음으로 유방을 밀고한 자

4. 절체절명의 연회(홍문연)에서 유방을 안전하게 벗어나게 하는 전략

5. 스스로 척박한 파촉땅을 분봉 받아 후일을 도모하게 하는 전략

  * 파촉 : ‘()’는 지금의 충칭, ‘()’은 지금의 쓰촨성이다

  * 분봉 : 장수들의 마음을 군주에게 매어둘 수 있는 중요한 시책

6. 3대 기재(奇才)영포팽월그리고 한신을 사로잡은 전략

7. ‘형양오창을 지키기 위해 참모 역이기가 제안한 전략을 뒤집는 이론

  * 형양 : 중원의 요충지로 군량의 집산지인 오창의 지근거리

8. 한신을 붙들기 위한 제나라 왕으로 책봉하라는 장량의 권고

9. 광무산(형양과 성고사이의 요충지)에서의 항우를 상대로 한 게릴라 전투

  * 초나라의 역량이 광무산 전투를 기점으로 급속하게 쇠락한다

10. 유방의 부친과 부인을 겁박한 항우에 맞서는 지혜 제공

11. ‘진평의 반간계 책략을 통한 범증항우의 결별 작전

  * 범증 : 항우의 책사로 아보(亞父, 아버지와 버금간다)로 불리웠다

12. 달변가 후공(候公)’을 활용한 휴전 협정(홍구강화) 체결과 파기

  * 홍구강화 : 홍구를 경계로 서쪽은 한나라가 동쪽은 초나라가 차지한다는 조약

13. 흔들리는 한신팽월의 마음을 사로잡는 분봉 전략 제공

14. ‘해하전투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를 이끌어 낸 전략과 패왕별희를 만들어 낸 전략

15. 한신의 병권을 회수한 전략

16. 장안으로 수도를 정하는 결정

17. 분봉할 당시 옹치’, ‘계포정공을 처리한 술책

  * 옹치(원수덩어리), 계포/정공(같은 일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한 장수들)

18. 태자 옹립시 상산사호를 활용하는 계책

  * 장량이 남긴 가장 뛰어난 책략 중 하나가 상산사호


위의 내용은 작품 속에서 열거된 장량이 기획했거나 주도했던 전략과 전술 내용인데,

이를 단순한 재미로만 읽고 넘겨서는 안 되며 그 속에 감추어져 있거나 그 사건이 내포

하고 있는 교훈을 파악해 오늘을 사는 사람들 특히 어느 집단의 참모라는 사람들은 

그런 전략이 갖고 있는 의미와 전개 방식을 한번쯤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특히, 유방이 권력을 평정하고 속세로 돌아가는 과정에서의 장량이 보여준 자세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은 뒤 지도자 주위에서 호가호위하며 말년의 노욕으로 깨끗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추잡한 정치인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할 것이다.

 

역사적 족적을 남긴 인물들은 그냥 만들어지거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작품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신화적인 요소가 가득하지만 황석노인과의 만남

필두로 언급되고 있는 장량이라는 인물을 있게 만든 창해군(전국시대 4군자인 제나라

맹상군, 조나라 평원군, 초나라 춘신군, 위나라 신릉군과 견줄 수 있는)과의 만남, 항백

(항우의 친척)과의 만남, 소하(재물담당관)/조참(옥리)/번쾌(개백정)와의 만남, 3奇才

(영포/팽월/한신)과의 운명적인 만남 등은 인물이란 타고난 천복도 있어야 하겠지만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또 환경적으로도 진()의 폭정과 전횡, 참모(조고, 이사)의 야욕, 부하들의 실수를 감쌀

줄 모르는 엄격한 법률 등은 또 다른 영웅 탄생의 감초 역할을 했다 할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역량과 재능을 알아봐 준 리더의 자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량이라는 책사가 자신의 웅지를 펼 수 있도록 그 자리를 마련해 준 유방역시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재능만 있으면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직급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만났다는 것은 그가 중원을 평장하게 만든 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압권은 유방이 중원을 평정한 후 수도를 정할 때 하급 관리인 누경과의 만남이었는

데, 유방이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 작품을 통해 많은 사례를 보아 왔지만 그에 대한 

실제적인 인물됨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한 사례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족처럼 한 가지를 덧붙여 본다면

한 고조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작품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유방이 자신은 팽월, 한신, 영포와 같은 인재를 관리할 수 있었던 반면, 항우는 책사인 범증 한 사람의 말도 듣지 않아 패했다

고 이야기하였다는 대목에서 진정한 리더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있다 할 

것이다

- 작품의 해설에서는 그들의 승패 요인을 참을성에 두고 있는데 나의 견해로는 작품을

  통해 그들의 참을성에 관한 이야기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

오늘을 살고 있는 리더와 참모들은 본 작품을 읽고 또 읽어서 자신들의 위치와 직분

에서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인가를 많이 느꼈으면 했고 주제넘게 오늘의 우리 

정치 분야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그런 시간이었다.


작품 200쪽을 읽어보면 유방이 휘하의 장수들에게 분봉해 주기 위해 조언을 

구하던 중 역이기가 유방에게 들려 준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나라 탕왕은 하()나라 걸왕을 토벌한 이후 걸왕의 후손을 참살하지 않고 

 기()나라에 제후왕으로 봉했습니다. ()나라 무왕도 상나라 주왕을 토벌한 이후

 주왕의 후손을 참살하지 않고 송()나라에 제후왕으로 봉했습니다. 그리하여 걸왕과

 주왕의 후손 및 그 나라 왕공대신들은 여전히 부귀영화를 누리면 반란을 일으킬 

 마음을 먹지 않고 있습니다그러나 진시황은 어땠습니까?

 도덕을 상실했고 도의를 폐기했으며, 제후들의 종묘사직을 침탈했을 뿐 아니라 육국을

 멸망시켜 그 후손들은 발 디딜 땅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했기 때문에 진시황이 

 죽자 육국 후손들이 분분히 봉기하여 진나라에 항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몇 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진나라의 화려한 궁궐에는 잿더미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교훈입니다

오늘도 친일몰이적폐청산의 깃발을 들고 난리치는 인간군상들은 입 다물고 위의

문구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전월세 사기 문제의 시발점이 어디부터였는지를 느꼈으면

한다.

특히, 젊은 날 한 때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을 갖고 혼자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뛴 것처럼

난리치다 노욕에 물든 정치인이 되어버려 뒷주머니를 차다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뻔뻔

하고도 반성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모습을 보이는 인간 말종들은 반성을 해도 엄청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는 가운데 갑자기 우리 영화 공공의 적마지막 부분에 뇌물죄로 구속

되어 끌려가며 호송차에 타기 직전 어느 정치인이 혼자말로 되 뇌이는 부분은 바로 

우리의 정치인들 현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게 다가왔다.

촌구석에 새로 개업한다는 책방에만 가면 뭐하나 책은 안 사고, 사도 안 읽으면서 쓸데

없이 폼잡고 사진만 찍고 올 것을.........

 

 

[작품에서 얻는 잡지식]

- ‘자는 꽃의 씨방을 상형한 글자다. 씨방은 성국하면 반드시 크게 팽창한다

  이 때문에 옛사람들은 이 글자로 크다는 뜻을 표시했다.

- 장량이 진시황을 시해하려다 실패 후 숨어든 곳이 하비(下邳, 장쑤성 피저우시)인데

  (클 비)’라는 글자 속에는 비상하는 새라는 뜻과 크다라는 두 가지 뜻이 모두 포함

  되어 있다고 한다. 진나라 말기 봉기한 영웅호걸들 대부분이 하비 인근에서 탄생

  하거나 생활했다고 한다.(유방, 한신, 항우, 진승, 오광 등),

- 두 눈에 각각 눈동자가 두 개인 사람을 중동(重瞳)’이라고 하는데, 흔히 비범한 인물을

  나타낸다. 중국 역사 기록에 의하면 순()임금, ()문공, 항우(項羽)등이 '중동'

  이었다고 한다.

- 진나라의 마지막 황제 자영은 단 46일만 재위했다.

- ‘유방은 본래 무명 인사였다. 그의 본명은 유계(劉季)인데 ,()자는 형제 중 

  막내라는 의미로, 나중에 그가 개국 황제가 되어 고조(高祖)로 존칭되었지만 사마천

  조차도 고조의 본명이 무엇인지 몰랐다고 하며 유방이란 성명은 황제가 된 후에 

  새로 붙인 호칭이다.

- 항우는 스스로 각 지역 장수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군사력에 기대 스스로 서초패왕

  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 ‘패왕별희란 패왕이 우희(虞姬, 항우의 총애를 받던 여인)와 이별한다는 뜻.

- 당시 군대를 거느리고 전투에 나선 대장에게 인수와 병부는 권력의 상징으로 병부

  군사를 움직이고 장수를 파견하기 위한 위임장과 같았다. 황금으로 호랑이를 조각한

  모양이기에 호부(虎符)라고 불렀다. 호부의 등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중앙을 

  반으로 갈라서, 절반은 군대를 인솔하는 장수가 보관하고

  다른 절반은 정책결정권자가 보관한다.

  군사를 움직이고 장수를 파견할 때는 반쪽을 각각 하나로 합쳐서 모양이 딱 들어

  맞아야 한다

  만약 양쪽 모양을 합쳐서 모양이 들어맞으면 군사 동원에 효력이 발생하는 데

  이것을 부합(符合)이라고 한다.

- 봉니(封泥)란 인장이 찍힌 흙덩이로 주고 죽간 서찰을 밀봉할 때 사용하여 다른 

  사람이 몰래 뜯어보는 것을 방지했다.

 

 

[작품에 잘못 표기된 문구들]

1. 116쪽 세 번째 줄 장량 ---> 유방으로 바뀌어야 한다.

2. 340쪽 아래서 두 번째 줄

   ‘유방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유방의 말을 거절했다

            --->‘유방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장량의 말을 거절했다’‘

3. 341쪽의 위에서 세 번째 줄

   장량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장량을 설득...........’

            ---> 장량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유방을 설득........

 

편집자님! 책 좀 신경써서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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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 -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이인규 지음 / 조갑제닷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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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나는 이런 류의 작품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저자가 주장하는 사건의 현장이나 조사에 임하지 않았기에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 전체가 확실히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저자의 주장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포함

되어야 할 상대의 입장이 전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밖에 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말을 하면 저자로부터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할 우려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저자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나는 개인적으로 감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신혼 초 요리에 자신이 없던 집사람이 시도때도

없이 매끼니마다 감자채 볶음을 많이 해 줘서 그런지 감자라면 신물이 난다.

그럼 감자와 저자가 무슨 상관 관계가 있냐고 묻는데, 저자가 현직에 있을 당시 매스콤에 저자가

비춰지면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저자를 삶은 감자로 불렀다.

왜냐하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인데 어떤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저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통통한 얼굴이 감자를 닮았다는 나의 의견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크게

 동감할 것이라 확신한다)


서설은 폐하고, 진짜 추천하지 않은 이유로는 이런 부류의 작품들은 저자들이 재직 시

지득한 정보를 활용해 자신을 미화, 영웅화한다는 점이 마음에 안 들어서이고 어떤 작품이든

결과론적으로 나는 잘했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나는 그런 측면에서 위인전도 좋아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영웅 이야기가 대다수라 -

위와 같은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뜻 해당 작품을 고른 이유는

이런 저런 우리 정치사에 숨겨져 있을 이야기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크게 두 가지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이 이뤄지고 있는데 하나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대기업들의 돈지랄과 고인이 되신 대통령에 대한 수사 과정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저자의 주장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 저자가 수사를 담당했기에

전체적으로 저자의 주장이 맞는다는 전제하에 - 사안별 진위 여부는 읽는 사람과 이와 연관된 

사람만이 정확히 알 뿐, 저자의 내용을 읽고 옳으니, 그르니 비분강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특히 현재의 야당에서 그런 것 같은데...저자의 주장이 틀리면 이를 반박하는 저자의 유사한 

작품을 만들어 내면 그만인 것이다.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지 않는가, 반면에 이를 접하는 독자들은 작품에서 읽고 느낀

사항을 기반으로 자신의 뜻을 투표로 답을 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작품을 읽는 내내 짜증이 증가되었는데 그 이유는

현실에서는 어떤 연유가 있어 그러하겠지만 검찰 수사가 재벌들에게 너무 관대하게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선거 자금과 관련된 대기업 수사와 관련된 내용을 읽다보면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런 거 저런 거 다 조사하겠다

는 엄포를 놓았다는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문제가 있으면 전부 조사를 해서 명명백백

가려야지 검찰 조사에 협조 했다는 이유만으로 조사를 느슨하게 혹은 혐의점을 빼고 하겠다는 

표현이 자주 나타나고 있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자도 이야기했지만 검찰은 법에 입각해 정확히 수사를 하면 되는 것이고 판단은 판사가 하는 것이지 검사가 판사의 역할까지 하면서 돈 있고, 힘 있는 대기업이라고 해서 작은 허물이라고 

판단하여 덮고 가려는 듯한 인상을 주는 대목은 그리 좋은 내용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후반부에 자신의 고향에서 책방을 내신다는 문 모씨에 대한 이야기가 한가득 나오는데....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었던 것으로 보이는데....꿈 깨시고 기대할 것을 기대했으면 한다.

 

작품을 총정리하는 의미로 여겨지는 문구(479)가 눈에 들어와 여기에 옮긴다.


지금의 시기는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위기에 처했다. 극단적 지지 세력에 휘둘린 정치인들과 본분을

 잊고 법과 절차, 상식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평범한 소시민이라 할지라도  

진실과 탈진실이 투쟁하고 지성과 반 지성이 충돌하고 있다. 밝고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거짓에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는 자세로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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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끝자락에 서서
양장 지음, 윤지영 옮김 / 슈몽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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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작품을 읽는 초기에는 앞 쪽에 읽었던 원청이라는 작품과도 같은 실망감 속에 

외국 소설이 다 그렇지’ 

하면서 일종의 작품에 대한 폄하 아닌 폄하를 하였는데, 작품을 넘기면 넘길수록 다가 오는 

느낌은 이제껏 여러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삶의 속살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내가 

믿고 따르는 종교적 관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을 갖게 하는 나름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개신교 신자인 본인의 눈에 들어온 한 가지 표현법 중 아쉬운 점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시종 일관 하느님으로 표기한 부분이었는데 열혈신도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그 차이를 찾아 보았다. 


[야후 국어사전]


+ 하느님

1. 종교적인 숭배 대상, 또는 신앙의 대상.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지니어 인류에게 화나

  복을 내린다고 믿음. 상제(上帝). 상천(上天). 천공(天公). 천제(天帝). 하늘

2. 가톨릭에서 신봉하는 유일신. 성부(聖父).


+ 하나님

개신교에서, ‘하느님을 이르는 말.


이라고 한다. 받아들이기 나름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이런 작품을 읽고 어떤 느낌이나 작품으로부터 받은 소회를 기록하라고 하면 작품 

분량만큼의 내용 - 아니 어쩌면 더 많을수도 있다 - 이 나올 수 있기에 작품에서 언급된 내용 중

그럭저럭 내 가슴에 와 닿은 문구 몇 개를 올려 보았다.

 

-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데 죽음이 무엇인지 알겠느냐?(공자)

- 호인으로 태어나서 악인이 될 재주가 없다면 그냥 손해 보면서 살자, 하면서 사는 거다.

- 사람이 괴롭고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늘을 향해 

  기도하거나 하소연하며 묻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던가?

   내 물음에 답해 주던가? 하나님이 내 기도와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가?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감람산에서 이 고난을 면해 달라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예수의 기도를 들어주었던가?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가 

  자신의 신앙을 버렸던가?

   (나는 작품은 '하느님'으로 표기하였지만 개신교인이기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으로 변경해 적었다)

- ‘도깨비 담장에 부딪혔다고 당황해서 이리저리 길을 찾아서 헤매면 안 됩니다.

   그놈은 자기를 무서워하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앞에서는 어쩔수 없으니 물러난다

- 신념은 마음 속에 존재하는 맹목적이다

  신념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저 깨닫는 것일 수밖에 없다.

- 대자연의 법칙이라고 하는 신념은 지식의 축적에서 시작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닫는 것.

-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진 대자연의 법칙이 결코 우연히 만들어질 수 없음을 믿는다.

  그렇다면 법칙을 만들고 지배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 물질의 돌발적인 움직임에서 일정한 법칙이 생겨났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을 수긍하기에는 과학의 법칙들이 얼마나 세밀하고 확실하며, 얼마나 조금의 

  빈틈도 없고, 얼마나 보편적으로 일치하는가!

   만약 물질이 스스로 이렇게도 세밀하고 정교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면 물질이 아니라 영성을

  가지고 있는 정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각각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일 수는 없다.

  대자연에는 일치하는 하나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수는 없다. 대자연에는 틀림없이 신명을

 가진 주재자가 있으며 물질은 그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야만 대자연의 신명에 대한 믿음이 축적된 지식으로부터 생겨난 신념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 신념이 합리적인 반증을 거쳐, 번복할 수 없이 옳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믿음이 된다.

  나는 대자연이 신명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혹은 신명이 대자연을 만들었다는 믿음이 충분히 

  이성적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을 미신이라 할 수 있겠는가?

  대자연이 가지고 있는 신명, 혹은 신명이 만들어낸 대자연에 대한 호칭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바로 하늘이다.

  보통 하느님혹은 하나님이라고도 부르고 좀 더 고상하게 조물주’, ‘천제‘, ’상제라고도

  부른다. 부르는 방식은 달라도 그것들이 가리키는 실체는 같다.

- 하늘이 내린 본성을 성()이라 하고,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

- 세상이 귀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없다라는 것은 증명하고자

  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 옛말이나 속담은 인류 수천 년 지혜의 결정체이다(세르반테스)

  자고로 허투루 만들어진 속담은 없다.(한비자)

- 인간은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양능(良能)이라고 한다. 또한 인간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것을 양지(良知)라고 한다.

- 인간의 본성 중에서도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양심이다.

  공자는 양심에 대해 꼭 붙들면 보존할 수 있으나 놓으면 없어지는 것이라 했다.

- ‘영혼은 육체에 붙어 하나를 이루며 육체와 함께 느끼고, 욕망하고, 즐기고제멋대로 행동한다.

-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롭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자신도 모르게 너그러워진다.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은 근심하라(공자)

- ‘운명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많은 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일이 정말 내 운명에 이미 정해져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내 성격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볼만하다.

-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인간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의심하게 된다.

-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은 스스로 완전해지고 지극한 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

- 인간의 고귀함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

- 쇠가 불에 의해 달궈지고 단단해지듯, 인간도 걱정과 근심을 하면서 지혜로워지고 고통을

  겪은 후 미덕이 생겨난다.

  끊임없이 시달려야 좋은 사람이 된다

  ‘사람은 세상 속에서 갈고 딱으며, 칼은 숫돌 위에서 갈고 닦는다

  ‘백 번 다듬어야 모양을 갖추고, 천 번 다듬어야 쓸모가 있다

  ‘가장 힘든 고통을 겪지 않으면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기 힘들다

  모든 같은 의미를 가진 문구들이다.

- 나를 이해하려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인식해야 하는데 이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

- 인간의 몸은 쇠망치로 두들기거나 불로 달굴 수 없다 하지만 영성의 양심은 단련하면 할수록 

  더욱 강해진다.

- ‘수신(修身)’,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근본이다.

  세상의 만물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위해서 생겨났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인간은

  선과 악이 뒤섞여 있으므로 단련을 통해 순수해져야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 ‘’

  이 괴로운 세상은 쇳덩이를 담금질하는 공장, 운동선수를 단련하는 운동장,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실처럼 인간을 단련시키는 장소이다이것이 바로 인생이 고달픈 이유이다.

- 쌓은 공덕만큼 인생은 가치가 있다.

  그리고 공덕은 육체에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쌓는 것이니 영혼이 불멸하는 것을

  믿어야만 영혼에 쌓은 공덕이 가치를 가진다영혼의 불멸을 믿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신앙이다그래서 신앙이 있어야 인생이 비로소 가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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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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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밀레니엄 시대를 평가하면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칭기스 칸과 그의 

후손들이 이룬 업적과 그들이 끼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는 작품을 통해 특정 민족 혹은 뛰어난 특정인 한 사람의 발자취에 대해 또 그 인물이

남겨놓은 역사적 자취에 대한 평가(?)를 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민족)가 남긴 업적의 

이면에 실린 이야기를 파악하면서 내 삶의 귀감으로 삼을만한 그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

하며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작품을 읽고, 나름 정리를 한다고는 하였지만 수준 낮게 정리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고 전체적인 역사적 관점이 저급하거나 부족하여 여러 적절치 못한 표현과 분석과 

오판으로 인해 나의 이런 글을 접하는 여타의 일반인들이 수준 낮은 분석이라는 질타와

함께 이 모든 것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의 평가라고 폄훼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런

대로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정리한 내용이 의미 있는 행위라 생각하여 정리해 

보았다.


작품을 읽으며 내게 들었던 최우선의 생각은 시대를 달리한 인물이지만 칭기스 칸

‘붉세출의 간웅'으로 불리워지는 조조라는 인물이 닮아도 너무도 닮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지난 2014판세를 읽는 승부사....조조’(위즈덤 하우스)를 읽고 독후감에 

언급한 내용을 다시 한 번 제시함으로써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려

주고 싶다.

해당 작품을 읽고 나는 조조라는 리더에 대해 이렇게 정리를 해 보았던 적이 있다.


첫째, 위기 때마다 조조를 도운 적절한 조력자인맥과 인재가 있었다.

조조는 선친이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환관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도와주려는 

인맥들이 많았다.

오피니언 리더인 교현(橋玄)’, ‘허소와 위기 시마다 그를 도와 준 사마방’(사마의의 

부친)과 심복 전위’ 동탁과 대립각을 세울 때 그를 도운 어린시절 친구 장막포신

장수 우금및 원소의 모사 순욱’, 암살 위기에서 그를 도운 허저’, 변수전투에서 대패

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를 도움 진홍과 조홍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의 도움이 있었고,

조조가 중앙정부를 취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4인방(동소, 종요, 동승, 양봉)은 전부

외부인이었는데 특히, ‘동소종요는 일면식도 없던 상태였다고 하는데 가장 압권은

부인 변 씨를 만난 것이었다.


 둘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포용력이 있었다

불구대천지의 원수인 장수가 투항하자 대범한 아량으로 이를 받아 들였고, 양평관에서

조조에게 강력 대항하던 장로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그의 포용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셋째, 독단적인 판단이 아닌 주변인과의 끊임없는 소통으로 집단을 이끌었다.

좋은 말은 다리에서 나타나고, 능력 있는 사람은 에서 나타나듯이 소통은 역량이고,

혀 끝은 전략 무기로 위기시마다 측근들과 의견을 나누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했넌 

반면조조보다 더 많은 힘과 능력을 지녔던 원소는 자신의 잘못을 감싸고 실패를 회피

했고 정확한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싫어했다고 한다.

, 그는 주변 사람의 의견과 건의를 잘 듣는 경청으로 의사결정의 맹점을 제거했다.


넷째 동물적인 기회 포착이 남달랐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서는 타인을 적극 활용하였으며 특히 사태 파악의 귀재

였으며 지속적인 전쟁으로 나라 전체가 힘들 때 서민의 애로사항을 정확히 파악해 

서민의 애로사항을 적극 경감시켰으며, 자신이 불리할 경우 세력 구도를 정확히 파악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다섯째, 자기 및 측근 관리에 철저했었다.

자녀나 후궁에게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요구하였으며 딸을 시집보낼 때 모두 검소한

생활을 솔선 수범하도록 하였다는 점은 높이 살만한 행동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그를 보좌하고 있던 많은 자들이 그에 대해 절검하고 청렴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조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할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의 친인척 관리에 대한 이야기 한 편을 소개해 보면 

변 황후의 동생이 집을 지어 이를 축하하기 위해 식사를 했는데, 상에는 나물과 조밥뿐

 어육은 놓이지 않았다

고 한 것으로 보아 어떤 행동을 한 인물인지 엿볼 수 있다 할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만 읽으면 칭기스 칸이 어떤 인물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품을 읽으며 칭기스 칸의 생몰 년대와 가족 관계, 권력 다툼에 대한 주제가 

아닌 그런 이면에 숨겨진 내용과 배경 그리고 역사적 영향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본격적인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그가 남긴 영토에 대해 우선 이야기해 

본다면 통치 및 정복 면적을 기준으로 본다면 칭기스 칸은 1,260, 알렉산더 대왕

564, 히틀러 335나폴레옹 186수준으로 현존하는 국가로 봤을 때 러시아

1,710, 미국 980, 중국 960호주 770, 인도 328이며 대한민국은

22(10, 12)수준이다.(‘다음출처기준)

참고로 내가 이전에 작성한 독후감에서는 칭기스칸의 정복 면적을 770라고 언급

하면서 나폴레옹(115 ), 히틀러(219), 알렉산더(515)라고 표기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점령 지역을 산출하는 기준 혹은 학자들마다 정복지를 평가하는 기준이 

상이하여 나타난 현상으로 생각하는데,

어찌되었던 인터넷 포탈 및 역사학자들마다 해석하는 방식이나 분석하는 관점이 달라

나타난 현상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면적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이유는 추후 조사해

볼 만한 사항이라 생각한다.

 

아래의 소제목은 내가 작품을 읽으며 느낀 점을 분류한 것이다.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분류이다.

 

 1. ‘몽골칭기스 칸그리고 지역적 상황에 대해

1) 몽골족은 투르크타타르와는 다른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녔고 3세기에 첫 제국을

   건설했던 훈족(’흉노족이라고도 부른다)’의 직계 후손으로, ‘은 몽골어로 인간

   지칭한다4, 5세기경 훈족은 인도에서 로마까지 정복하지만 그 힘이 유지되지 

   못하고 그들이 정복한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다.

2)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현대 지도기준)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지만

   이를 정복하거나 통치하는 군대 숫자는 100만 정도였다고 한다.

3) 침공으로 함락한 지역 주민보다 숫자가 적었던 몽골군은 점령지의 많은 사람들을 

   전략적 용도로 활용하는데 일례로 몽골군은 당시 군대의 전형적인 방식과는 달리 

   피난민 무리를 뒤에 두지 않고 앞세우고 다녔다고 한다.

4) 몽골족에게 싸움이란 진짜 전쟁이나 지속적인 분쟁이라기보다도 생계를 위한 

   일상적인 약탈이었다.

   이는 물자가 풍부한 남쪽과 싸워 이기려면 그들에 비해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머리를

   써야 했으며 더 열심히 싸워야 했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전쟁은 일종의 생산이며

   전사에게 전쟁이란 성공과 부를 의미하였다.

5) ‘타타르주르첸(금나라)’ 왕국과 가까운 곳에 살면서 중국의 세련된 제품들을 자주

    접했기 때문에 초원의 다른 어떤 부족들보다 풍족하였는데 주르첸타타르를 

    정복한 뒤 통치영역을 확장하려 칭기스 칸에게 복종을 요구하자 교역 물자 때문에

    ‘주르첸과의 전쟁을 고려하고 있던 몽골에게 공격의 구실을 준 것이었다.

6) ‘무슬림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려는 통치자를 찾지 못하자 칭기스 칸에 의지해 

    억압적인 왕을 타도하려 하였다.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으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은 투르크족 술탄 무함마드 2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제국을 호라즘이라 불렀다.

     ---> 호라즘의 술탄은 투르크인으로 같은 무슬림이기는 하지만 아랍인과 페르시아

           인으로부터 야만적 정복자라는 인식으로 인해 어떤 동맹자도 얻을 수 없었다.

7) 몽골의 정복은 파키스탄 중심부에 있는 물탄이란 도시에서 멈추는데 이는 건조하고

   추운 산악지대를 벗어나자마자 몽골의 전사와 말들이 시름시름 앓았기 때문이며 

   생애의 마지막 원정 대상이었던 탕구트지역 최종 승리를 며칠 남겨 놓고 죽는다.

8)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 옛 러시아 무역도시들은 몽골군이 누구고 그곳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몰랐기 때문에 이 낮선 사람들에게 패한 일을 신이 내린 벌로 생각

   했고 자신들의 패배를 잊고 자신들끼리 싸우기 시작한다.

9) 몽골은 어떤 영토를 원정할 때면 먼저 공식 사절을 보내, 항복하여 몽골 가족에 

   합류하고 대칸의 봉신이 될 것을 요구한다. 상대가 동의하면 사절은 새로운 봉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할 뿐 아니라 권력과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허용

   했다.

10) 몽골군의 침공을 물리치지 못하자 유럽의 기독교 사제들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몽골군을 제압하기 위해 성자의 유골과 유물을 진열해 몽골군을 저지하려 했는데,

     이는 몽골군이 기독교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으로 그러나 몽골군은 이에 격분

     했고, 유럽을 폐허로 만들게 된다.

     1241년 부활절 기간에 거둔 승리는 유럽 봉건제중세의 완전한 붕괴의 전조

     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유럽인들은 공격자의 정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공황은 

     더 심각해졌다.

     --->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극도의 사악함때문에 죄 없는 자신들이 몽골인의 

            진노의 피해를 입었다면서 자신들이 당한 방법으로 유대인을 벌주려 했다.

11) 몽골인들은 모든 종류의 시합을 즐겼는데, 특히 씨름시합을 열듯이 종교인들이 

     참여하는 토론시합을 개최하여 논리만으로 자신들의 종교 사상에 대한 

    설득력 시험을 하고는 했다.

 

2. 신개념의 통치 질서 수립

1) ‘칭기스 칸은 훈족으로부터 내려오는 초원의 제국에 어울리는 자기 나름의 통치 

    방식을 찾고자 했다.

2) 테무진과 함께 지도층을 형성한 19명은 9부족 출신으로 무슬림’ 3명 외에 기독교

   ‘불교도도 있었다.

3) ‘칭기스 칸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한 뒤 각각의 혈통, 씨족, 부족에 내려오는

   세습적인 귀족 칭호를 없애고 테무진 자신은 구르 칸이나 타양 칸같은 예전의 

   부족 칭호를 거부하는 대신 칭기스칸이라는 호칭을 썼다. 몽골어에서 (Chin)’

   강하고, 흔들림 없고, 두려움이 없다는 의미다.

4) 또한 다른 입법자들과는 달리 신의 계시를 자신의 법의 기초로 삼지 않았고, ‘정주 

   문명의 오래된 법전으로부터 자신의 법을 끌어오지 않으면서 수 백 년 동안 유지

   되어 온 유목민 부족들의 관습과 전통을 강화한 칭기스 칸의 대법령을 제정 운영.

    ---> 통치자를 법에 복속시킨 것은 그때까지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다.

5) 몽골은 필요한 경우 캐러반에게 자본을 대주기도 했으며 칭기스 칸의 후계자

   ‘우구데이는 교역을 개선하려고 여러 나라와 동시에 사용하는 무게측량 단위

   표준화했고, 금은괴나 동전대신 지폐를 만들어 교역이 간편하고 안전해졌다.

6) 모든 사람에게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적인 자유를 부여하고 종교를 장려하기 

   위하여 종교 지도자와 그 재산에 대한 세금 면제 및 공적인 의무도 면제해 주었다.

7) 칭기스 칸은 정복지의 지식을 제국에 이용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학자들을 끌어

   오거나 잡아오는데 관심이 많았고 그가 가는 곳마다 그 지역 학자들을 불러 그들이

   무슨 기술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그의 제국에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파악

   하려고 노력했다

    ---> 제국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 을 제정하였으나 이를 수행해야 할 신민들이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문자 체계를 도입하려 했고, 무슬림의 식자층을 활용

           하려는 생각을 하였고 고려에도 종이 10만장을 요구하기도 한다.

8) 몽골은 유럽 침공의 물질적 성과에 실망해 원정에 약간이라도 이익이 있음을 보여

   주려 크림 반도에 자리 잡은 이탈리아 상인들과 거래하는데, 몽골군이 물자를 가져

   가는 대신 유럽에서 잡은 포로를 넘겨주었다. 이렇게 팔린 노예들로 구성된 노예

   부대20년 뒤 조우하게 된다.

9) 칭기스 칸은 광활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각 지역의 통치자들의 자식들을 볼모로

    잡아두지만 이는 외견상의 모습이었고, 그 자식들을 행정관으로 훈련시켜 능력이나

    충성심이 떨어지는 관리가 나타날 경우에 그를 대체할 인력집단으로 활용하였다.

 

3. 후손들에 대하여

1) 칭기스 칸은 평생 친척을 불신하고 젊은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동료나 친구들에게만

    의지했기 때문에 자식들이 사이좋게 지내도록 돕지 못했으며 그들을 자신의 후계자

    로 훈련시키지도 못했다.

2)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 어머니 소치겔후엘룬의 직계 가족현황은 아래와 

   같다.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 --- 투레게네          톨루이 --- 소르칵타니

   ↓                ↓                              ↓               ↓     ↓       ↓          ↓

  바투              ↓                             구육           뭉케 훌레구 쿠빌라이 아릭부케

   ↓                ↓                                                        ↓       ↓

킴착칸국      무굴제국                                                 일칸국  원왕조

(러시아)         (인도 )                                     (페르시아, 이라크) (중국)


칭기스 칸 사후 불과 14년 만에 그의 자식들 전부가 죽음을 맞는다

3) ‘뭉케는 진지했는데 우구데이처럼 경박하지도 구육처럼 무모하지도 않았으나

   ‘차카타이우구데이’ 후손과 가족을 완전히 뿌리 뽑으려는 듯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모두 77명 죽였다.

4) 칭기스 칸의 여인들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몽골에 절실하게 필요하던 외부의 재능을

    통치세력 내부로 끌어들였으며 수도원과 학교, 책의 인쇄, 사상과 지식의 교류를 

    지원하여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5) 몽골 제국은 뭉케 칸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그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6) 후대에는 뭉케’(테무진의 막내 동생 톨루이의 장남)‘가 제국의 자산 규모를 파악

   하는 통계조사와 종이어음 발행화폐 표준화등을 추진하였고, ‘쿠빌라이 칸'

   (톨루이의 3)지폐를 도입했고문맹을 없앨 목적으로 모든 아동에게 보편적인

   기본교육을 시킬 수 있는 초등학교를 세우려 했다.

7) ‘쿠빌라이는 쿠테타를 일으켜 자신이 대칸의 자리에 오르지만 몽골의 왕가 일부와

    그 추종자들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명령에 의해 카라코룸은 불과

    30년 동안 몽골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한 뒤 몽골인들의 손에 의해 약탈을 당하고 

    파괴되어 버린다.

     ---> 쿠빌라이는 할아버지가 야만적인 힘으로 이루지 못했던 과업, 즉 중국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하는 과업을 대중 정치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는 적어도 

            송나라 사람보다 더 중국인처럼 보임으로써 중국을 통제할 수 있었다.

8)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마지막 인물은 부하라’(현재의 우즈베키스탄)아미르의

    알림 칸이었다그는 당시 우즈베키스탄의 권좌에 있다가 1920년 소비에트 혁명의

    물결에 밀려난다.

     ---> 1220년부터 1920년까지 700년 동안 역사상 가장 긴 가족 왕조로 꼽힌다.

 

 

4. 가족 이야기

1) 칭기스 칸의 후계자인 우구데이(3)’는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말을 타고 정복을

    할 수는 있지만 말을 타고 다스릴 수는 없다고 확신해 자신의 제국을 향유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위대한 군주들처럼 영원한 수도갖기를 희망한다.

     ---> 권력 중심과 제국의 행정부를 고정시키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2) 칭기스 칸은 사위인 토쿠차르와 손주인 무투겐이 전투에서 전사했을 당시 가장 

    괴로웠을 것이다사위가 죽자 미망인인 딸에게 정복한 도시에 대해 마음대로 

    앙갚음을 하라고 허락하자 자신의 남편이 사망한 도시(나사푸르)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 대해 사형 선고를 내린다.

3) ‘케레이트나이만을 정복한 뒤 기독교를 믿는 부인을 얻었던 것으로 보아 몽골

    조정을 지배했던 세력은 기독교도였던 것 같으며 그가 가장 아끼는 손자

    ‘시레문’(솔로몬의 몽골식 이음)이 기독교도였다. 특히, ‘예수라는 말은 몽골의

    신성한 숫자인 ‘9’를 가리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4) 몽골과 유럽인들은 영적인 믿음의 많은 부분을 공유했음에도 처음에 관계를 맺을 때

    방향이 부정적으로 잘못 잡히는 바람에 공통의 종교라는 기반 자체도 무너지고 

    말았다. 몽골은 기독교 유럽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방법을 모색해보지만 기독교 

    자체를 완전히 버리고 불교와 이슬람으로 방향을 튼다.

5) ‘뭉케는 프랑스의 루이 9세에게 서한을 보내 모든 사람들이 몽골인의 관대한 통치

    밑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였다고 하였지만 그의 일차적 관심은 종교가 아니라 

    외교와 상업이었는데 그의 최대 관심사는 송나라와 중동 아랍 국가들의 정복이었다.

6) ‘뭉케는 가장 군사적 자질이 뛰어난 형제 훌레구에게 우익을 맡겨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카이로 등의 아랍국가를 공격하도록 하였고, 쿠빌라이에게 좌익을 맡겨

    송나라를 정복하게 한다.

7) 쿠빌라이는 중국의 교육받은 사람에게 그들의 민족주의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매혹적인 기회를 제공했고 1260년 몽골의 연호를 중국식으로 번역해 완전한 시작을

    뜻하는 지원(至元)으로 바꾸었으며, 1271년에는 위대한 기원의 의미를 지닌 대원

    (大元)’으로 정한다. 1277년에는 새로운 몽골 왕조를 선포한 뒤에는 조상들에게 

    중국식 이름을 추서한다.

    또한 낡은 체제를 지속시키는 대신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다양한 외국인, 특히 

    무슬림의 행정 지원을 받았으며 하나의 민족이나 인종 집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하여 서로 이간질을 시키는 경향이 있었으며, 늘 중국인과 외국인을 

    다양하게 섞어놓았다.

 

 

5. 기술의 장려를 통한 무기의 과학화

1) 사람과 과학기술을 다루는 칭기스 칸의 능력은 40년 이상에 걸친 쉼 없는 전쟁 

   경험을 통해 얻은 것으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실용적 학습, 실험적 적용, 꾸준한 

   수정을 통해 얻은 것이다.

2) 몽골은 초원 전사의 전통적인 공격력과 기동력에 과학기술이 결합되어 승리를 

   거두었다.

3)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인 장의사, 의사, 법률가, 교사

   학자들에게도 면세를 해 주었다.

4) 막내 동생 훌레구가 바그다드 공격 시 화약을 활용한 포격 공격을 실시하였는데 

   연막탄, 원시 수류탄원시형태의 박격포 및 소이탄 등을 활용하였다고 한다.

   몽골군은 불과 2년 만에 서쪽의 유럽 십자군과 동쪽의 셀주크 투루크가 200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어도 하지 못한 아랍 세계의 심장부를 점령한다.

5) 훌레구는 또 카라코룸에서 형제들과 헤어진 뒤 7년 만에 약 6천 킬로미터 거리를 

   주파하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땅을 정복하거나 재정복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아랍인,

   투르크인, 쿠르드인, 페르시아인 등 수 백 만 명을 식민화했다.

 

 

6. 뛰어난 통치력

1) 테무진의 핵심적 업적은 친족 관계를 무시하고 개인의 능력과 충성도 및 능력에 

    따라 과제를 부여하고 책임을 나누어 주었으며 충성스런 동맹자들을 최측근으로 

    기용하고 정복된 국가의 신민들을 노예가 아닌 정상적인 부족 구성원으로 받아

    들였다.

     ---> 타타르의 정복 후 예수겐과 그녀의 언니 예수이를 아내로 맞이한다.

2) 테무진이 활동한 60년 동안 장군들 중에서 그를 배반하였거나 그가 불이익을 준 

   적이 없었다

3)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전사자의 부인과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동일한 몫을 배분한

   결과테무진의 부하들 사이에서는 그가 나를 불로 보내건 물로 보내건 나는 간다

   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4) 신의를 중시한 테무진은 라이벌인 상대 수장인 자무카를 생포해 온 자무카의 부하

   장수들에게 상을 주는 대신, 그들이 잡아온 지도자 앞에서 모두 처형해 버린다.

5) 몽골군의 특징은 첫째 모두 기병이고, 둘째 병참부나 거추장스런 보급 대열이 

   없었다는 점으로 그들은 지역을 정복한 후 농지를 다시 목초지로 돌리기 위해 말을

   이용해 농토를 짓밟았다고 한다.

6) 몽골군의 여러 문화를 정복하면서 이 모든 기술을 모아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전해 주었다특히, 칭기스 칸이 세운 영원한 구조물은 다리로 역사상 어느 통치자

   보다 많은 다리를 놓았다.

7) 쿠빌라이는 강력한 법전을 중심으로 민간 행정을 짜나갔다. 법전을 만들면서 

    칭기스 칸의 법과 양립할 수 있도록 중국 법을 개혁했으며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송나라의 가혹한 형법을 완화했다.

    ---> 몽골인에게 법은 유죄를 결정하거나 처벌을 하는 수단이라기보다 문제를 해결

           하고, 단결을 이루고 평화를 보존하는 방법이었다.

8) 쿠빌라이는 전통적인 중국의 학문과 문화 가운데 몇 가지 유형을 장려하기 위해 

   학교(2166)를 세우고,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들로 이루어진 한림원을 

   재건했다또한 세계의 모든 언어를 적을 수 있는 단일한 알파벳을 만들려고 했으며

   티베트 라마승 팍파에게 이 과제를 맡겨 팍파 문자'를 만들기도 했으며 또한 

   태사원(太史院)을 세우고 인쇄소를 만들어 달력과 연감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7. 관련 기록이 없어 일방적인 평가로 몽골이 폄하되었다.

1) ‘호라즘과 경쟁관계에 있던 칼리파는 몽골에게 호라즘을 공격해 줄 것을 부탁하며

   자신들이 포로로 잡은 십자군 군인들을 선물하지만 기병 위주로 운영되던 몽골에게

   보병이 필요 없었기에 칭기스 칸은 이들을 풀어주나 풀려난 이들이 자신들의 고향

   유럽으로 돌아가 몽골 정복자들에 대한 헛소문을 유포한 것과 정복과정에서 

   심리전을 활용한 수월한 정복 전쟁을 벌이기 위해 전개하였던 터무니없는 정보

   (칭기스 칸과 몽골인)의 확산, 재생산으로 인해 몽골인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이 확산.

2) 뿐만 아이라 몽골군의 행동이 잔인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공포를 자아낸 것은

   특별히 잔혹해서가 아니라 정복이 빠르고 능률적이었으며 부자나 권력자의 목숨을

   경멸했기 때문으로 그는 주민 살육자라기 보다는 도시 파괴자라고 묘사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할 것이다.

3) 칭기스 칸과 몽골인의 경우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는 관계로 업적은 묻혀

   지고 이른바 범죄나 야만성만 일부 구전된 미확인 소문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학자들이 분석한 내용을 보면,

   헤라트에서 죽은 사람의 총수가 240만 명이라고 하기도 하고 5년간 1500만 명이라

   하는데 이런 살육을 하기 위해서는 몽골군 병사 한 명이 100명 이상을 죽여야 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몽골 병사 한 명이 350명 이상을 살육해야 하는 숫자라고 함.

    ---> 몽골군이 정복한 도시의 유적을 조사해 보면 실제 주민의 수가 희생자로 계산

           된 주민 수의 10분의 1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 살육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해당 지역은 건조한 사막 토양으로 유해가 수 백 년 또는 수 천 년씩

          보존되기 때문에 그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해당 증거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4) 몽골인은 자신과 서민의 오락을 위해 대중문화를 후원하면서도 유혈을 혐오하는 

   문화는 고수했다씨름과 궁술을 즐긴 반면 로마인들이 즐겨했던 검투사 시합이나 

   공개 학살과 비슷한 오락은 만들지 않았다. 참수나 교수형이 흔했던 유럽 도시와는

   달리 몽골 제국에서는 범죄자 처형을 공중의 오락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 중국 대중의 입장에서 취향이나 감수성 면에서는 중국 조정의 관리들보다 

          오히려 몽골인에게서 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5) 몽골 병사들이 전쟁을 하면서 투석기에 페스트 주검을 넣어서 적진으로 날려 

   보냈다는 이야기는 제노바에서 변호사로 일했던 특정인이 몇몇 선원에게서 들은 

   자신들도 들은 이야기를 퍼트린 것이라 함

6) 칭기스 칸의 고향과 무덤의 위치가 불분명한 이유는 칭기스 칸이 죽자 그의 고향을

   누구도 출입할 수 없도록 출입을 영구히 금지했기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8. 팍스 몽골리카

1) 14세기를 팍스 몽골리카또는 팍스 타타리카라고 명명하는데, 몽골의 칸들은 

   평화로운 교역과 외교를 통해 과거 무기의 힘으로 얻지 못했던 상업적, 외교적 연결

   통로를 얻으려 했다---> 상업적 영향은 몽골 제국을 몽골 회사로 바꾸었다.

2) 몽골 제국의 행정구역은 중국, 모굴리스탄, 페르시아, 러시아 등 크게 넷으로 나누

   었지만 다른 지역의 물자에 대한 요구는 줄지 않았다. 한 칸이 다른 칸에게 물자를 

   보내지 않으면 자신도 물자를 보내지 않았다. 물자의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몽골이

   전쟁할 때 쓰는 길은 점차 상업적 간선으로 바뀌어갔다.

3) 몽골은 상인을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에 놓는 중국의 문화적 편견을 정면

   으로 공격하여 상인의 지위를 모든 종교와 직업보다 높은 자리로 격상시켰다.

4) 역사상 대부분의 제국은 정복한 땅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했지만 몽골은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던 반면 농민이 자기 땅의 기후, 토양, 배수 방식에 가장 적합한

   작물을 심도록 장려는 했다.

5) 몽골인은 어떤 지역을 정복하자마자 행성과 별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측정할 관측소

   부터 세웠고 몽골 정부 직원들은 주판을 이용했다고 한고 중국에 ‘0’, 음수, 대수학을

   소개했다.

6) 몽골은 문화적 취향이 없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인 해법보다는 실용적인 해법을

    찾았다.

7)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보았는데, 몽골 제국의 사상은 유럽의 정신에 새로운 가능성을 

   일깨웠다.

   특히, 몽골 제국 전체의 공통된 원칙 - 지폐, 교회에 대한 국가의 우위, 종교의 자유,

   치외법권, 국제법 은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8) 프레스코화가들은 기독교 회화 속에 독특한 옷, 모자, 활 차림의 몽골인을 집어

   넣었다쿠빌라이 칸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사절을 보내는 데 그는 종교의

   자유가 강조되는 몽골과는 달리 단 하나의 종교만 용인된다는 사실에 놀란다.

 

9. 저무는 제국

1) 1332년 몽골제국을 휩쓴 것은 역병인 페스트’(흑사병)이었는데 이 병은 최초 중국

   남부에서 발생해 몽골 병사들이 북쪽으로 옮겨졌다고 하며 중국은 몽골이 세계

   체제에서 제조업의 중심 역할을 했는데 중국에서 물자가 쏟아져 나가며 페스트도 

   전파되었다고 한다

2) 페스트의 창궐로 외교사절은 물론 몽골 운송체계의 가동이 중단되자 가톨릭 교회와

   중국 선교단의 연락이 끊겼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외국인이 병을 가져온다고 비난

   하면서 국제교역은 위축된다.

   유럽의 기독교도들은 다시 유대인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이는 유대인이 교역이나 

   동방과 관련이 깊다는 이유에서다.

3) 페스트는 유럽뿐만이 아니라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사는 몽골인을 중국이나 몽골과

   차단시키는 부작용도 낳는데 몽골인이 자기들보다 더 많은 신민들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약해진 뒤에도 교역물자가 지속적으로 흘러다니게 해주었기

   때문인데, 군사적 힘과 상업적 이득이 사라지자 러시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중동의 몽골인은 자신의 신민과 결혼을 하고 의식적으로 그들의 언어종교, 문화에

   동화됨으로써 권력과 정통성의 새로운 양식을 찾아나갔다.

    ---> 이곳에서 몽골인들은 여타의 종교를 몰아내고 이슬람 신앙을 강화했다.

4) 중국의 몽골인들은 가능한 한 중국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노력의 일환으로

    다양한 종교를 공정하게 대접한다는 전통적 정책을 버리고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를 우대하는 특혜를 주었다하지만 티베트 불교는 중국의 유교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5)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와 탐험가들은 칭기스 칸과 몽골인에게 공개적인 찬사를 보낸

   반면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아시아에 대한 적대감을 조성하였는데 하지만

   그 중심엔 몽골인이 있었다. 특히 아시아인이 열등하다는 가장 유해한 이론적 설명은

   유럽의 철학자나 예술가 쪽에서 나왔다기 보다 계몽주의 영향으로 태어난 새로운 

   지식인 종족인 과학자들에게서 나왔다.

   ---> 독일 과학자에 의해 인간의 동물학적 분류에 의해 인간을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세 가지 기본 인종으로 구분하고 여기에 하위 범주로 아메리카와 

         말레이가 따라붙는다.

         특히, 아시아인이 몽골에서 유래했다는 이론에 따라 모든 아시아인을 몽골인 

         항목에 넣는다.

   ---> 몽골 인종이 아시아이의 원숭이인 오랑우탄과 가까운 관계라고 주장

   ---> 로버트 체임버스는 일부 발달이 늦은 아이의 얼굴이 아시아인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지진아와 몽골 인종을 연결시키는 만행도 저지른다.

   ---> 몽골 인종 분류체계가 서구 과학에 자리를 잡고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자 새로운

         분야로 확대됨.

6) 칭기스 칸과 몽골의 잔혹성은 문명화된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의 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통치할 수 밖에 없는 구실이 되었다.

 

 

[작품으로 얻은 잡지식]

- 몽골족은 술데라는 영기(靈旗)를 들고 다녔는데 이는 자연으로부터의 힘을 받고자

   하는 샤머니즘적 증표로, 평화로울 때는 백마 말총으로 전시에는 흑마 말총을 

   만들었다.

- 부족의 중심이자 왕궁 역할을 하는 우두머리 게르 단지오르도또는 호르테라고

   불렀다.

- 숫자 7은 몽골족에게는 불운의 숫자, 반면에 9는 행운의 숫자라고 함.

- 몽골 군대의 편제는 전사를 10명으로 끊어서 아르바(십호)’, ‘자군(백호)’, ‘밍간(천호)’,

   ‘투멘(만호)’로 구분하여 분할 지배하였다.

- 칭기스 칸은 장남 주치와 그의 투멘들에게 시비르지역을 제압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시베리아라는 말이 탄생하였다.

- 몽골의 사냥 대회 : 아바

- 몽골의 귀향과 승리 축하행사 : 나담

- 오늬 : 화살의 머리를 활시위에 끼도록 에어낸 부분

- 연산을 뜻하는 알고리듬(algorithm)이라는 말은 알 호라듬(al Khwarizm)에서 나왔다.

- 콜롬부스는 몽골을 찾기 위한 항해를 했으며 그래서 만난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인도인)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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