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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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해당 작품은 솔직히 좀 오래전에 읽었던 작품으로 컴퓨터 한 켠에 저장해 놓은 폴더를 정리하다 해당 작품을 

읽고 기록해 둔 서평을 여기에 정리해 올려 보았다.


작품은 총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본 작품은 '지방문학자'들을 위해 

기획 출판된 작품으로 보여지고 있는데, 일전에 내가 접했던 '이별 전후사의 재인식'을 집필하신 분이 들으면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작품보다 본 작품이 좀 더 독자들의 손에 쉽게 들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본 작품은 '현대인의 외로움'을 상징적으로 잘 그려 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두 번째 작품인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 흙' 이라는 작품은 본 작품의 

백미 -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였다고 생각하며 또 다른 작품인 '국기 게양대 로망스- 당신이 잠든 밤에

벌어지는 역사에 남을만한 인간의 외로움을 코믹하게 그려 낸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일 먼저 등장하고 있는 작품 '나쁜 소설 -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 주는 이야기'는 주제가 

갖는 의미성이 일견 현대인의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같기도 하지만 뭐라 딱히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 내 

입장에서는 - 그런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작품인 '원주통신'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일상에서 경험한 사항을 아주 리얼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성장기를 거친 사람들이면 누구라도 한 번쯤 경험했을 내용을 담고 있어 부담감 없이 읽었다.


작품 내용과 그에 따른 소회를 이야기하는 자리이지만 읽고 나니 너무나 아쉬운 점이 생각나 여기에 한가지

를 덧붙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내 입장에서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겠지만 재수가 있으면 누군가는 읽어보고 참조하겠지만 – 중언 부언의 

이야기지만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 작품(?)을 접해 본 나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문학이 침체를 맞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진단해 본다면 그것은 독자들의 흥미를 이끄는 재미난 작품이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현대문학이라는 미명아래 주제성도 모호하고 작품 속 복선도 꼬일대로 꼬아 놓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갖고 독자들 헷갈리게 하는 일련의 저술 행태가 독자들을 작품으로부터 외면하게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하는데, 여기에 몇몇 비평가라는 사람들이 출판사의 돈을 받아 그런지는 몰라도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작품을 미사려구를 동원한 비평을 통해 독자를 홀려 놓다보니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 다시는 문학 근처에 

오지를 않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 데 작품은 무조건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라는 것이 희극적 요소나 스탠딩 개그식의 이야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 독자의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재미를 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재미가 한가득 실린 이런 작품이 왜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춰지는지 도저히 이해

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아쉬울 따름이다.

나의 견해로는 해당 작가가 거의 무명 나의 작가에 대한 지식의 한계로 인해 - 에 가까워 작품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우리 문학계의 이야기꾼이라고 하는 ‘성석제님과 이문구님에 버금가는 그런 좋은 

작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나 출판사와 전혀 연관성이 없는 내가 생각해 볼 때, 아무튼 이런 작품은 여러 사람이 입 소문을 내서

라도 많이 선전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이 분에게 작품 제목과도 

같은 단편인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를  권의 작품으로 내 놓아도 큰 히트를 칠 것으로 생각되는 데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옆에 앉아 신문을 읽는 사람의 겉장을 곁눈질로 쳐다 보니 어느 신문에 출판사들이 

자사의 책을 집단 사재기해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사람들과 업체에 대해 수사를 해야 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는데,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며 그런 색히들은 부정식품과 불량식품 판매업자와 같은 수준의 처벌 

아니 그것보다 독자들의 정신수준을 낮춰놨으니 더 가혹한 형량을 주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다.

그런 작태가 없어지지 않는 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심혈을 기우려 만들었으나 저자의 지명도로 인해

몰지각한 출판사와 판매상의 농간에 의해 독자들의 눈과 귀로부터 멀어져 갔을 것을 생각해 보니 갑자기 

화가 났다힘도 능력도 없는 놈이 가타부타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는지 알지만 나같은 독자라도 한 명있어야 

대한민국의 숨겨진 보석같은 작가들이 더욱 더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무튼 좋은 작품입니다.

요즘 파는 커피 두 잔만 절약하면 이런 작품집 한 권 정도는 너끈히 사고도 남습니다.

우리 모두 책을 사서, 읽고, 느끼고, 전파합시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집에서 유료방송이나 게임 등으로 국가에서 모처럼 생색낸다고 쥐어준 재난 지원금 

갖고 엄한데 쓰시지 말고 이런 숨겨진 보물을 찾아 읽어 봅시다. 그렇지 않으면 갈팡질팡하다 진짜로 인생이 

꼬입니다꼭 책을 사서 읽읍시다우리 문학을 살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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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성장을 위한 8개의 질문
김종원 지음 / 나무생각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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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인문학이라는 타이틀로 인간 본성의 성찰 내지는 삶의 가치를 되짚는 작품을 접하게 되면 나는 항상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왜 이렇게 나의 인생을 알차게 보내지 못했을까 혹은 왜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이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살고 있을까? 하는 후회되는 생각만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작품을 읽으며 그 어느 때보다 자주 책을 덮고 저자의 주장처럼 독서란 멈추는 곳을 아는 것이라는 감정을 

실감하는 순간이 많았다. 그만큼 반성할 여지가 많았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잘못 살아온 삶도 아닌데 왜 그리 후회되는 경우가 많고도 많은지 답답하다.

작품으로부터 나름의 얻은 결론은 실천이 부족한 삶을 살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책을 그 누구보다 많이 읽고, 느끼고, 새롭게 되기 위한 변화를 시도해 보자는 다짐을 무수히한들 실행이 

뒷받침되지 않는데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시 이야기해 실행이 없는 독서란 병풍 속의 닭이 되고는 마는데 저자와 같은 대오 각성한 분들이 제시

하는 실천적 삶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리 쉬운 것이 아니기에 오늘도 나는 책만 읽은 초라한 인간이 

지나지 않고 있다는 생각만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괴테적 사유의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나 급박하고도 치열한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그러한 삶의 자세를 요구한다면 몇 사람이나 저자의 주장을 수긍하고 동조를 하며 자신의 삶에 변화를 

꾀하며 살 수 있을까?

한 끼의 밥이 중요하고, 한 푼의 돈이 필요한 상태에서 한가롭게 무엇을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삶의 방향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사유하는 삶의 자세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저자 분의 의견에 동의를 하는 바이다.

그런 대 전제 위에서 나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나의 이제까지의 삶의 방식은 한 낮 미물인 두더지와도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두더지적 삶은 어떤가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너무나 일반화시킨 표현으로 그렇지 않으신 분들까지 모두 싸잡아 표현해 미안하긴 하지만 - 모르긴 몰라도 하루 종일 땅 속에서 자신의 위치도 모른 채 오로지 구멍(현실적 문제 타개)

만 파다 자신의 일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다수일 것이다. 두더지는 앞으로 전진하다 돌멩이도 만나고 나무 

뿌리도 만나지만 어느 순간에는 힘에 벅찬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나 좌절하기도 했을 것이고, 도랑 곁을 

지나다 잘못 건드려 물구덩이로 변한 자신의 집을 만들기도 하지만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에 오늘도, 내일도 

구멍을 파기만 했지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이 살아온 세월이 아닌가 생각한다.

따라서 저자는 그런 삶의 방식에 변화를 꾀해보라고 또 지친 삶이 여정에서 방향성을 재정비 해 보라고 

사유의 삶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며 어찌되었던 간에 이런 시점에 한 권의 책이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책을 무수히 접했겠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고 있고 무엇이 중요

한지를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은 드나 이 한 권의 책으로 모든 것을 바꾸기에는 그 동안 

내재적으로 쌓인 나의 삶의 자세가 그리 호락호락 자세를 바꾸려 들지는 않을 것이기에 오늘도 고민하며 

이 글을 쓴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태어났으므로, 사는 내내 자신을 완성해나가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 하나를 잡고 끝까지 가라. 열정은 그렇게 증명된다.(P 17)

- 열정은 스스로 떠벌리는 게 아니라 타인에 의해 인정받는 것이다. 하나를 선택해서 끝까지 가라

  그 중심에는 반드시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때 사람들도 당신을 보며 열정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P 18)

- 열정을 가지는 삶보다 중요한 건 그 열정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자각하는 (P 20)

- 아는 자는 그것을 안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실천하는 자는 그것을 한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사는 일상이 이미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얕은 자는 시끄럽고 깊은 자는 조용하다.(P 21) 

- 돈은 집착하지 않는 자에게 모이고, 예술은 그것을 즐기는 자에게 안기는 법이다.(P 24)

- 인생 후반기는 전반기보다 위험하다. 후반기를 준비하는 자세로(P 26)

   1) 혼자의 공간 : 내면을 만나 혼자 즐기는 법을 배우라

   2) 절제된 감정 : ‘잃을 게 없다는 마음으로 도전하고, ‘잃을 게 많다는 심정으로 하라

   3) 공평한 시선 : 세상 정답은 없다.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맞는 답을 갖고 산다고 생각하라

   4) 돌려줄 용기 : 자신보다 재능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주라

- 모든 오늘은 가장 좋은 날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불행으로 희망을 완성하고 아픔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다.(P 28)

- 내일이 기대되는 삶이란?(P 33)

   1) 일상을 아름답게 살아라    2) 일상의 작가가 되어라    3) 일상을 사랑하는 지성인이 되라

- 창조의 최대 에너지는 절심함이다.(P 36)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자신을 낮춰야 하나라도 더 많이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P 37)

- 순간의 주인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그들은 인맥을 믿지 않는다

  다만 굳게 믿는 인맥이 한 명 있다. 바로 어제의 자신이다. 당신도 자신을 믿는 삶을 시작하라.(P 40)

예쁘게 말하기 위해서는 (P 49)

   1) 제발 가르치지 말라       2) 여유를 가지고 말하자      3) 이기려고 하지 말라

- 세상에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이 진심이다.(P 50)

- 진실은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진심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하나의 길로 통한다.(P 50)

- 단어 하나로 사람의 인생은 바뀐다.(P 53) --> '명절은 쉽니다' 대신 명절과 직원의 경조사가 있을 때 쉽니다

- 말하는 모습과 태도를 바로하고, 표현의 수준을 높이며, 내면의 중심을 바로잡자.(P 57)

- 언어는 생각과 마음을 번역하는 도구이다.(P 58)

-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이렇게 잘못 내뱉은 말로 우리의 삶은 더욱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P 60)

- 자신의 고통에 공감할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다.(P 60)

- 생각이 정체되면 그 사람의 정신도 늙는다. 두 가지를 명심하라(P 61)

   1) 남과 같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라

       : 인생 전반전에서 비슷하게 산 이유는 후반전의 다름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다  당신의 소리를 내라

         생각을 겉으로 표현하고, 행동에 힘을 더하고, 일상에 자유를 허락하라.  남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버리고 자신을 설득하며 살자.

   2) 몸과 마음은 젊어져도 좋으나 언어는 세월을 담아야 한다

- '참 다행이다' 이 말의 힘을 믿고 자주쓰자

  말로 힘을 주기 위해서는 정말 그에게 힘낼 근거를 주든지, 아니면 그가 스스로 힘낼 근거를 마련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가 진심을 다해 축복해줘야 한다.(P 69)

- 자신의 업에 대한 철학을 세우고 싶다면(P 77) 

   1)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라    2) 일상에서 업을 추구하라    3) 업의 깊이를 추구하라 

- 깊이 있는 인생을 원한다면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일상의 원칙으로 삼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P 79)

- 달려가는 사람만이 도착할 수 있다.(P 82)

- 분노와 시기로 도착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후회라는 섬 밖에 없다.(P85)

- 최고는 타인을 이겨야 얻을 수 있는 말이지만, 최선을 그날그날의 자신을 극복해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말이다. 최선은 인간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P 86)

감정을 망치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P 90)

   1) 일단 그 자리에서 벗어나라 

   2) 상황을 괜히 자신이 다 끌어안기보다 상대에게 미루는 태도 

   3)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라 

- 실패와 실수는 성공으로 가기 위한 자산이며(P 93), 성장으로 가는 지도는 실수라는 흔적 위에만 있다.(P 95)

- 실패를 성공으로 이끄는 사람에게 있는 용기

1)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           2) 실력과 운을 명확히 구분하는 용기

-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힘을 가진 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그대를 길들일 것이다.(P100)

- 그대의 결핍은 그대가 성공할 최고의 자산이다.

- 악마는 늙은이다. 그래서 늙은이가 아니면 악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괴테)

- 추구하는 것이 분명한 이를 이기기 위해서는 더 분명하고 강한 자신의 이념이 필요하다(P107)

- 돈은 머리가 없는 생물이다그래서 어느 곳에나 갈 수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현명하게 결정하지 

  못한다.(P109)

- 어렵게 배워야 그 안에 과정이 준 경험을 넣을 수 있다.(P112)

- 유혹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113)

- 스스로 자기 감정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 중요하다.(P117)

- 타인의 방법을 따라 하는 사람은 조직의 노예가 되고, 방법을 찾아서 일을 하는 사람은 전문가가 되고

  하나만 계속하는 사람은 대가가 된다.(P120)

- 일상의 사색을 자극하는 질문들(P126)

   1) 나는 누구인가?    2) 나는 어디로 가는가?     3) 나는 왜 그곳으로 가는가?   

   4)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보는가?                    5)경험에서 배운 것을 누구와 나눌 것인가?

    - 세상이 당신을 출발선에 세울 수는 있지만 달리는 것은 당신 몫이다. 태양은 언제나 빛을 주지만 빛나는 

      것은 당신의 몫이다.(P128)

    - 아이들이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아이들이 언제나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해라.(P133)

- 진짜 자신을 드러낼 용기(P137)

1) 거짓 없는 나의 생각 말하기

2) 세상이 아닌 나의 기대를 밝히기

3)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자신과 대화하기

4)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존재하기

  - 장점을 아는 사람만이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 있다.(P141)

 - 뭔지는 아는데 제대로 풀리지 않는 기간이 꽤 오래된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P142)

1) 어떤 경우에도 이름을 버리지 말라        2) 애매 모호한 성격을 버려라

3) 자신을 돕겠다는 생각을 먼저하라         4)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말라

5) 타인의 어깨를 빌리려는 시도를 접어라

 - 괴테의 주옥 같은 사색의 문구들(P153)

1) 서두르지 말자 그러나 쉬지도 말자

2)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3) 다른 사람이 우리를 인도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우리를 순식간에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간다.

4) 신은 절망한 곳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5)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잘못된 지식을 책망하라

    - 거짓은 시간이 지날수록 폭력적으로 변하지만, 진실은 그것을 추구하는 자에게 기품을 안겨

준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 당신의 때는 반드시 온다.(P158)

- 아름다운 노년은 최선을 다해 살았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다.(P160)

     - 자신감은 소리의 크기라 아니라 실천의 크기가 결정한다.(P165)

- 예측할 수 없는 배움과 깨달음이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고 자신만의 당당한 기품을 갖는 

   방법이다.(P168)

- 독서는 읽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읽고 멈출 지점을 찾는 게 목적이다.(P174)

- 지식을 삶에서 실천하는 방법(P176)

 1) 입을 닫고 다리를 움직여라                      2) 현실을 인정하라

 3) 나의 위선을 증명하라                             4) 변명하지 마라

 5) 불만은 비정상의 증거임을 인지하라           5) 자신을 최대한 사랑하라

 7) 삶에 적용하라

-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방법(P184)

 1) 일상의 주인이 되라           2) 일의 주인이 되라       

3) 언어의 주인이 되라           4) 공간의 주인이 되라

-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욕망의 제어를 받게 된다.(P190)

- 어떤 일이 있어도 정진하는 사람은 하늘의 도움으로 반드시 꿈을 만나게 된다.(191)

- 세상이 당신을 선택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스스로 세상을 선택하지 못하는 현실에 아파하는 

  사람만이 더 멋진 창조물을 탄생시킬 수 있다.(P198)

- 변화는 우리가 살아온 일상의 합이다. 자주 생각하는 삶의 목적을 진실하게, 자주 말하는 단어와 

   표현을 아름답게, 자주 접하는 사람과 풍경을 기품 있게 바꾸면 우리의 모습도 그렇게 바뀐다.(P203)

- 사람은 자기 능력에 맞는 시련을 겪는다. 더 큰 세상으로 갈 자격은 더 큰 벽을 넘은 

   사람에게 주어진다.(P207)

- 빠르게 가려면 열정만 있으면 되지만, 원하는 곳에 제대로 가려면 사색이 필요하다.(P2120  

- 배움은 만족이 아닌 허기에서 출발하는 지적인 도전이다.(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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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더 볼 지음, 정낙천 옮김 / 키네마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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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과거 종교관련 모 신문사에서 읽을 만한 종교 인문서적을 추천한 적이 있는데, 본 작품은 그 중 하나로 

종교적 신실함이 부족한 나로서는 모처럼 얻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재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 

추천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본 작품에 대해 개괄적으로 소개해 보면,

[벤허], [쿼바디스], [성의]와 함께 세계 4대 기독교 고전이라 불려지고 있다고 하는데,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 

읽는 사람에 따라 본 작품으로부터 받는 감흥은 다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작품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많은 이들에게 또 기독인이라면 꼭 한 번 읽기를 강하게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2000년 전, 로마.

젊고 매력적이며 전도 유망한 로마군 백부장인 '캐시우스 롱기누스', 그는 명문 가문의 후손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먼 친척으로 몰락한 집안의 여인인 '클라우디아 프로큘라'와 사랑에 빠지며 그녀와의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캐시우스의 아버지가 사업상 동료(퍼스커스)에 의해 음모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데, 이는 황제의 

근위대장인 실권자인 '세자너스'가 꾸민 모략이었다.

캐시우스의 아버지는 황제의 최측근으로 실권자인 '세자너스'가 황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는 데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로 캐시우스의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에 모략을 통해 그의 아버지를 

파산시켰던 것이다.

캐시우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인생의 말년에 재산도 없이 초라한 삶을 살게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아버지를 

파산으로 몰고 가는 데 보이지 않는 일조를 했던 '밸버스' 라는 인물의 노예가 되기로 하고, 그 조건으로 

아버지 재산의 일부를 보전해 줄 수 있는 방안에 합의하지만 끝내 아버지도 살해되고 만다.

 

'밸버스'의 자발적인 계약 노예가 되어 검투사로 양성된 캐시우스는 목숨을 건 결투 끝에 극적으로 강력한 

상대를 죽이고 사면되어 '유대' 땅으로 파병되는데 사랑하는 여인 클라우디아는 유대 땅의 총독으로 가는 

'밸러리우스 그라투스'(빌라도)의 아내가 된 상태였다.

유대 땅에서 캐시우스는 로마의 백부장으로서 임무를 잘 수행하던 중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대부호인 

'보즈 바 스블론'의 아내인 '나오미'와의 사이에 사소한 일로 나오미는 집에서 쫓겨나지만 예수로부터의 

구원과 또 마르다의 집에서 행한 예수라는 분의 기적을 목격하고는 그녀도 예수를 추종하는 한 명의 신도가 

되어 버린다. 그런 줄도 모르고 캐시우스는 나오미를 그리워하게 된다.

제사장을 비롯한 로마의 집권자들은 민심을 공공연히 혼란에 빠트리며 말도 안 되는 설교를 하고 다닌다는

이유로 예수를 체포해 십자가에 매다는 형벌로서 예수를 처치한다.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하기 직전 민중에게 도적 바라바와 예수 중에서 어느 쪽을 감형시켜 살려 줄 것인가를 

묻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적인 '바라바'를 원해 결국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하는 처분을 내리게 된다.

 

예수께서 처형되던 날,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의 죽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임무를 로마 병사인 캐시우스가 받게 되는데,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를 향해 그가 지닌 []을 휘둘러 치명적으로 예수의 시신을 훼손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행한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자각한 캐시우스는 고통 속에 빠져 들게 된다.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분석이 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 예수를 []으로 찌른 로마 병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간의 무지 몽매함(?)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구를 여기에 옮겨보면

 

[로마 병사의 행동에 세 가지 추정이 가능합니다.

첫째, 당시 로마 병사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과 살의가 팽배해 있었다.

둘째,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뒤늦게 현장에 투입되어 백부장과 동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사실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셋째, 이 로마 병사는 예수를 향해 개인적인 깊은 원한과 분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각자 다른 이유에서 신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 인류사 최고의 비극적인 인물들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작품 ''은 그간 우리가 유독 주목하지 않았고 지나치기 쉬웠던 한 인물을 들추어 내고 있다

바로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의 옆구리를 무자비하게 창으로 찔렀던 한 로마 병사이다.

우리가 이 병사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지 않고 지나쳤던 이유는 그가 예수를 처형한 주범들 가운데 한 명이 

아니라 단지 명령을 받아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보잘 것 없는 병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사건 경위를 살펴보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인과

관계 속에 놓여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하면서 로마 병사에 대한 질책 아닌 질책을 통해 당시 인간들에 대해 질책을 가하고 있지만 나는 

작품과 다른 주장을 이야기하고 싶다.

비록 당시 로마 병사가 예수님께 무지막지하게 []을 휘둘렀을지는 몰라도 지금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단 한 번만 []을 휘둘렀을 로마 병사와는 달리 주님을 향해 무지막지한 []을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부터 지금까지도 휘두르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로마 병사에 대한 분석만 할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기독인들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에서라도 

이 분석은 다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작품 속 로마 병사는 그는 분명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동료들을 이상하게 생각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뒤늦게 나타났다고는 하더라도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 죽음을 슬퍼하는 추종자들 앞에서 굳이 

죽은 자의 옆구리를 []으로 찔러 심장을 꿰뚫을 만큼 무자비한 잔혹성을 드러낼 이유는 더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었던 이유는 '상명하복'이 절대 절명의 가치로 존재하는 군대라는 

조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 그 과정까지도 모두 용납되는 것은 아니나 당시 로마 병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진정한 길 잃은 어린 양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한 분석은 그런 어린 양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그의 행동에 대한 비난 아닌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기독인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읽은 기독인라면 지금 우리는 주님의 심장에 로마 병사와 같은 []을 휘두르고는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우리의 주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갔던 제사장들도 창을 휘두른 병사와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고, 동전 몇 닢에 예수님을 넘긴 가롯 유다 역시 같은 범주의 인간은 

아닌지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예리한 창들고 설치는 목자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아전인수격으로 교회법을 해석해 대형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시키려고 발버둥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목사, 교회 건물을 재건축 조합에 대해 알박기 수단으로 만들고 자기 교회 신도들을 방어부대화 시키는 목자

입으로는 하나님 말씀 전한다면서 돌아서기만 하면 쌍욕을 해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상한 목자

자기와 함께 일하던 부목사가 개척한 개척 교회에 나갔다 왔다고 왕따시키는 목자, 자기 교회 공사를 장로인

자기에게 공사 맡기지 않았다고 목사에게 대드는 장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자신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고 

어린이고, 노인이고 가리지 않고 성질내며 삿대질하는 집사, 호나우도나 펠레도 아니고 교회 체육대회만 

했다 하면 항상 해트 트릭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주장 - 이런 분을 국가대표에 보내거나 해외 빅리그에 보내야 한다 - 을 하는 목자는 물론이고 이를 동조하는 장로며 신자들, 그루밍으로 어린 성도들 겁탈하고 성령님에 의해 자발적인 행위였지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기성 멘트를 일상으로 외치는 목자, 요새는 하다 하다 똥까지 먹이며 난리치는 목자들 등등 일일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얼마 전 어느 목사님 설교에서 요새 교회는 사랑을 전하는 일 빼고는 모든 일을 다하는 추세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들이 지금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세세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 모든 것이 형태만 달리하고 있는 또 다른 주님을 겨냥하며 휘두르는 

또 다른 []이 아닐까 생각하는 바입니다?


당시의 로마 병사의 행동에만 포커스를 맞추어 나는 깨끗한 사람인양, 그 병사만 나쁜 사람인양 이야기하지 

말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런 잣대를 들이대 예리한 비판의 날을 세울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또 다른 로마 병사가 아닌가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종교인으로서 또 사랑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기독인으로서 위에서 언급한 그런 실질적이고도 통렬한 자기 

반성 및 회개 없이는 우리의 주님은 항상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것이며 오늘도 우리의 죄를 속죄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어간 예수님은 수많은 []의 난도질 속에서 끊임없이 신음하실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종교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도, 개인적인 성찰을 통한 그 분의 깊은 뜻에 대해 겨자씨만한 믿음도 

생성되어 있지 않은 한 없이 부족한 신도이지만 과거 속의 로마 병사가 되지 않기 위해, 로마 병사를 비난한

비평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주님의 말씀을 널리 전파하려는 자세로 

오늘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평범한 개인입니다.

(요새는 조정민 목사님, 옥한음 목사님 설교에 휠이 꽂혀 거의 이어폰 생활 속에 살고 있다)

그 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었노라'라고 마지막으로 외치신 말씀이 결코 내게

있어서 만큼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정으로 열심히 전도하며 또 실천하며 생활할 것을 다짐하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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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 서울대 송호근 교수가 그린 이 시대 50대의 인생 보고서
송호근 지음 / 이와우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추천 권유도 7

평소 신문 사설이나 칼럼을 주로 읽을 때 남다른 필력과 예리한 분석력 그리고 차분한 논리로 독자와 나를 

매료시키셨던 저자께서 베이비 부머 세대인 50대들의 '힐링'을 위한 작품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또 평소 

저자에 대해 갖고 있던 나의 생각도 있어서 앞 뒤 생각하지 않고 작품을 접했다.

 

작품은 격동의 시대를 피와 땀으로 헤쳐 왔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 없어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인생의 

2막을 준비하는 모든 베이비 부머들에 대한 이야기로, 내용의 중심은 어느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바로 

'너'와 '나'의 이야기였기에 작품을 읽는 내내 어느 샐러리맨의 단편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어 묘한 감정이

들었던 그런 시간이었다.

가장 공감되었던 부분은 아마도 베이비 부머세대들이 한참 시절에 경험했었을 고생과 추억으로 점철된 

이야기 그리고 그들만이 소유하고, 공유하고 있는 이 나라 경제의 성공적인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는 거침

없이 달려 온 이 시대의 주역들에게 멋진 추억을 제공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나를 또 다른 흥분 속에 몰아

넣고는 하였다.

하지만 작품을 통해 받은 느낌은 마치 어느 등산가가 산행을 마친 뒤 마주하는 어떤 허전함이랄까 혹은 

아쉬움이 짙게 묻어져 나온 그런 작품이었다.

, 뭔가 '힐링'이 될 줄 알았던 작품이 오히려 가슴 한 켠의 응어리는 해소되지 아니하고 더욱 단단한 

옹이자리 매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를 고민해 보았고, 그 옹이는 도대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굳이 부연 설명하지 않더라도 퇴직을 했거나 눈 앞에 둔 세대들이라면 크게 공감할 몇 

구절을 통해 답을 찾아 보았다.

 

- 한국의 50대 남성들은 경제적 부양 책임을 이행한 대가로 가족들에게 정신적, 심리적 의존을 알게 모르게 

  구걸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 부모 세대는 '낳고 기른 공덕'을 노후보장과 맞바꿀 수 있는 불가침의 신성한 권리로 주장한 당당한 

  세대였으나 하지만 지금의 50대 중, 후반의 우리들의 베이비 부머 세대가 그랬다가는 쫓겨나는 수가 있다.

 

-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부모와 아이돌 그룹의 음악과 패션을 즐기며 자라난 자식들 사이에 낀 틈새 세대 

  베이비 부머들은 혈연 외에는 화해할 공통점이 없는 두 부족(部族)의 유별난 요구를 들어주느라 여념이 

  없다.

 

- 베이비 부머는 고답적, 복고적, 전통적 행위 양식을 '부모의 권리'로 강제하는 부모들의 가치관을 수용해야 

  하고, 현대적 합리성과 평등한 행위 규범으로 무장한 자식 세대들의 요구를 받아 들여야 하는 사태에 자주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 50대의 초반에 닥쳐오는 제2의 사춘기 시절 엄습하는 '허무'는 그간의 정체성을 부숴버리는 괴물로 다가

  오지만, 다른 한편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라는 긍정적 신호이기도 하다. 지금보다 훨씬 가혹한 혼란을 

  겪을 노년을 앞두고 청년 시절을 버텨 온 힘인 정체성을 새롭게 하라는 시그널이다

  그러므로 아예 일정 기간을 정해서 '정체성 수리 중'이라는 팻말을 뇌 속에 걸어두는 편이 낫다

  팻말 거는 방법이 의례와 의식이다.

 

- 누가 당신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주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홀로 서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취미는 정서적, 심리적 홀로서기에서 필수 

  항목이며 요리 능력 역시 그 한 범주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회관계의 소멸이다. 소득세를 낸다는 것은 

  사회관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베이비 부머들의 가슴 한 켠에 자리 잡은 응어리들의 실체를 나름의 관점으로 바라 보면,  

퇴직을 눈 앞에 두었으나 모아 놓은 것이라고는 달랑 아파트 한 채 밖에 없고, 부부의 영원한 채권자들로 

구성된 자식들과 이들의 뒤치닥 거리를 하다 모아둔 재화도 별로 없는 그야말로 뭐 두 쪽 밖에 없어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면 회사를 나서는 그 순간부터 아무런 대책도 없는, 그렇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회사에

목을 매고 뛸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고, 퇴직 후 살아가야 할 뚜렷한 경제적 방어 전략도 제대로 

수립되지 않아 항시 전전 긍긍하고 있으나 별 뾰족한 대안도 없는, 그래서 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해 뭔가 

준비해 보려고 마누라 몰래 융자를 받아 주식에도 투자해 보고, 전도 유망한 사업을 하는 친구 회사에 투자도

해 보았다가 거의 쪽박 수준이 되어 버려 꿈에 그리던 퇴직 후의 안락한 삶은 이제 완전한 꿈이 되어버린 

현실이 너무도 허망해 긴 한 숨만 절로 나오는 사람들의 그런 현실이 바로 응어리의 실체가 아닌가 생각한다.

더욱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이런 고생도 그 끝이 보여야 하는 데, 그 누구도 고생의 끝이 언제이고, 어디

까지인지에 대해 확언을 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 그 응어리는 더욱 베이비 부머 세대를 옹죄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작품을 읽고 난 후 모든 상황을 에 국한하여 생각을 다시 해 보게 되었다.

작품 읽은 후, 퇴직을 하더라도 '나에게는 퇴직에 따른 경제, 사회인 어려운 날들이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라는 자만심 아닌 자만심이 있었다.

한참 시절 인간에게 다리가 왜 있어야 하는지그 이유를 모를 정도로 회사와 사회 생활을 거의 날아 다니며

(?) 했었기 때문에 이런 자세와 정신만 갖고도 모든 현실적인 문제가 전부 해결될 줄 알았고 그런 날의 연속

인줄만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퇴직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아닌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지?’ 등과 같이 마주하는 

일상이 조직에 몸담고 있을 때와는 또 내가 조직 안에서 상상 속으로만 파악했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게 

벌어지다 보니 당혹스러움의 연속이었다.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으나 꼭 그 이유만은 아닐 것이라는 자위도 해 보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 속에 살아 왔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고 그런 참담한 현실 속의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과거 자신의 영광과 촉망받던 시절을 생각해 봐야 생각하는 본인만 괴로울 뿐이다.

퇴직이 현실이고, 재 출발이 순리라면 큰 물의 앞 물을, 뒷 물이 밀어 내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듯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이고 사고의 폭을 현실성 있게 넓게 가질 필요가 있음을 새삼 느끼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한 금언을 다시 들여다 보게 되었다.

우리 인생에 있어 마주하게 되는 장애물은 우리를 막는 장애가 아닌 새로운 길을 알아 보라는

어떤 '계시'로 받아들이라

는 말이었다.

 

퇴직을 막연하게 세인들이 말하는 2의 출발선이라는 막연한 의미로 해석해 어찌되겠지 하는 생각과 

자세로 마주하지 말고 뭔가 새로운 도약의 밑받침으로 생각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무게로 인해 마주한 퇴직임에도 마치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선택될 수 밖에 없었던 

길인 것처럼 괜히 억울한 생각이 든다. – 자발적으로 나온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렇다고 누가 본인의 억울함을 대신 풀어줄 수 있겠는가. 당사자인 본인 스스로가 헤쳐나가고 홀로 해결

야 할 운명인 것을 말이다.

결코 울지 않겠다.

그렇다고 그렇게 살아 온 날들을 후회하지도 않겠다. 내가 그렇게 살아 왔기 때문에 오늘날 나의 가정이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힘껏 또 도약의 기틀을 만들어 보겠다. 또 나만의 

자부심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다녔던 우리 회사가 오늘날 모든 이들이 우러러 보는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어느 누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지 간에 나의 조그만 힘이 보탬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겠다. 그러나 힘들 것이다.

때로는 처절하게 외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내 개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

 

지금 이렇게 글을 써도 나의 마음은 정말로 무겁고도 무겁다 아니 무척 힘들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생각할 것이고, 가장 멋지게 어려운 고난을 이겨냈을 때를 생각하며

힘차게 살아가고자 한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더 중요 이유를 작품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누가 당신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주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홀로 

 서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품을 읽은 느낌을, 소회를 길게 써 봐야 답답함만 가득할 뿐이고, 홀로 세상이라는 정글에 내 버려진 듯한 

느낌만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이지만 나는 외치겠다.

 

"파이팅!”이라고 말이다


* 오늘은 퇴직 후 찾은 두 번째 직장에 사표를 내는 날입니다만 그렇게 서글프지는 않네요.

  그런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던 나의 감정에도 딱쟁이가 앉아 그런가 봅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겠죠?

  이렇게 글을 쓰고는 있지만 세상 참,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인생 2막 녹녹하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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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 강의 다리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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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6

어느날 우연히 접한 신문에서 본 작품을 알게 되어 접했는데, 작품의 분량과 내용 그리고 줄거리가 그리 

녹녹한 작품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책 읽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책장을 열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작품을 손쉽게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작품은 특정한 주인공도, 작품을 관통하는 이슈적인 사건 사고들도 없었지만 굳이 주제를 

설정해 작품에 대한 소회를 여기에 제시해 본다면 아마도 ‘발칸반도’의 역사적 변천에 따라 보여지고 있는 

‘드리나 강 다리와 다리 주변에 사는 민초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의 어느 한 작은 마을과 그 곳에 놓여진 다리에 얽힌 작품이지만 

환경적으로는 주변국들의 정치 환경적 배경에 기인한 역사적 사실과 다리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종교와

생활 그리고 그들의 사는 모습 속에 비춰진 여러 실생활에 관한 작품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인 다리가 놓인 곳은 ‘보스니아 내전’이나 ‘코소보 사태’가 일어난 곳으로 

예전에는 '유고슬라비아' 지역이지만, 지금은 7개의 국경선과 6개의 공화국, 5개의 민족 그리고 4개의 언어

3개의 종교와 2개의 문자를 가진 말 그대로 '인종과 종교의 도가니’지역이다.

이 땅은 오래 전에는 카톨릭, 그리스정교와 이슬람, 유대교인들이 평화롭게 함께 살아온 터전이며, 그들만의 

사랑, 미움, 아픔, 믿음 그리고 배신이 끊임없이 일어나던 세상의 다른 땅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곳이다.

 

지금부터 약 400년 전, 오스만투르크가 지금의 발칸반도를 지배하던 시절, 보스니아의 '비세그라드' 지역에는 

'드리나 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강은 강가에 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기도 하였지만, 다리로 

인한 불편함도 있었지만 그 지역 사람들은 그 다리를 생활의 일부요 자신들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었다.

이 다리는 강 주변 지역출신으로, 어린 시절 터키제국으로 끌려가 나중에 술탄의 장군이 된 한 인물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이 그 곳에 다리를 건설하면서 생긴 건축물로 그 다리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현재까지도 그 자리에 남아서 지역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고, 지역 민중들의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하면서 

종교와 인종에 관계없이 서로를 위로하고 힘을 주는 그런 매개체 역할도 했으나 다리가 지어질 때 격심한 

노동의 고통을 참지 못하여 다리를 무너뜨리고자 하던 한 농부의 참혹한 처형도, 반란을 꾀한다는 죄명으로 

잡힌 죄 없는 농부와 나무꾼의 교수대도 모두 이 다리 위에 세워진 아픔도 간직한 장소였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포탄에 의해 다리가 절반 이상 파괴되는 슬픈 역사도 간직하고 있었는데 

작품은 이 모든 것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 ‘드리나 강의 다리는 단순히 역사를 간직한 건축물이 아닌 그 나라, 그 민족의 애환을 상징하는 역사적 

유물이었던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해 본다면, 위와 같은 역사적 아픔을 지니고 있는 드리나 강 지역을 얼마 전까지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슬람, 카톨릭, 세르비아 정교 및 유대교인들이 혼재되어 아귀다툼하는 혼란의 

중심이었지만, 작가는 이곳의 이야기를 우리나라 영화의 동막골’과 같은 시각으로 작품을 그리고 있다.


해당 작품에서도 동일한 아쉬움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바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정확한 배경에 무지하다 보니 미묘한 부분에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려고 해도 세부적인 사항을 

몰라 약간은 답답함이 밀려오기도 하였으나 나름 자꾸 읽고 느끼다 보니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세세히 

몰라도 어느 정도 이해되는 부분이 많았다고 생각된 작품이다.

특히, 작품 중반 이후 ‘철도’가 마을 지나가는 것을 소재로 전개되는 내용은 주제가 단순한 노동과 일반적인 

삶 중심에서 정신적인 측면으로 변해가는 내용을 접하면서 왜 본 작품이 문학적인 가치를 높게 평가 받게 

하고 있는지 알게 해 주었다.

 

작품을 읽으며, 우리 민족의 어려움을 대변할 수 있는 ‘다리’를 매개로 한 문학 작품이 우리에게는 없었을까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작품을 읽으며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되고 있는 ‘비세그라드 지역’의 주민 정서를 통해 당시 그들의 고단한 삶의

한 단면을 살짝 엿보았는데, 격변기 속 지역 주민들의 삶은 과거 불행하고도 고단한 삶을 살았던 우리네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1. 카사바 주민들은 불길한 것을 다시 생각하기 싫어하고 장래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의 피에는 참된 인생이 조용한 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존재하지도 않는 더 확고하고 더 영속되는

   다른 인생을 모색하다가 그 시간을 망친다는 것은 미친 짓이며 쓸데없는 짓이라는 믿음이 흐르고 있었다.

                                                                                                                               (144)

2. 갖가지 법령, 규정, 명령의 망을 쳐서 사람, 가축, 사물 할 것 없이 온갖 형태의 생활을 간섭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도시의 외형을 물론, 요람에서 무덤까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풍속과 습관을 뜯어고치려고 

   결심한 것 같았다.(201)


3. 오래 전부터 이미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물어 본 적이 없었고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오스트리아 놈들이 

   보스니아로 들어왔지만 터키 황제도 오스트리아 황제도 우리에게 묻지 않았다. 베그들과 터키의 지주들이

   허가를 했는가 말이오? 또 어제까지도 우리의 라야였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반란을 일으켜 터키 

   제국의 영토를 반이나 빼앗아갔지만 아무도 우리를 거들떠보지 않았지. 이제는 오스트리아 황제가 

   세르비아를 치는데 역시 우리에게는 묻지도 않고 대신에 총과 군복을 주며 ....(중략).... 이 곳 국경에서는 

   싸움이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어디까지 닿을지 누가 아느냐 말이다. (436)

 

특히 상기의 내용 중 3번의 내용은 많은 생각을 던져 준 문구였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실제 접해 보시지 않으면 내가 왜 문구를 여기에까지 올리며 감탄을 내 놓고 있는지 모르실 것이니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드는 문구 

 

- 허영심이 많은 자는 아첨을 샀고, 우울한 자는 그들의 농담과 익살을 샀으며, 자포 자기한 자는 그들의 

  용기와 시중을 샀다.(사팔뜨기 집시여인에 대한 평가, 281)


- 터키인들이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3가지 사랑, 기침, 가난(371)

 

 

참고로 ‘드리나 강의 다리에 대해 알아보면


드리나 강은 346km에 이른다. 녹색강물로 인하여 세르비아인들은 드리나 강을 일명 <질룐까(녹색)>라고 

부르기도 한다. 상류에서 드리나 강은 계곡과 좁은 산골짜기를 통과해 선회하며 흐르고, 그 덕분에 발칸반도

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 중 하나로 꼽힌다.


드리나 강에는 ‘피바’와 ‘타라’라는 두 개의 근원이 있다.

피바와 타라는 북서 헤르체고비나를 따라 흐르고, 훔 근처에서 합류하는데, 그 합류점이 드라나 강의 시작

으로 간주된다. 그곳에서부터 드리나 강은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국경을 따라서 사바 - 보산의 라치 근처

에서 흐르는 - 로 흐른다. 드리나 강을 끼고 있는 주요 도시로는 보스니아의 포차, 고라즈데, 비셰그라드

즈보르니크와 세르비아의 바이나 바슈타와 로즈니차가 있다. 드리나강은 사바강의 가장 큰 지류이다.

 

비셰그라드에 있는 드리나 강을 관통하는 다리는 세계문화유산이다.

역사적으로 드리나 강은 오랜 옛날부터 서로마와 동로마제국의 자연적 국경이었고, 이후에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접경이었다. 오스만의 압제시절 이슬람교의 유입은 오늘날까지도 드리나 강 연안 사람들의 

행동과 삶에 영향을 끼친다.

수세기 동안 이곳에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있었지만 그들의 공존은 심심찮게 많은 분쟁을 야기하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드리나 강에서는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군 사이에 몇 차례 혈전이 

일어났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1992년부터 1995사이에 일어난 내전 때 포차와 고라즈데에 유엔의 평화

지역으로 선포된 것은 잘 알려진 슬픈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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