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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루이스 더 볼 지음, 정낙천 옮김 / 키네마인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추천 권유도 8
과거 종교관련 모 신문사에서 읽을 만한 종교 인문서적을 추천한 적이 있는데, 본 작품은 그 중 하나로
종교적 신실함이 부족한 나로서는 모처럼 얻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재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
추천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본 작품에 대해 개괄적으로 소개해 보면,
[벤허], [쿼바디스], [성의]와
함께 세계 4대 기독교 고전이라 불려지고 있다고 하는데,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
읽는 사람에 따라 본 작품으로부터 받는 감흥은 다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작품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많은 이들에게 또 기독인이라면 꼭 한 번 읽기를 강하게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2000년
전, 로마.
젊고 매력적이며 전도 유망한 로마군 백부장인 '캐시우스
롱기누스', 그는 명문 가문의 후손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먼 친척으로 몰락한 집안의 여인인 '클라우디아 프로큘라'와 사랑에 빠지며 그녀와의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캐시우스의 아버지가 사업상 동료(퍼스커스)에 의해 음모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데, 이는 황제의
근위대장인 실권자인 '세자너스'가 꾸민 모략이었다.
캐시우스의 아버지는 황제의 최측근으로 실권자인 '세자너스'가 황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는 데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로 캐시우스의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에 모략을 통해 그의 아버지를
파산시켰던 것이다.
캐시우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인생의 말년에 재산도 없이 초라한 삶을 살게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아버지를
파산으로 몰고 가는 데 보이지 않는 일조를 했던
'밸버스' 라는 인물의 노예가 되기로 하고, 그 조건으로
아버지 재산의 일부를
보전해 줄 수 있는 방안에 합의하지만 끝내 아버지도 살해되고 만다.
'밸버스'의 자발적인 계약 노예가 되어 검투사로 양성된 캐시우스는 목숨을 건 결투 끝에 극적으로 강력한
상대를 죽이고 사면되어 '유대' 땅으로 파병되는데 사랑하는 여인 클라우디아는 유대 땅의 총독으로 가는
'밸러리우스 그라투스'(빌라도)의 아내가 된 상태였다.
유대 땅에서 캐시우스는 로마의 백부장으로서 임무를 잘 수행하던 중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대부호인
'보즈 바 스블론'의 아내인 '나오미'와의
사이에 사소한 일로 나오미는 집에서 쫓겨나지만 예수로부터의
구원과 또 마르다의 집에서 행한 ‘예수’라는 분의 기적을 목격하고는 그녀도 예수를 추종하는 한 명의 신도가
되어 버린다. 그런 줄도 모르고 캐시우스는 나오미를 그리워하게 된다.
제사장을 비롯한 로마의 집권자들은 민심을 공공연히 혼란에 빠트리며 말도 안 되는 설교를 하고 다닌다는
이유로 예수를 체포해 십자가에 매다는 형벌로서 예수를 처치한다.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하기 직전 민중에게 도적 바라바와 예수 중에서 어느 쪽을 감형시켜 살려 줄 것인가를
묻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적인 '바라바'를 원해 결국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하는 처분을 내리게 된다.
예수께서 처형되던 날,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의 죽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임무를 로마 병사인 ‘캐시우스’가 받게 되는데,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를 향해 그가
지닌 [창]을 휘둘러 치명적으로 예수의 시신을 훼손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행한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자각한 캐시우스는 고통 속에 빠져 들게 된다.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분석이 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즉, 예수를 [창]으로 찌른 로마 병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간의 무지 몽매함(?)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구를 여기에 옮겨보면
[로마
병사의 행동에 세 가지 추정이 가능합니다.
첫째, 당시 로마 병사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과
살의가 팽배해 있었다.
둘째,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뒤늦게 현장에 투입되어 백부장과 동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사실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셋째, 이 로마 병사는 예수를 향해 개인적인 깊은 원한과
분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각자 다른 이유에서 신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 인류사 최고의 비극적인 인물들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작품 '창'은
그간 우리가 유독 주목하지 않았고 지나치기 쉬웠던 한 인물을 들추어 내고 있다.
바로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의 옆구리를
무자비하게 창으로 찔렀던 한 로마 병사이다.
우리가 이 병사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지 않고 지나쳤던 이유는 그가 예수를 처형한 주범들 가운데 한 명이
아니라 단지 명령을 받아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보잘 것 없는 병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사건 경위를 살펴보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인과
관계 속에 놓여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하면서 로마 병사에 대한 질책 아닌 질책을 통해 당시 인간들에 대해 질책을 가하고 있지만 나는
작품과 다른 주장을 이야기하고 싶다.
비록 당시 로마 병사가 예수님께 무지막지하게 [창]을 휘둘렀을지는 몰라도 지금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단 한 번만 [창]을 휘둘렀을 로마 병사와는 달리 주님을 향해 무지막지한 [창]을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부터 지금까지도 휘두르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로마 병사에 대한 분석만 할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기독인들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에서라도
이 분석은 다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작품 속 로마 병사는 그는 분명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동료들을 이상하게 생각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뒤늦게 나타났다고는 하더라도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 죽음을 슬퍼하는 추종자들 앞에서 굳이
죽은 자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심장을 꿰뚫을 만큼 무자비한 잔혹성을 드러낼 이유는 더더욱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었던 이유는 '상명하복'이 절대 절명의 가치로 존재하는 군대라는
조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 그 과정까지도 모두 용납되는 것은 아니나 당시 로마 병사는
아무 것도 모르는 진정한 길 잃은 어린 양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한 분석은 그런 어린 양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그의 행동에 대한 비난 아닌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기독인이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읽은 기독인라면 지금 우리는 주님의 심장에 로마 병사와 같은 [창]을 휘두르고는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우리의 주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갔던 제사장들도 창을 휘두른 병사와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고, 동전 몇 닢에 예수님을 넘긴 가롯 유다 역시 같은 범주의 인간은
아닌지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예리한 창들고 설치는 목자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아전인수격으로 교회법을 해석해 대형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시키려고 발버둥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목사, 교회 건물을 재건축 조합에 대해 알박기 수단으로 만들고 자기 교회 신도들을 방어부대화 시키는 목자,
입으로는
하나님 말씀 전한다면서 돌아서기만 하면 쌍욕을 해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상한 목자,
자기와 함께 일하던
부목사가 개척한 개척 교회에 나갔다 왔다고 왕따시키는 목자, 자기 교회 공사를 장로인
자기에게 공사 맡기지 않았다고 목사에게 대드는 장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자신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고
어린이고, 노인이고 가리지 않고 성질내며 삿대질하는 집사, 호나우도나 펠레도 아니고 교회 체육대회만
했다 하면 항상 해트 트릭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주장 - 이런 분을 국가대표에 보내거나 해외 빅리그에 보내야 한다 - 을 하는 목자는 물론이고 이를 동조하는 장로며 신자들, 그루밍으로 어린 성도들 겁탈하고 성령님에 의해 자발적인 행위였지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기성 멘트를 일상으로 외치는 목자, 요새는 하다 하다 똥까지 먹이며 난리치는 목자들 등등 일일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얼마 전 어느 목사님 설교에서 ‘요새 교회는 사랑을
전하는 일 빼고는 모든 일을 다하는 추세’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들이 지금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세세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 모든 것이 형태만 달리하고 있는 또 다른 주님을 겨냥하며 휘두르는
또 다른 [창]이 아닐까 생각하는 바입니다?
당시의 로마 병사의 행동에만 포커스를 맞추어 나는 깨끗한 사람인양, 그 병사만 나쁜 사람인양 이야기하지
말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 스스로에 대해서도 그런 잣대를 들이대 예리한 비판의 날을 세울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또 다른 로마 병사가 아닌가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종교인으로서 또 사랑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기독인으로서
위에서 언급한 그런 실질적이고도 통렬한 자기
반성 및 회개 없이는 우리의 주님은 항상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것이며 오늘도 우리의 죄를 속죄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어간 예수님은 수많은 [창]의 난도질 속에서 끊임없이 신음하실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종교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도, 개인적인 성찰을
통한 그 분의 깊은 뜻에 대해 겨자씨만한 믿음도
생성되어 있지 않은 한 없이 부족한 신도이지만 과거 속의 로마 병사가 되지 않기 위해, 로마 병사를 비난한
비평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주님의 말씀을 널리 전파하려는 자세로
오늘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평범한 개인입니다.
(요새는 조정민 목사님, 옥한음 목사님 설교에 휠이 꽂혀 거의 이어폰 생활 속에 살고 있다)
그 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다 이루었노라'라고 마지막으로 외치신 말씀이 결코 내게
있어서 만큼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정으로 열심히 전도하며 또 실천하며 생활할 것을 다짐하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