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잠긴 아버지
한승원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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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7

 

그냥 가슴이 짠한 작품이었다.

주인공은 작품 속에서 작가에 의해 창작된 아버지가 아닌 바로 나의 아버지이자 우리 모두의

아버지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작품의 내용을 언급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내가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가뜩이나 척박한 우리 문학을 더욱 죽이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정말로 문학을 사랑하고 이 땅의 문학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를 원하는 독자라면

이런 작품 하나 정도는 구매해 읽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계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문화예술인들을 핍박했다는 인간들을 욕하기 이전에 이런 작품

하나 안 사는 우리의 문학을 아끼는 의식 수준에 대해 스스로 질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욕하고 때리는 사람만 나쁜 게 아니고 그런 사람을 보고도 못본척 하면서 안 말리고 야단치지

않은 사람이 더 나쁘듯 이런 작품 눈탱이로만 읽고 다 읽은 듯이 떠벌리는 사람들도 우리 문학을

죽이는 또다른 블랙리스트를 만들 개연성이 높은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품을 덮으며 이제는 영영 볼 수 없는 곳으로 가신 나의 부친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 근, 현대사의 격동기를 온 몸으로 살아 오셨던 나의 부친도 작품 속 주인공만큼 순탄하지는

않은 삶을 살아오신 것으로 나의 추억 속에 자리잡고 있다.

일제 해방 직전 일제 학병으로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되기 직전 우리나라가 독립되면서 일본에서

귀국하셨는데, 부친은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에 전념하려다 얼마 안 있어 터진 한국전쟁

으로 또다시 전쟁터로 향하게 되신다.

종전 후에는 육군 장교로 중요 업무를 수행하셨지만 세월이 흘러 군에서 높은 위치에 오르신

어느 날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들어오시고는 했었다.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며 만취하신 아버지의 군화끈를 풀면서 나는 눈물 반, 콧물 반이 된 채

혼자말로

나는 어른이 되면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

는 다짐 아닌 다짐을 그 얼마나 했었는지 모른다.

시간이 흐른 지금 당시 부친께서 왜 그런 행동을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도, 안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

당시 아버지의 만취 이유는 월남전에 참전하지 않으면 강제 예편될 수 있다는 부담감과 어린

자식 네 명만 남겨놓고 살아 돌아온다고 확신할 수 없는 월남으로 훌쩍 가버리면 아버지와 같이

살 수 없다는 어머니의 협박으로 인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택한 아버지만의 현실 탈출

방법이었으며 고민 해소 방법이었음을 나중에 커서 알게 되었다.

- 모친께서는 남자의 앞길을 막는 행동으로 아버지를 월남전에 참전시키지 못하게 한 것을 평생

  두고 후회하셨다 -

아버지는 가족을 선택하셨고 그리고 예편을 하셨다.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교련교사로 취직을 시켜준다는 이야기에도 전쟁으로 인해 변변한

학교 졸업장조차 없어 군 예편 후 돌아가실 때까지 실업자 생활을 하셨는데 그 때 아버지의

연세는 40대 초반(50대 중반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나 나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이야기 혹은 글로써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내용에 관계없이 그것을 읽고, 듣는 타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경험하거나

직접 접한 사실이 아니기에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나 공감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냥

단순한 어느 범부의 넋두리 정도로만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여기서 생략하고,

작품을 통해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 느꼈을 감정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지금 살아계신

부모님들에게 전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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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바시스
크세노폰 지음, 천병희 옮김 / 단국대학교출판부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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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추천권유도 6

 

몇 주 전 '그리스·로마 인간 경영학'이라는 책자를 읽다가 눈에 자주 들어 온 인물이

있었는데, 생소한 이름이면서 소크라테스의 친구라는 이야기에 또 책자에 인용한 명문구에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기에 호기심을 갖고 있던 중 그 사람이 썼다는 책자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아나바시스'이다.

 

크세노폰(Xenophon)<아나바시스>는 서양에서 특히 지휘관, 더 나아가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정평이 나 있는 명저라는 칭찬이 곳곳에서 있어서

접하게 되었다.

 

<아나바시스>의 내용은 기원전 402/1년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의 동생

'퀴로스 2'는 형을 왕위에서 축출하고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대항할 용병을 모집한다.

퀴로스 2세는 유능하고 경험이 많은 '헬라스 군' 장군들을 통하여 11,00명이 넘는 헬라스

용병들을 모집해, 기원전 4013월 왕명에 순종하지 않는 '피시다이족'을 응징 한다는

것을 핑계로 '사르데이스'를 출발하여 내륙으로 행군한다.

 

작품은 이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용병을 모집한 후 첫 전투에서 퀴로스 2세가 죽는다. 지휘관을 잃은 헬라스의 용병들은

갈팡질팡한다. 바로 이때 헬라스군의 권유에 의해 대장으로 등극한 인물이 바로 작품을

집필한 '크세노폰'이라는 인물이다.

크세노폰이 용병들을 이끌고 내륙을 횡단하면서 겪는 전투의 상황과 부하들을 통솔하기

위해 행한 각종 연설 등을 다룬 작품으로 이 작품은 완전한 '역사서'도 아니고 '여행기'

아닌 이 두 요소를 겸비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이 후세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후세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 이유 두 가지를 들으라면,

 

첫째 당시 급변하고 있던 시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으로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고,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여기서 언급되고, 기술되고 있는 각종 연설은 웅변가가 되려는 사람이 한 번쯤

읽어야 될 명 문장이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며 또 여러 대중을 상대로 연설 할 기회가 많은

정치가들에게도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어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적으로 볼 때 지휘관의 리더쉽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비마다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었다.

 

작품 전체적으로 생소한 기원전 유럽 지역의 부족 이름과 발음하기도 힘든 용병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어 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의 지형적 위치가 한 눈에 잡히지를

않는 내용이어서 자칫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는 요소도

가득하나, 분명한 것은 작품 중간중간에서 언급되고 있는 지휘자인 퀴로스 2세와 책의

저자인 크세노폰의 리더쉽이 대화체로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어 어느 정도는 작품으로부터

배울만 한 요소가 많이 있는 작품이라 생각되어 진다.

 

그러나 아무래도 일반적인 작품으로 분류하기 보다는 전사(戰史)에 가까운 작품으로서

전쟁사와 군대의 전략을 연구하는 군에서 이 작품을 접하면 좋았을 것으로 판단되어 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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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지음 / 문학사상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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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8

 

작품을 다 읽은 순간 일천한 지식을 소유한 나라도 저자에 대한 한마디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 수년 전에 이런 작품을 읽었다면 아마도 우리 민족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특질들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아무런 비판없이 숙명처럼 내가 받아 들였을지도 모르겠으나, 어느

정도의 세월, 쉽게 이야기해서 연륜이 많다면 많고 어느 정도 쌓였다면 쌓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나이가 되다 보니 작품에서 주장하고 있는 저자의 전체적인 내용이 내가 살면서

겪고, 느끼고, 배운 경험치와 사뭇 다른 점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저자의 주장 내지는

이론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에 나름의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대표적인 이유가 바로 우리 고유의 놀이인 '윷놀이 문화'를 갖고

'당파 싸움의 전형'에 빗대어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는데 어떤 이유로 그런 의견을 내세우는

지 저자의 그런 관점에 나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어떤 게임이든 게임을 하다 보면 게임의 흥미를 배가시키기 위해 게임 중간에 게임 룰을

좀 더 자극적으로 변경하던지 별도의 조건을 달아 재미를 배가시키는 여러 변칙적인 부속

룰이 생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파생된 룰 조차도 마치 당파 싸움의 변형된

모습으로 해석하는 판단에 분노에 가까운 슬픔이 크게 들었다.

- 과거 12.12 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 급속히 퍼진 '전두환 고도리' 등은 그런 사회를 비아냥

  거리기 위해, 그런 사건을 만든 권력자를 조롱하기 위해 아무 대항할 무기를 갖지 못한

  민초들이 만들어 낸 룰인데 우리의 전통놀이인 '윷놀이'까지 그런 범주에서 해석한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다 -

 

더욱 짜증나는 것은 우리 산하에 피어난 자연물(꽃 이름)과 우리 선조들의 일상 생활 속에

힐링을 주었던 인위적(전설과 민요)인 요소에까지 저급한 분석의 논리 - 내가 볼 때는

그렇다 - 로 조명하는 저자의 관점에 나는 저으기 당혹스러움을 느끼다 못해 짜증까지

났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첫째, 꽃 이름에 관한 사항이다.

저자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그 울음은 대부분이 가난과 굶주림에서 온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형이상학적인 '슬픔'이 아닌 형이하학적 '울음'에서 파생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과

 

둘째, 우리에게 있는 '전설''민요'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은 우리 민족이 그만큼 상상력의

억눌림 속에서 살아 왔다는 일방적인 논리이며

셋째, 빨갛고 투명한 포도주에는 프랑스의 명석한 지성이 있다는 논리는 무엇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이고, 베르사이유 궁의 분수와 같은 맑은 사치가 있다는 논리는 무슨 궤변인지

모르겠다.

더욱 웃긴 것은 독일의 맥주에는 독일인의 낭만과 거품처럼 일다 꺼져 버리는 관념이

있다는 소리는 또 무슨 소리인가

 

넷째, 한국의 담뱃대(長竹)가 그렇게 길었다는 것은 곧 우리가 게으름과 무기력 그리고

비활동과 비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어떤 근거로 이야기

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한국 예술에서 색채가 부재하는 것은 곧 생활의 즐거움이 부재한 증거라는

주장은 또 무엇을 근거로 그리 주장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해괴한 논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것 하나 동의할 수 없는 궤변에 가까운 잔재주의 말 장난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 그런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는 산이 평지 보다 많은 그런 나라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또 아주 그 옛날 모든 의식주를 자연채집에 전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시절에 먹을 것을

얻으러 심산유곡을 돌아다니다 마주치는 이름 모를 꽃들이, 나물들이 엄청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깊은 산 골과 넓은 들판에서 심신이 피로할 때에 또 산천 초목을 휩쓸며 먹을 것을

구하려 이 산 저 산을 헤매던 그 옛날 이름 모를 선조 한 분이 아주 우연히 이름모를 꽃과

마주하였을 것이다.

어떤 꽃 옆에는 꼭 먹을 것이 많았고 또 어떤 꽃들은 험한 지역에서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부주의로 사고가 나서 다치기도 하였을 것이고, 어떤 꽃 옆에만 가면 참지 못하면 어떤

징크스적 현상도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경험치를 대입해 혹은 어려울 때 혹은 즐거운 때에 마주하는 꽃에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 이름을 붙였을 것이고 그렇게 유래된 이름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 왔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작가께서는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우리 선조들의 행위가 '형이하학적' 이었고 '상상력의

부족'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저자는 우리 선조들이 지어서 대대손손 내려오는 우리 꽃 이름처럼 아름다운 우리말 꽃

이름을 지어 본 적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둑놈의 갈고리', '여우 오줌' 등과 같이 얼마나 사실적인 단어의 선택인가...

나는 이런 단어가 치졸하고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몰아 부치는 작가의 생각이 오히려 더

치졸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또한 프랑스의 빨간 포도주가 명성을 상징한다는 논리와 베르사이유의 궁전 분수가

사치스러우면 사치스러운 것이지 '맑은 사치'는 또 무슨 이야기인가 나는 도대체 작가님의

그런 주장이 더욱 웃길 뿐이다.

더욱 가관인 해석은 담뱃대가 긴 것 갖고 이야기하는 작가님의 시선이다.

한국의 담뱃대(長竹)가 긴 이유를 게으름과 무기력 그리고 비활동과 비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에 아연 실소케 하였다.

우리의 사극을 보면 왕 앞의 신하들이 쓰고 있는 사대관모는 청렴과 고결의 상징인 '매미

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것이다.

아마도 저자께서는 그런 모습도 동일한 시각으로 해석을 한다면 '매미는 여름 내내 울기만

하고 일은 하지 않는 그런 곤충으로 우리의 양반을 그대로 형상화 한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역으로 풍류와 멋을 즐겼다고 보면 안 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미국의 갱스터 영화를 가끔 보면 갱단들이 굵직한 시가를 입에 물고 때로는 질겅

질겅 담배를 씹으며 기관단총을 상대에게 쏘아대서 상대를 순식간에 처치해 버리는 모습은

그들이 담배대가 없어서 성질이 급해서. 경제적인 활동이 넘쳐서 그렇다는 이야기인지

묻고 싶다.

하여간 이런 몇몇 가지 사항은 너무 작가 주관적인 사항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 특질을

완전히 깍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자칫 하다간 요새처럼 후손들에게 역사 공부도

학교에서 제대로 시키지 않는 상태에서 이런 작품을 읽게 하였다가 우리 선조들 전부를

무능력하고, 상상력이 부재하며 서로 물어뜯고 난리 치다 섬나라 우수한 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긴 멍청한 조상들이 판을 쳤던 나라라고 자학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그럴땐 어쩔 것인가?

 

우리의 선조들은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창의성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으니 유럽의 어느

나라와 같이 '천지창조''모나리자', '비너스' 등을 만든 그런 나라 조상을 우리의 진정한

선조로 만들고 그들을 떠받들자고 외치고 나오면 또 어떨 것인지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비록 본 작품이 꽤 오래 전에 출간이 된 작품집으로 지금 읽어 보면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치부될 수 있는 여러 주장을 담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바이나,

전체적으로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스쳐 지나가듯 놓치고 있는 우리의 민족적 특질에 대한

분석을 예리하게 하고 있는 작품이라 평하고 싶다.

 

민족애나 자기 주관이 어설픈 사람들이나 외부 평가에 민감한 사람들이 작품을 접하고

섣부른 이해를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민족'이라는 자포자기적 평가를 내릴 수도

있고, 얼마 전 제주도에 가기 위해 일본에서 입국하려다 입국 자체를 거절당한 일본으로

귀화하고 연일 혐한론을 씨부렁 거리는 오 모시깽이 같은 여인에게 이런 작품을 들려주면

우리를 씹어데는 데 아주 좋은 소재를 제공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흰 옷의 유래'에 대하여

조선 민족은 옛날에 태양을 하느님으로 알고 자기네들은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말했는데,

태양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흰 빛을 신성하게 알아서 흰 옷을 자랑삼아 입다가 나중엔

민족의 풍속을 이루고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고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은 전부 흰 빛을 신성하게

알고 또 흰 옷 입기를 좋아하는 이를테면 애급과 바빌론의 풍속이 그것이다.

                                                                                     (조선상식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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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가장 슬픈 약속
리차드 휠러 / 홍익 / 1995년 10월
평점 :
절판


추천 권유도 6

 

인간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 혹은 타인들과 수많은 약속을 하고 또 이를 지키며

살아간다.

약속의 내용이 어떤 것이든, 약속의 상대자가 누구이던 간에 '약속'이라는 단어는, 약속의

주체자들에게 중압감과 함께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책임감을 함께 던져주는

매월 말 받는 일종의 납부 고지서와도 같은 의미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 약속이 갖는 의미

일 것이다.

    

우리는 가끔 각종 언론 매체를 장식했던 십 수 년 전 사춘기적 제자들과 교단에서

선생님의 약속, TV프로에서 방영되고 있는 '20년 전의 약속' 등과 같은 공공의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약속과 개인적으로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작은 약속들, 공공의 약속이라고

해서 가치나 의미가 높은 것이고 나 개인적으로 한 약속이라 하여 의미가 반감되거나 낮은

차원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약속만이 갖는 고유의 특질이 아닌가 생각된다.

 

약속이 약속의 주체자와 상대자에게 던져주는 책임감과 의무감은 공평하다.

부자와 빈자를, 똑똑하거나 못난 사람을, 남자와 여자를 도시인과 비도시인 이 모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지속된다. 또 약속은 약속의 주체자들의 내면적 성향과

인간적 특질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라는 점에서 그 어느 것보다 의미있는 공공의 계약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느 누구하나 지켜보거나 알아주지 않는 절해고도의 고립된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죽어간 이들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주인공의 의지는 약속이 던져주는 의미를

새삼 느끼게 해 주기에 충분하였다.

누가 시켜서도 누가 알아줘서도 아니다. 단지 주인공은 편지를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그를 죽음의 문턱에서 일으켜 세웠던 것이고 사랑하는 약혼녀와의 또 다른

약속이 그를 최종 목적지에 이르게 하였다.

 

인디언에게 끌려가 죽음의 기로에 섰을 때에도 그는 당당했다.

진실은 하늘과 통한다는 생각 속에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당당히 맞선다. 비록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열악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의 약혼녀 역시 그랬다. 자신과의

약속을 하고 떠난 남자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녀는 어려운 항해를 적극 따라 나선

것이며 또 남자가 약속한 강줄기를 찾아 나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약속이 있었기에 가능

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얼마전 - 기억도 가물거리긴 하지만 - 이산가족의 방문으로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또 다시 약속이 지켜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산가족들은 남편이 자전거 사 온다고, 자식이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부인이 친정에 다녀

온다고 나간 후 50년 만에 부둥켜 안고 우는 모습을 본다. 비록 그들의 육신은 약속을 하던

시기의 나이나 외모는 아닐지라도 그들은 극적인 상봉을 통해 나름대로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할 것이며 또 다른 지상에서의 가장 슬픈 약속이라 생각되었다.

팽팽하던 얼굴이, 곱상하던 손등이 이제는 50년 전 사진속의 멈춰버린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로 인해 그네들 가슴에 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것이다.

 

약속!

어떤 약속은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또 지켜줄 상대가 없어 슬프디 슬픈 약속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약속의 상대자는 약속한 상대를 기다릴 수도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회한으로 남지 않도록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의 약속이 되었든 지키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자세로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잔잔한 감동을 던져

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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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 2
정길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7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날 문득 옛사랑의 주인공을 만나 이루지 못했던

옛 사랑의 추억을 메울 수 있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외도를 미화할 수 있는

것이며 배우자에게 그런 자신을 합리화 시킬 수 있는 것일까?

더욱이 자신의 이런 행동을 상대자인 남편 혹은 아내가 이를 묵묵히 지켜보아 주기만을

요구하는 것은 타당한 것인가?

-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부끄러운 그런 범주의 한 인간이다 -

 

우리 모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배우자의 신비로움이 식상함으로 바뀌면서 한번쯤은

화려한 외도를 꿈꾸어 본 적이 있다. - 나만 그런가??? -

그러나 작품에서와 같은 비이성적 행동의 극단으로 치닫지는 아니하는 것이 일반적

가치관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의 평범한 행동이리라. 작품은 그 모든 것의 상식을 뛰어

넘는 행동으로 우리 모두의 애간장을 쓰리게 한다.

주인공은 너무도 아주 너무도 남성 우월적 위치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엄연한

동등한 인격체인 여성을 마치 자기 소유인양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 작품이었다.

작품과 같은 남자들의 화려한 외도(?)가 진행되는 동안 받게 되는 상대의 상처는 누가,

누구에 의해 치유되어야 하는가,

작가의 말처럼 '때리는 사람과 맞는 사람'중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 하는 문제 이전에

왜 때리는 문제가 생겼는지를 또 왜 맞는 문제가 생겼는지를 우리는 정확히 짚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결혼]이란 분명, 가치관 그리고 자라온 환경이 서로 다른 두 남녀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 운명이다.

공동체란 보이는 질서와 예의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 또 상호간의 존경심, 이 모든

긍정적인 단어가 적용되어야 하는 성스러운 장소이다. 비록 공동체의 출발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 공동체가 깨지는 순간까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함이 구성원의

책무라 생각된다.

특히, 이 공동체가 지구상 마지막 낙원이라는 '가정'일 경우는 위의 모든 사항이 더욱

중요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작품 속의 남자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한 아주 치졸한 남자의 전형이었다.

자신의 본분도 자신의 위치도 망각한 아주 전 근대적 남성 우월적 위치에 선 냉혈한

그 자체였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 사랑해서 결혼했을 아내에게, 여자로서 가장 숭고하게 지켜주어야 할 자존심마저

그는 철저히 무시한 것은 물론이고 짓밟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외치고 있다,

'자신만의 사랑을 위해 떠난다고' 미친놈이 아닐 수 없다.

 

작품으로부터 받은 그 뭔가를 써야 하는데 나의 정신과 마음이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부인에게도 문제가 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한마디의 항의다운 항의도, 싸움도 제대로 하지 않는 모습이

정녕 이 여인이 자기의 남편과 사랑을 매개로하여 만난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하는

여러 장면이 나온다.

겉으로는 여자로서 치정에 얽힌 치졸함의 극치를 보이고 싶지 않다고 하는 이유만으로

망설이고 있으나 이는 치졸함과 고상함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권리 찾기의 문제이다.

 

결국 이 부부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보이지 않는 부부간의 벽과 금이 있었던 것으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으며, 여자는 남자의 외도를 통해 이를 현실화시키려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어떻게 자신의 위치가 걸린 문제에 치졸함을 내세워 수수방관으로 일관할 수 있는가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작품 속의 부부가 실존한다면 - 작가의 남편을 모델로 썼다고는 하나 - 나보다 아래인

것으로 보이는데 한마디 충고를 해 주고 싶다.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아내가 가장 사랑스러웠을 때를 생각하고, 아내의 모습에

촌스러움이 묻어져 나오면 화려한 복장으로 가꾸고 데이트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그래도

부인이 못마땅하면 잠자는 아내의 얼굴에 늘어난 주름살의 숫자를 헤아려보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변명의 작가나 병상에 있을 화려한 사랑을 꿈꾸었던 남편이 기회가 되어 나의 이 글을

읽는다면 뭔가를 발견했으면 좋겠다. 서 은묘 당신은 제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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