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윗의 장막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 10주년 기념판
토미 테니 지음, 이상준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4년 7월
평점 :
추천 권유도 9
내가 작품을 읽는 이유를 작품 내용 중 두 곳에서 그 해답을 찾았는데, 하나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일회적 만남도 좋지만 우리가 원하
는 것은 그분의 지속적인 임재이다“
또 한 문구는
“우리들은 매주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을 하며 종교적인 의무감에 가득찬 몸짓만 할
뿐이다. 이런 기계적인 종교 행위들은 언젠가는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하나님이 부으시는 기름이 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의 임재에서만 맛볼 수 있는
기쁨의 기름 없이 스스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면 반드시 ‘기계’에 문제가 생긴다.
인간이 운영하는 종교라는 기계가 멈추면 마침내 모든 것이 멈추게 된다.“
그래서 나는 본 작품을 읽었던 것이다.
인간의 도시 문명을 하나님 나라의 센터로 바꿔놓은 첫 번째 인물이자 탁월한 지도자가 바로 ‘다윗’으로 그의 지도자론을 정의하자면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라고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고 그 주변의 인물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다윗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울왕을 피해 도망자의 삶을 살 때 혼자 도망 다녔다면 힘이 들었을 테지만 다윗 주변에는 400명의 사람이 함께했고 그 후에는 600명이 합류한다. 그 결과 성경 역대상 12장을 보면 다윗과 함께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큰 용사도 나왔고 큰 지도자도 나오게 된다.
- 한 때는 호형호제 하던 사람들이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문제의 정점에 서자 어떻게
하든 자기만 살아보겠다고 어제의 동지를 ‘꼬리자르기식’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어느 위정자를 보면서 인간적인 불쌍함을 느꼈다. 성스런 종교 이야기하는 데 타락
할대로 타락한 어느 속물 인간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 -
연일 짜증만 나게 하는 여러 작태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다윗과 같은 지도자가 나오기를 염원하며 작품을 읽었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CHAPTER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
- 하나님은 최초의 장막인 모세의 장막과 화려한 솔로몬의 장막이 아닌 장막으로서의
조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다윗의 장막’ 재건을 이야기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집’ 즉, 사람들을 강하게 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장막을
원했던 것.
- 오늘날의 기독교는, 하나님이 건물에 감동을 받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하나님은 ‘궁정’이 아닌 ‘열정’을 원하신다. 또한 친밀한 예배에 등을 돌린
열매 없는 교회들로 가득하다.
이 교회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보다 사람의 명성에 가치를 둔 현대판 ‘미갈(다윗
의 아내)’이다
- 하나님의 그 영광 또는 분명한 임재가 가는 곳에는 어디나 승리와 능력과 축복이
있었다. 친밀함은 ‘축복’을 가져오지만 ‘축복’을 구한다고 언제나 친밀해지는 것은
아니다.
- 다윗의 성경상 표현을 보면
1)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혹은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닮은’사람
2)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좇는’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좇는 사람이었다.
- 다윗이 좇은 것은 ‘언약궤’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파란 불꽃’이었다.
그 불꽃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 다윗의 장막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이 된 것은 그곳에서 예배하는 사람들 때문.
- 인간들은 아름다운 성전을 세웠지만 그 안에는 거의 아무도 없다. 불꽃이 없으면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안에 현현의 영광이 없는 것은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친밀감을 갈망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길을 잃고 죽어 가는 세상에 드러나길 원하신다. 다윗의 장막을 하나님이 재건하셔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손이 그들의 예배나 중보기도를 통해 하늘 문을 붙잡고 있기에
너무나 지쳐서 약해져 있기 때문이다.
CHAPTER 2. 잘못된 결승선과 향기로운 손잡이
* 중단하는 것과 놓치는 것 *
- 좋은 예배, 좋은 찬양, 좋은 설교가 아닌 우리는 하나님 그 분을 만나야 한다.
성령님은 다윗과 같이 성령의 강한 임재를 위해 장소를 예비하는 사람이 있는지 찾고
계신다. 예배자들이 손을 높이 들고 천국 문을 열기를 소망하는 장소, 그래서 주님의
영광이 임하여 머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찾고 계신다.
- 주님은 자신의 집 문을 두드리신다. 자신의 연인인 교회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이다.
- 주님의 임재에 대한 열쇠가 우리 손에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 문을 열고 지옥
문을 닫을 권세를 받은 것이다. 열쇠는 우리 손에 있다.
- 교회에 열매가 없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만남에 대한 대가를 지불
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는 왕궁에서 왕 없이 사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오늘날 교회들은 주님의 노크 소리에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투덜
거리기만 한다.
- 우리가 놀라는 때는 하나님이 문을 두드리실 때가 아니라 문을 두드리던 노크 소리가
멈출 때이다.
- 교회는 신랑이신 주님이 완전히 사라져 앞으로 영영 못 만날 것처럼 과거의 만남들만
추억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이 가장 원하시는 것을 드릴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친밀한 예배와 교제이다.
-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긍휼의 샘이 솟게 한다.
- 소경 바디매오와 혈루병을 앓는 여인이 갈망처럼 다가오시는 주님을 놓치지 마라
그들의 절박한 마음에서 믿음을 가졌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존중해 주셨다
“우리가 경배하며 통회하며 부르짖나이다. 우리를 지나치지 마옵소서. 저는 주님을
갈망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에 너무나 매여 있다.
우리는 먹을 것을 달라고 엉엉 우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
즉,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의 시선을 끄는 사람이 되라.
CHAPTER 3. 천국 문을 열라
* 그리고 지옥 문을 닫아라 *
- 진정한 부흥은 ‘부흥을 주시는 분’이 임하실 때 일어난다.
- 기도와 부흥의 영역에서 천국의 창들을 여는 방법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을 터뜨려서 회개와 예배의 물살을 일으키는 것이다. 천국의 창이 열리는 것을
보기 원한다면 먼저 우리 안에 깊은 깨어짐이 있어야 한다. 땅에서 깨어져야 하늘에서
열린다.
- ‘열린 천국’이란 하나님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 기억하라! 지연이 거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끈기가 하늘을 여는데 큰 역할을.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가능케하는 열쇠.
- ‘땀’은 하나님께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땀은 가치를 실물로 바꾸는 수단
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땀’을 요구한다! 실제로 예배는 가치 있는 것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 것은 예배의 일부이다.
- 상황이 변하려면 아버지 하나님을 갈망하며 육체의 땀을 흘려야 한다. 땀 흘릴 때
비로소 영원한 가치가 당신의 가슴에서 하나님의 가슴까지 이동하는 것이다.
-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와 인애를 백성들에게로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희생과
회개의 예배 가운데 값을 지불하고 땀을 흘리는 것임을 알았다.
- 우리가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 가운데 머무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과거에 계셨던
곳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계시를 구하라! 하나님은 식욕이
없는 사람까지 먹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주린 자들을 먹이신다.
-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에 나아가는 길을 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다.
하지만 오시는 길을 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도록 하는 것은 회개의 예배.
- 예배야말로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가 우리 가운데 다가오시도록 하는 핵심요소다.
-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천국의 창들을 여는 다섯 가지 틀림없는 방법이 나온다.
다섯 가지 방법은 모두 예배의 요소들이다.
1) 십일조 2) 고난 3) 인내 4) 연합 5) 예배
- 우리 교회와 도시 위에 하늘 문을 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적이고 지속적으로 연합하는 예배자들이
되는 것이다.
CHAPTER 4. 은혜의 보좌를 세우라
* 심판의 보좌를 세우지 마라 *
* 구약에서 ‘영광’‘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카보드(kabod)'이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무거움’내지 ‘무거운(견디기 어려운) 빛’을 의미한다.
-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랫동안 머무르시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만한
은혜의 보좌를 세워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고 그분이 오셔서 머무르실 수 있도록
만드는 자리는 지상에서 은혜의 보좌 하나뿐이다.
---> 우리가(당신이) 세우면 그분은 오실 것이다.
- 하나님의 현현의 임재의 파란 불꽃은 세속적인 연료로는 태울 수 없다. 그 불꽃은
희생의 예배를 통해서 태우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연료가 될 의향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불이 임하기를 요청할 아무 권리가 없다.
- 인생살이의 망치질은, 우리가 그 인생의 도전들에 바르게 반응하기만 하면, 우리를
하나님 쪽으로 휘어지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의 망치질을 통해서라도 예배의
날개들을 바로 잡아 당신이 ‘범사에 감사하는’사람이 되도록 하신다.
- 예배자들이 은혜의 보좌 주변에 자리를 잡고 설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분의 자리에
앉으셔서 그들 가운데 좌정하신다.
- 예배가 포로된 자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예배’는 하늘로 열린 문이다.
-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그분을 예배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 ‘은혜의 보좌’를 세우는 예배가 되려면 사람에게서 등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 사람의 입구와 하나님의 제단 사이에 있는 불안정한 지대를 ‘눈물 지대’라 일컫는다.
눈물지대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중보기도 하는 자리이다.
-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빛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 사이에 다리가 되도록 하셨다.
가장 위대한 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 중에 중보기도
하도록 부르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만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하나님의 영광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는 ‘은혜’와 ‘진리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그 은혜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함께 붙어 있다.
진리는 우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이 ‘진리’는 감당할 수 없다.
그분의 진리는 그분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소망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사모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갑자기 임하여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면, 하나님의 진리(심판)가 그 은혜를 소멸 시키고 만다.
- 정말 부흥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해 은혜의 보좌를 세우라.
CHAPTER 5. 주의 영광의 빛을 켜라
*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실족하지 마라 *
-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만 진리를 선택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일한 길을 발견할 만큼 충분한 빛을 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
일단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켜는 법을 알게 되면, 그 영적인 빛이 계속 빛나도록
유지하는 법도 알게 된다. 이것을 ‘열린 하늘’이라고 부른다.
-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교회에 있는 우리들 대부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하나님께 ‘하늘 문을 열어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마다 나는 또한 ‘지옥 문을 닫아
주소서’ 라고 기도한다. 예배는 문을 열어 놓는다, 하나님의 영광이 굽이쳐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 놓는다.
- 예수의 보혈은 우리가 ‘옛 사람’의 상태임에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
-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모셔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켜는 것보다 영적전쟁을
치르는 더 좋은 방법은 없다.
- 주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기를 천국의 창들이 당신의 교회와 도시 위에 활짝 열릴
때까지 하라. 주님을 예배하기를 주님의 영광의 빛이 당신 위에 임하기까지 하라.
CHAPTER 6. 절름발이(?)가 아닌 그 누구도 신뢰하지 마라
*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하라 *
- 우리가 회개를 통해 자신의 육체를 죽인다면 한때 우리를 증오했던 사람들도 우리를
새롭게 보게 될 것이다.(야곱과 에서)
-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며 ‘주님 제 안에 뭔가가 일어나서 완전히 변화되기
전까지 당신을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면
내 안에 있는 무언인가가 죽고 더 나은 삶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얼마나 자주 교회에 와서 간구의 기도를 하며 이것저것을 구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물으신다. ‘여기 오직 나만 원하는 사람은 없니?’
가장 높은 차원의 예배는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이다.
주의 얼굴은 주의 은혜를 의미한다.
- 우리가 그분의 얼굴만을 구할 때, 우리의 예배는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이기적인
섬김이 아니라 그분께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섬김이 될 것이다. ‘나를 축복해 달라’는
간구는 ‘주님을 송축하리라’는 고백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얻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열망하기 때문에 다 내어드리는 것이다.
- 하나님은 진정한 예배자를 찾으신다.
‘선물들(gifts)'보다 ’선물을 주시는 분(Givers)'을 사모하는 자를 찾으신다.
- 우리는 실패감을 느끼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실패감은 거룩한 실패감
이라는 것을 깨달으라. 마치 어떤 굶주림은 영적인 굶주림인 것처럼 어떤 실패감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행사하시기 위해서 심으시는 것이다.
- 육체가 죽을 때 미래의 소망이 살아난다. 당신의 프로그램이 죽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목적이 살아날 수 있다
CHAPTER 7. 영적 집착인가 영적 친밀함인가?
* 구경인가 만남인가 *
- 우리는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법은 배웠지만 하나님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법은
모른다
- 예수님은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여기셨다.
모든 사역 가운데 예수님의 유일한 초점은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 우리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기술을 익히고 완성시키느라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기술을 잃어버렸다.
- 하나님의 기름 부음은 우리 영혼의 주림만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기름 부음과 기름 부음을 통해 강해진 은사들은 단지 우리를 돕고 힘주고 격려해서
기름 부음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지만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의 깊은 갈망을
만족시키신다.
-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의 영광으로부터 시선과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손에 있는
기름 부음에만 집착하고 있다. 강대상 주위와 앞 줄에만 앉으려는 게 증거다.
- 사람들은 기름 부음에만 집착하게 되면 가장 강력한 기름 부음조차도 싸구려 감동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사역자가 기름 부음에 대해 무절제한 욕심을 부리면 성도들도
기름 부음 가운데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켜서 사역자나 성도 모두 강한 영적
집착을 보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되는 책임을 짊어지기보다
다른 사람이 경험한 친밀감을 구경하면서 전율을 느끼고 싶어 한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책임감 있는 관계야말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감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채널이다.
-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실한 관계는
외면한 채 영적인 ‘구경꾼’에 머물고 말게 된다.
- 사역자들이 기름 부음에만 집착하나 하나님은 그의 은사를 제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파산된 사역자들이 하나님과의 첫사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삶이 회중 앞에서의 기름 부음을 따라가지 못함을 알면서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 서기 원하기 때문이다.
- 교회는 사람들의 칭찬이 기름 부음의 진정한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좇아감으로써 기음 부음을 곡해하고 변질시켰다.
- 주님의 얼굴을 구하려면 당신의 체면을 포기하라. 주님의 신성을 사모하려면 당신의
명성을 내려놓으라. 주님은 자신의 체면을 포기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체면을 유지하려 애쓴다.
-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간직하는 것’이다. 중요한 분은 주님이시다.
중심되는 그리스도이시다.
- ‘기름을 붓다’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131번, 신약에서는 18번 나온다.
신약에서 기름 부음은 몇 가지 다른 의미들을 갖고 있다.
1)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이자 거룩한 제물로 그분의 사역과 죽음과 장사를
구별하는 의미(막 14:8, 눅 7:46)
2) 사람에게 능력을 주어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만드는 의미 또는 왕이
하나님의 권세로 다스리도록 하는 의미(눅 4:18, 행 10:38)
3)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증을 의미(고후 1:21)
4)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어 치유와 구원을 이룬다. 하나님의 힘을 어느 정도 빌려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다시금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막 6:13, 약 5:14~15)
5)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의와 사역에 전적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구별하고 축복하는 의미(히 1:9)
6) 사도 요한의 서신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안에 거하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은사를 의미(요일 2:27)
-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하나님의 기름을 성별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육체 위에 함부로 붓고 있다.
- 기름 부음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을 거룩한 연합 가운데 만나게 하기 위함이다.
-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 가운데 들어가기 원한다면 우리는 회개라는 문을 통과
해라.
- 교회는 더 이상 회개하라고 지시하면 안 된다. 우리는 회개를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회개를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CHAPTER 8. 그날 천상에서는 음악이 멈췄다
* 음악이 회복될 날이 올 것이다 *
- 하나님께서는 설교보다 예배가 더 중요하다. 예배는 하늘의 신선한 빵을 담을 수 있는
광주리나 그릇을 만들기 때문이다. 은혜의 보좌를 세우고 나면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보좌를 세우는 것이 예배다.
-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닌 교회가 우리에게 주는 것을 가지고 교회를
평가한다. 그 결과 우리는 교회를 이기적인 기업으로 전락시켰다.
- 천국에는 목사들이 없다. 왜냐면 천국의 ‘업무 지침’에는 예배자의 것 밖에 없기 때문
- 모든 보물 가운데 으뜸은 ‘예배자’이다. 예배는 모든 창조 세계 가운데 단 한 가지
출처에서만 나오기 때문인데 이 출처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 기술적인 완벽함으로 사람들의 칭찬 정도는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굳은 심령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기름 부음과 영광뿐이다.
- 우리가 드리는 찬양이 천상의 기준으로는 보잘것 없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는 더 없이 소중하다.
-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 예배만이 하나님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모실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예배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을 세우기 위한 건축자재이다.
CHAPTER 9. 보좌의 영역을 확대하라라
*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
-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실 때 그것이 너무나 커서 우리가 그 규모나 차원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을 하기 원하신다.
- 근본적인 역사는 하나님이 일으키신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임재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려움에 처할 것이다. 오로지 강대상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만을 구해야 한다.
마침내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터져 나올 때까지.
- 교회의 근복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만남의 장소가 되는 것이었다.
교회는 당신이 하나님께 당신 자신을 드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기도문을 암송하고 심지어는 기도에 통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대하’에서 말한 대로 ‘내 얼굴을 구하라’눈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기도는 도움을
청하는 방 안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보좌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부르며, 하나님의 임재는 다른 모든 것을 몰아낸다.
- 우리는 하나님께서 휘장 사이로 손을 내밀어 복음의 사탕을 나눠 주시는 정도에 만족
하지 말고 휘장이 열리고 지성소까지 나아가 인생을 뒤바꿔놓은 하나님과의 대면을
원한다.
- 기도하고, 회개하고, 중보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라. 하늘에 작은 구멍이 나고 하나님
께서 영광의 빛의 스위치를 켜시기까지 그렇게 하라. 그러면 사탄의 세력은 사방으로
도망간다.
-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하나님,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기도하며 외치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이내 하늘의 수문이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 당신이 하나님의 연료 즉, 무리를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자신을 불태울 연료가 될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불을 구할 자격이 없다.
- 영광은 배부른 그릇에 임할 수 없다. 우리는 주님을 더욱 구하고 자신을 덜 구해야
한다. 우리는 ‘자아’라는 컵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그래야만 주님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
CHAPTER 10. 문지기의 감춰진 힘을 발견하라
* 제자리에 서라 *
- 문제를 해결하기 쉬운 방법은 ‘좋은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최선’이란 하나님의
영광의 홍수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인내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대신 하나님이 허락
하신 ‘좋은 것’(기름 부음)이 마치 ‘최선의 것’(분명한 하나님의 영광)인 양 제시한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나 기름 부음을 구하지 말고 ‘기름 부으시는 분’을 구하라
- 하나님 나라의 열쇠가 어딘가에 놓여 있다. 누군가는 그 열쇠를 찾아서 문을 열어
젖혀야 한다.
- 당신은 문지기가 되어 문을 열라. 하늘의 빛이 당신의 교회와 도시 위에 비칠 수
있도록
- 교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당신과 나를 섬기려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모든 것 위에 계신 주님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주님과 대면하면, 즉 우리 손을 휘장 사이로 찔러 넣어 하늘 문을 열면, 우리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하늘 문을 계속 열고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
- 예배를 통해 천국의 창들을 열 때, 그 창들을 계속 열어 두려면 그 예배 가운데
지킴이를 세워야 한다. 지킴이는 문지기다.
다윗 시대에 레위인 예배자들은 끊임없는 예배와 찬양으로 언약궤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열려 있는 하늘의 유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그 문에 서서 문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열린 하늘’이란 사람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자유로이 접근하는 것과 사람의 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자유로이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 문지기들이 얻는 부수적인 유익은 하나님의 임재가 각 나라로 흘러들어 갈 때 문지기
자신들도 하나님과 대면하게 된다.
- 교회는 하나님과 온 세상이 대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통로이다.
당신이 예배의 자리에 설 때, 당신은 말 그대로 영적인 문, 즉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통로를 활짝 연 것이다.
- 사람 지향적이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결정들은 교회를 영적 파산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천국의 창들을 닫아버리고 있다. 우리는 단 한 가지만을 좇겠다고 작정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원해야 한다.
- 당신의 손 안에 열쇠가 있다. 예수님이 열쇠를 베드로의 손에 넘겨주신 이래로 그
열쇠는 성령에 의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에 감춰져 계신다. 왜냐하면 교회가 제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까지는 거리 곳곳에 나타나실 수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모셔 들이게 되면 그분의 임재에 사로잡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 안에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면 당신의 인생은 하나님의 임재의 걸어 다니는 창이 될 것이다. 영혼이 갈급한 사람들에 의해 언제나 열려지게 되는 창이 될 것이다.
작품을 2회에 걸쳐 연속으로 읽었다.
나를 돌아보게하는 문구가 여기저기 너무도 많아 일일이 이를 다 기록할 수 없었기에
연속해 2회에 걸쳐 읽게 된 것이다. 그 중에 나를 돌아보게 만든 무구는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마치 할인매장에 가는 것처럼 갈 때가 많다.
마치 우리는 간구의 기도를 하며 무슨 천상에서의 ‘파란 불꽃 특가 판매’코너를 발견한
사람들처럼 길게 줄을 서곤 한다. 그리고 ‘나를 축복해 주세요’ 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응답해 달라고 기도한다. 당신은 당신이 뭘 원하는지 잘
안다. 하지만 진정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 문구를 접하면서 - 이 문구말고도 곳곳에 나를 반성하게 하는 문구로 가득하였다 -
나는 하늘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럼을 느꼈다.
나를 더 힘들게 한 문구는
“우리는 경배와 사랑으로 주님을 붙들고 구하고 찬양하는 대신, 의식과 일정과 식사
약속에 매여 성령을 근심케 하고 있는데 이런 슬픔 시나리오가 매주 반복되고 있다.“
바로 나를 지칭하는 이야기였다.
어찌되었던 나는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릇된 종교인이 되지 않기 위해 또 정말로
하나님이 기다리며 하나님의 얼굴만 바라보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고자 노력에 노력을 거듭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