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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의 역사 2 - 르네상스
에두아르트 푹스 지음, 이기웅 외 옮김 / 까치 / 2001년 3월
평점 :
추천 권유도 7
이번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성(性)과 사랑,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어
어렴풋하게 알던 당시의 생활상에 대해 의구심이 일부 해소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궁금한 점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우리가 쉽게 알지 못했던 낙태 이야기, 임신방지 약을 비롯한 마녀사냥과 관련된 이야기,
중세 유럽에서 독일이란 나라가 어떤 역할을 했으며 수도원 설립 이유에 대한 유추 근거와
수도사들의 독신 생활방식의 이유를 비롯한 수도원이 어떤 이유로 힘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여러 저자의 주장이 약간의 합리성을 갖고 전개되고 있는 작품으로 중세유럽의 여러 측면을 쉽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르네상스의 육체미의 이상]
- 르네상스 시대와 같은 창조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에로틱한 관능으로 충만된다.
즉, 에로틱한 관능이라는 것은 창조적인 것을 육체를 통하여 드러내는 것이다.(P 9)
- 중세의 세계관은 하늘의 영혼을 가장 높은 관념, 나아가서는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까지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영혼을 둘러싼 육체라는 외피는 관념의 천박한 부속품으로까지 전락
시켜버렸다. 요컨대 그러한 육체라는 외피는 항상 영혼의 궁극적인 목적을 방행하는
존재였다.(P 11)
- 르네상스는 하늘을 지상으로 끌어내림으로써 만물로부터 신비성을 박탈했다.(P 13)
- 시대는 항상 하나의 숭배물을 내세운다. 르네상스 시대는 육체로서의 인간을 내세움으로써
그 시대 전체를 통하여 그것은 도처에서 최대의 예찬을 받았다. 육체로서의 인간은 르네상스
시대에 인생의 지고의 의미를 지녔다.(P 24)
- 르네상스 시대에는 여성의 개인적인 요구를 아주 명확한 형태로 일반 법칙화했으며 복장에서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P 38)
그의 상징적 표현으로 유방을 형상화한 분수 조각상들이 15~6세기에 광범위하게 유행했다.
(P 40) 또한 아름다운 유방은 그 시대 최고의 경이였다.(P 53)
- 르네상스 시대에 위대한 그림에 임신한 여성이 많이 등장한 것은 결국 창조적인 것을 특별히
그리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선호되었기 때문이며 더욱이 그 시대의 모든 것이 이미 무의식적
으로 특별히 창조적인 것을 그리는 방향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서 수태한 여성은 확실히 창조적인 존재의 상징이며, 아이를 가진 성숙은 창조적인
것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다.(P 42)
- 육체를 관능적으로 이상화했기 때문에 어느덧 육체에 대해서 한없이 절도 없는 예찬만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P 61) 따라서 아내의 육체의 훌륭함이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든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 시대의 매우 인기 있는 화제였고 아내의 비밀스런 육체의 미를 전시하는
것이 당시에 흔한 풍속이었다.(P 62 ~ 64)
- 시대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은 언제나 의상에 반영되며 또한 그러한 이상은 시대의 모든
의상의 토대를 형성한다. 의상이란 이른바 일상생활의 실천에서 시대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이 전이된 형태이다. 의복의 장식 목적이 주로 육체에 에로틱한 자극을 강하게하는데
있기 때문에 에로티시즘의 문제에도 속한다.
또 복장이란 여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구애의 수단이었다.(P 68)
- 르네상스 시대에는 ‘알몸의 여자는 보랏빛 옷을 걸친 여자보다도 더 아름답다’는 의견이 신봉
되었기 때문에 나체로 돌아다닐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여성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으로 간주되는
유방의 노출이 죄악으로 치부되기 보다는 모든 여성이 가장 높이 평가했던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의 일부였다.(P 73)
- 유행복은 계급구별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복장의 품위는 상의의 목둘레 선이 깊게 파임에
따라서 그만큼 높아졌고 한편으로는 노출된 유방이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이 되었다(P 83)
- 강렬한 흉부 노출과 그에 따른 복장의 사치는 1560년데부터 수십 년에 걸쳐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세계적인 불황 때문이었다.(P 85)
[연애와 결혼]
- 15, 6세기에 기사계급의 경우 재산상태에 따라 여자가 점차 가사로부터 해방되고 여자의 지적
수준도 확장되며 강렬한 자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기사계급에서 과학 및 일반교양부문에서
남자와 경쟁하려고 하는 여자, 즉 비라고(VIRAGO, 이탈리아어로 ‘여장부’)가 나타나게 되었다.
(P107)
- 여자는 처녀성을 잃으면 그 이전에 비해서 머리가 나빠진다고 생각하여 여자는 결혼 전에
이 고귀한 것을 빼앗아 간 남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었다.(P151)
- 당시 그런 사회적 풍습에 맞추어 처녀막을 인공적으로 만들어주는 사업, 낙태술이 은밀히
성행하였다(P158~163)
- 중세의 인구는 교회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점점 더 정체되는 현상을 나타냈다.
그 이유는 교회 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수도원이 늘어나고 결혼의 어려움 때문에
부득이 수도원에 들어가는 사람의 숫자가 점차 증가했기 때문이다.(P198)
- 중세 당시의 결혼이라는 것은 오늘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자들에게 둘도 없는
취직자리였다. 그 이유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P203)
- 중세의 독일은 수백 년 동안 세계 도처에 용병부대에 무진장 인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독일은 정치적인 혼란으로 경제적인 동요가 그 어느 나라보다
심했기 때문으로 그 결과 각국의 용병 부대는 거의 독일인들로 채워져 있었다.(P247)
- 인간에게 있어 연애라는 동물적인 소비형태, 즉 연애의 기술적인 행위만을 몇 배로 할 수 있지,
그것을 여러 개인에게 분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결국 연애는 향락이 되어 버린다.(P251)
- ‘탕음’은 자기의 쾌락을 위한 목적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선 다른 여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유력한 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에 귀족계급은 자기들의 딸들만이 국왕과 침대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그들 계급의 세습적인 특권이라고 생각했다.(P264)
- 절대주의가 지배하는 곳은 자연히, 또 예외 없이 도덕적인 타락과 윤리적인 죄악의
아성이 되고는 했다.(P266)
- 부인에게 ‘정조대’를 강요했던 계급은 유산 지배계급 즉 상인들이었던 대부르주아 계급과
절대군주 계급이었다. (P273)
웃기게도 정조대가 만들어진 시대에는 바로 또다른 여벌의 열쇠도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
으로 부정을 단속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했으며 자물쇠 달린 정조대가 오히려 부정을 더욱
만연시켰다.(P280)
[가톨릭 교회의 도덕]
-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의 본산은 현실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뿐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야
말로 진실로 모든 계급의 전반적 생활영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회조직이었다.(P283)
- 독일 국민이 교황의 지배라는 쇠사슬을 끊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종교개혁 운동의
원인은 바로 경제적 이해관계였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당시의 사람들은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의 철면피한 경제적 수탈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어난 경제투쟁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인식하고 있었다.(P284)
- 당시의 수도원은 유럽 최초의 문명발생지이자 최초의 문명 전파지였으며 중세 과학의 유일한
산실이었다. 이런 여러 이유로 인해 수도원은 그 지배력이 공고하게 되었던 것이지 신실한
기도와 찬송가 덕분은 아니었다.(P289)
* 수도사와 수녀의 독신생활(P290~292)
- 수도사와 수녀의 독신생활은 결코 인간 정신의 길잃음에서 비롯된 우연적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였다.
- ‘수도원의 기원’을 고찰해 보면,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으나 대다수 수도원들의 시초가 빈민들의 단결로부터 비롯 되었다.
빈민들이 각기 뿔뿔이 흩어져 살기보다는 함께 모여 서로 단결해 사는 쪽이 물질 생활면에서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개의 수도원은 수공업을 자신들의 생활방편으로 삼았다.
따라서 수도원은 하나의 경제조직으로서 ‘그들의 시대적 사회문제를 제한된 범위에서만
동료들끼리 힘을 모아 한정된 세계를 위해 해결하고자 시도한’ 결과 나타난 산물이다.
-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종교라는 허울을 쓰고 등장한 이 조직의 발흥은 그 시대적상황이
원인이었고 또한 원시 기독교가 고대세계의 경제질서를 거부하고 공산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는 사실 가운데 그 원인이 있었다.
그러한 조직은 ‘프롤레타리아의 양산과 그에 따른 공산주의적 조직에 대한 요구’를 점증시켰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수도원의 토대였다.
- 수도원이 유지, 발전하기 위해서는 모든 생산수단과 소비수단을 공유하는 제도를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사회적 빈곤으로부터 탈출이 시급했던 수도원의 구성원들은 공동체
유지 발전을 위한 사유재산제의 포기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P291)
- 독신제도는 경제적 조건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수도사와 수녀들은 동거는 허용되었으나
가족이라는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 당시 어느 경제조직들과 비교해고 경제적으로 우월했기 때문에 곧 수도원은 결국 권력과 부를
장악할 수 있었으며 점차 생산단체로부터 수탈단체로 변질되어 갔다.
- 수도원에서 나온 잉여생산물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무한정 보관할 수 없었기에 신속한
처분을 위해 베품의 형태를 띄기도 하지만 결국 ‘화폐’가 등장하면서 잉여생산물을 화폐형태로
축적할 수 있게 되면서 수도원의 자선행위는 점차 인색해져 갔다.
- 수도원의 독점력이 증가되면서 처움 빈민들을 위한 단체가 아닌 재산을 기부하는 사람, 교단에
물질적 이득을 주는 신자들 유치에 몰두하게 되고, 심지어는 결혼을 하지 못하는 딸이나 차남을
맡기는 양육원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 이유는 장남이 아닌 자식에게 재산을 분배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그러했던 것이다.
- 수도원에서 부의 축적은 바로 '독신제도' 덕분이었다. 사제가 아내를 두는 것은 교황청의
수입원과 권력행사의 범위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P301~302)
- 교황의 정치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세속을 멀리한 수도단체로서 처신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단계에 따라 정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모든 기독교도 위에 군림한 최고의 권력자였다.(P322)
- 중세말기와 르네상스 사대의 많은 수도원들은 결코 정진과 금욕과 기도로 충만한 신성한
장소가 아니었다.(P329)
[유곽]
- 중세 당시에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도제의 결혼이 금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평생 자신의 성욕을
결혼이외의 방법으로 밖에는 해소할 수 없어 ‘매춘’이 성행했다.(P337)
- 로마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수만 명에 달하는 가톨릭 성직자가 해마다 로마로 왔으며
가톨릭의 본산 로마에 체재했는데, 성직자 중에는 여성도 있었으며 이들은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연애에 나섰다고 한다.(P343)
- 매춘부를 고용한 유곽에 대한 세금징수는 해당 군주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하였으며 축제 때
매춘부들의 역할은 경기를 부양시킬 정도로 경기 순선환구조의 선봉에 있었다.
또한 프로 매춘부들도 나오게 되었으며 당시 모든 미술 전문가들이 열중했던 소재가
바로 ‘매춘부’들이었다.
- 세상 사람들의 품행이 방정해지면서 매춘은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데 직접적인 원인은
‘경기불황’과 함께 ‘매독’의 창궐이었다.
[사교생활]
- 르네상스 시대에는 욕탕생활이 최고의 향락이었기 때문에 온천장은 당시 사교생활의
중심이 되었다.(P444)
- 공동 목욕탕의 쇠퇴 역시 ‘경기불황’과 ‘매독’ 때문이었다.(P453)
- ‘사육제’는 교회헌당 축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에서 대단히 중요한 민족축제로 사육제의 중심
내용은 고대 그리스의 축제의 연속으로서 결국 육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회에 지나지 않았다
(P474)
[병든 관능]
- 1490년부터 1650년에 걸친 시대는 ‘마녀재판’이 대단한 세력을 떨쳤던 시대로 당시
마녀재판이 광기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가톨릭 교회의 일반적인 태도로 교회는 악마로 대변되는 악을 이용하여 노인을 이용하고
무서운 그림이나 연극을 통해 교회의 이익이 되는 논리를 사람들의 뇌리에 심었다.
15 ~ 17세기에는 악마문학이 무섭게 유행하던 시기다.
둘째는 악마를 영혼의 사냥개로 만들므로해서 교회가 얻는 이득이 컸다.
특히, 새로운 경제제도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시대는 사람들 앞에 대중빈곤의 공포와 전율을
가져다주었다.(P502)
- 르네상스 시대는 인간사회의 복잡함만으로 인해서 파멸한 것이 아니라 발전단계의 어느시점
에서 반드시 파멸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이 있었다.
13세기와 14세기에 나타났던 시대적 희망은 15세기 말경부터는 도처에서 비참한 환멸로
변하고 있었다.(P503)
- 시대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엄습하는 절망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너도나도 미신에 빠져들었으며 이 현상은 15세기 말경부터 대중적인 현상으로 등장한
악마숭배와 유행병적인 마녀소동의 역사적 배경이다.(P505)
- 왜 여자인 마녀만 있고, 남자 마녀는 없는가?
이는 고대 게르만 여성의 종교적 지위로부터 왔을 것으로 추측. 즉 독일에서 여성은
언제나 신의 권력과 동맹하고 있는 여제사장이었다.
마녀는 어떤 의미에서는 게르만적 여제사장의 후예였던 것이다.
또한 여성을 조직적으로 멸시하는 태도에 기인한다.(P506)
끊임없이 남자를 충동질하는 여자의 욕망이 남자의 공상 가운데서 여자를 악마로
만들었고 은밀한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바로 남성의
시대였기 때문이다.(P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