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징비록 [체험판]
배상열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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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국난에서 얻은 귀중한 경험을 후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나아가

더 이상 나라와 민족을 힘들게 하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로 비장하게 작성된

징비록(懲毖錄)‘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과 정황에 맞추어 분석한 작품이다.

저자는 해당 작품을 통해 여러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을 것이지만 아마도 이 글을 읽는 후손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의 역사를 보면 인재(人災)에 가까운 사고들이 계속 반복되는 까닭은 과거를 기억만 할 뿐

그에 대한 진정한 후회와 본질적인 반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는 한 문장이었을 것이고 우리의 선조들이 저지른 과오를 자꾸 되풀이하려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했을 것이다.

작품 제목 속 징비(懲毖)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候患),

, 지난 일을 경계해 뒷날의 근심거리를 삼가게 한다는 문구에서 나온 것으로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기억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요, 실수였던

1592년 임진왜란과 1950년의 한국전쟁의 공통점을 대비하면서 지도자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는데, 우리 역사에서 씻울 수 없는 상처를 찾아보면 무수히 많을 것이지만 여기서는 이 두

사건(전쟁)만을 예로 들어 당시의 지도자의 한심한 작태를 힐난하며 기술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7년이나 진행된 임진왜란(일본명 분로쿠 게이초노에키)은 일본인들 조차도

자신들의 역사에서 첫 번째 침략전쟁이었음에도 전쟁이 일어난 이유를 모르고 있다고 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너뜨리고 막부를 세운 도꾸가와 이에야스

전임자가 일으킨 전쟁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발뺌하였다는 대목에서 역시 사악한 일본인다운

대처법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이었음을 밝혀둔다.

 

작품을 통해 한 가지 소득이 있었다면

명과 일본이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강화 협상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기패에 대한

예우 문제를 갖고 명나라가 권위를 내세우며 조선에 고두례를 강요하려 할 때 항명하는

류성룡 선생의 기백 있는 행동을 접할 수 있었던 점이었다..

(상세한 것은 작품을 사서 읽어 보시는 게 좋을 듯하다고 생각함)

 

그 내용을 접하며 든 생각을 통해 작금의 우리 상황에 대한 것을 지적해 본다면,

오늘도 한미 연합훈련을 하지 말라는 식의 중국의 외교부장이라는 작자가 한마디 한 모양이다.

우리가 홍콩과 티벳 문제 등을 거론하면 내정 간섭이라고 난리치면서 우리가 우리의 자위권을

강화하기 위해 훈련을 하겠다는 데 내정 간섭성 발언을 아무 꺼리김 없이 하고 있음에도 이를

반박하는 우리의 위정자들은 한 명도 없다.

또 독도를 24시간 비추는 CCTV 방송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일본에 대해서는 의례적인 항의로,

우리의 통수권자를 성적으로 비하할 때도 역시 제대로 된 항의조차도 못하고 그냥 방관하였고

작년에 일어난 수출 금지조치에 대항해 또 도쿄 올림픽 지도 표기 문제를 보면서 우리가 평창

올림픽 때 그들에게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를 까맣게 잊었는지 우리의 위정자들은 조용히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어물쩡 넘어가고 있다.

정부와 위정자들은 완전히 국민을 졸로 알고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이런 물러터진 대응은 추후 분명한 댓가를 우리 후손들이 받게 될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전임 대통령이 투자한 결과는 후임 대통령이 과실을 따 먹듯이 지금의 통치자가

행한 결과는 후대에 그 영향이 나타날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지금과 같이 물러터진

국제문제 대응은 반드시 후일 그 댓가를 톡톡히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데도 우리 위정자

누구도 류성룡 선생이 명나라 기패에 대해 기백 있게 한 행동과도 같은 행동을 보이지 않고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긴 시간 베트남이라는 곳에서 살지는 않아 그들의 속사정에 대해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베트남인들은 중국이 자국에 대해 이상한 짓거리를 조금이라도 하면 눈하나 깜짝 안하고 중국에

대해 대 놓고 대거리를 한다.

그런 배짱이 있기에 중국은 연약한 약소국(?)인 베트남을 쉽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모르는

모양이다. 지금 중국에 대해, 일본에 대해 어렵고 힘든 대응을 하게 되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다소 힘든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작은 일이라도 단단히 손을 보았으면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후손들 보기에 창피하지 않게 제발 쫄지 좀 말자.

 

- 1589기축옥사가 정리될 무렵 조선과 국교 정상화를 희망한 일본은 국내를 평정한

  도요토미에 의해 쓰시마의 소 요시토시를 조선에 파견하자 선조에 의해 동인이 철저하게

  몰락한 당시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류성룡은 일본의 심상치 않은 상황

  직감하고 동태 파악을 위한 통신사 파견을 주장해 1590년 통신사가 출발.

  * 막대한 비용을 감내하며 통신사를 불러들인 이유는 조선의 우월한 문화를 이용해 막부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 통신사가 귀환한 다음 일본의 침공 가능성이 심도 있게 논의되었으나 정사(황윤길, 서인)

  부사(김성일, 동인)의 보고 내용이 완전히 달랐는데 서장관으로 함께 갔었던 허성의 의견은

  어떤 확실한 의견도 없는 상태였다.

  서인들에 의해 주도 기록된 선조수정실록에는 자신들의 선배인 황윤길100% 전쟁을

  주장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의문이다.

 

- 당시 조선은 백성들이 어떻게 하든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풍조와 사람을 사서 대신 병역을 

  이행하게 하는 중앙군의 대립제, 입영 기간보다 빨리 보내주는 대신 댓가를 바치는 방수

  군포제로 인해 상당히 혼란스런 상태인데다, 이 모든 제도는 백성의 고혈을 짜내 탐관오리의

  배를 불리는 악제로 전락한 상태였다. 실전에서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유사시 지방의 병력들이

  미리 지정된 지역으로 집결한 다음 중앙에서 파견된 지휘관에게 지휘를 받는 전략적 제도)으로

  대응했지만 고질적으로 병력이 부족해 심각한 상태였음.

  * 당초 조선의 군사 전략은 진관제(鎭管制)’였으나 왜구와의 전투에서 여러 문제점을 노출하여

    이를 바꾸었음


- 고니시 유키나카(1)와 가토 기요마사(2), 구로다 나가마사(3)이 이끄는 대군이

  명나라에 가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굳이 너희들과 싸울 생각이 없으니 길을 열라는 협박성

   요구를 앞세워 침공한다. 동래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전즉전의 부전즉가아도(戰卽戰矣 不戰卽

   假我道,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라고 하자 이에 대해 송상현

   장군은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싸우다가 죽기는 쉽지만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는 글로

   대응하지만 일본군의 파죽지세 공세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다.

   그 이유는 조선 특유의 시스템인 제승방략 전술로 인한 것으로 지역을 지키는 무관들은 

   지휘 체계에 의한 명령 없이는 독단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는 바녁을 통해

   보위를 찬탈한 세조 이후 조선은 지방 병력이 임의로 이동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신립 장군이 고군분투하다 전사한 탄금대 전투는 반드시 지켜야 할 새재를 포기하고 주력인

  기병을 활용하기 곤란 곳에 진을 치고 응전했기 때문이지만 그 보다 패전의 본질적인 이유는

  정치인들에게 있었다.

  세종 이후 여진족과 왜구들에게 계속 당하면서도 저녁이 증강되지 못한 책임은 위정자들이

  져야 마땅하다. 신립을 위시한 지휘관들이 충분한 병력과 보급을 지원받지 못하고 기본적인

  전투 정보조차 갖추지 못한 것 역시 당시 위정자들에게 원인이 있다.

 

- 왜란이 발발하자 통신사로 다녀와 전쟁 발생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한 김성일이 좌천성 인사로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는 도중에 선조는 그를 크게 질책하려 하였지만 주변에서 만류하며 전쟁에

  임하게 한 결과 초유사로 활약하게 된다. 왜란을 그의 잘못에 기인한 전쟁이라기 보다는

  조선이 인근 국가에 대한 정보가 극히 미약해 벌어진 일로 보는 게 맞다 할 것이다.

  어찌 되었던 김성일의 노력 덕택에 조선은 절망적인 초기 전황에서 반격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 선조는 도성을 방어한다는 구실로 백성들을 불러들인 뒤 나가지도 못하게 한 뒤 430일 

   야반 도주를 한다.(베트남이 월맹군에 의해 점령된 날도 430일이다)

   53일 궁에 입성한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당연히 궁에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조선의

   왕이 도망쳐 버린 사실로 인해 혼란에 빠진다. 이런 왕실에 대한 불신은 함경도 쪽으로 피난

   와서도 끝임없이 민폐를 끼치는 임해군을 비롯한 왕실들과 종친들을 붙잡아 일본에 넘기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 예상외의 속도로 점령 당한 조선으로 인해 히데요시는 혼란에 빠진다.

  그 이유는 히대요시는 일본을 통일하고 지배자의 반열에 오르기는 했지만 쇼균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두려운 존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꼽고 있었는데,

  조선과 전쟁을 벌이면 이에야스를 투입시킬 명분도 생기면서 이에야스를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을 수 있게 하여 그의 힘을 뺄 수 있다고 판단하였는데, 일본의 침공을 어느 정도 방어

  하며 전쟁을 소모전으로 만들어야 할 조선이 일순간에 무너지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투이할 

  시기를 잡지 못하게 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 임진왜란에서 전쟁의 전황을 반전시킨 일본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두 개 있었는데

  그것은 이순신 장군의 존재와 의병의 존재였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아니었으면 일본군은

  서해를 북상했을 것이며, 조선이 질식당하는 것은 물론 명까지 위험했을 것이다.

  ’의병의 출현도 역시 곡창지대였던 전라도 지역을 방어하는 것을 필두로 수많은 곳에서의

  전투로 일본군의 북진을 상당히 저지시키는 역할을 했는데 특히 조선의 의병은 일본인들 

  이해의 범주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의병들은 철저하게 외면 당했는데 임진왜란이 종료된 후

  행해진 논공행상에서 의병장이었던 곽재우조차도 포상되지 못했던 것은 물론 심지어 역모의

  혐의를 씌워 죽여 버리는 일까지도 벌어지고는 했다.

  (경상도에 곽재우가 있으면 전라도에는 김덕령이 있다고 할 정도였으나 반역을 도모했다는

   누명을 씌워 의병장 김덕령과 고언백을 제거한다.한마디로 선조는 미쳤었다)

 

- 조선이 일본의 침공으로 너무도 속절없이 무너지자 명나라는 전쟁 초기, 조선과 일본이 서로

  짜고 전쟁을 통해 명을 침공할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이 유린 당할 때

  선조는 잇달아 명에 사신을 보내 망명을 애걸하지만 명의 반응은 싸늘했다고 한다.

  조선도, 선조도 명으로서는 다 믿지 못하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정권이 위태롭던 명은 본국 철수가 다급한 일본과 전쟁을 끝내기 위한 강화 회담을 벌이지만

  류성룡은 강경 일변도로 나간다.

  특히, 강화 회담장에 비치된 명의 황제를 상징하는 기패에 대해 조선의 왕이라도 절을 해야

  하는데 류성룡은

  ’기패에 고두례를 올리는 것은 감히 사양할 수 없으나 이것은 단지 적중으로 가는 기패인데

  우리들이 어떻게 먼저 고두례를 올릴 수 있단 말인가 또 우리는 왜적과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강화를 허락할 리가 없으니 더욱 고두례를 올리라는 명을 받을 수 없다

  며 죽음을 각오하고 극력 반대한다.

 

- 명은 일본에 히데요시를 왕으로 임명하는 책봉사를 파견하지만 일본은 이를 받아들일 의사가

  젼혀 없었고 명에 의해 자신이 왕에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전쟁을 끝낼 의향이 없었던

  히데요시는 다시 한 번 전쟁을 생각하게 되는데 조선에 보낸 부하들은 전쟁을 그만둘 수 

  있다면 무슨 수단이라도 동원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가 갑자기 히데요시가 죽는다.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사 통보를 받은 선조는 전혀 놀라거나 애통해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군의 지휘부에서 이순신의 공로를 위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도

  공로는 오직 명군에세 세월을 따름이며 위로는 전사한 등자룡을 위시한 명군이 받아야 한다

  말하였다는 것은 선조의 정신 상태가 어떤 인물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할 것이다.

  선조는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오직 명 덕분이라는 얼빠진 소리의 주체자이기도 하다.

  아니 그런 왕 밑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시작전권은 물론 외교권마저 가지지 못했던 조선은 어떠한 입장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데 있어 결정적인 사실은 전쟁이 끝난 다음 조선이

  일본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못한 데 있다,

  거기다가 일본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가문을 멸망시키고 막부를 창건한 다음 자신들은 

  전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공표했다.(전형적인 일본식 책임회피 방법)

 

 - 근대 일본에 의해 자행된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20세기 초반

  일본 사학자들은 히대요시의 전쟁에 위해 명의 멸망이 촉발되고 그에 따라 누르하지가

  청의 전신인 후금을 건국할 수 있었다는 이른바 만선사관(滿鮮史觀)‘을 주장했다.

 

작품은 그 밖에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 선생의 활약상과 조선을 돕기 위해 파견된 무능력한

명나라 장수들의 부실한 대응력, 전쟁의 피해자인 조선 몰래 일본과 은밀히 진행되었던

강화 협상과 그 내용을 알면서도 아무 대응도 할 수 없었던 우리의 위장자들, 선조의 추잡한

행동 등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너무도 창피한 내용이 많아 일일이 정리하는 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 땅의 위정자들이여 제발 이런 책 좀 읽고 정신차려서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도록

노력하는 인간들이 되자. 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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