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이정철 지음 / 너머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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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8

 

조선 최초의 군() 출신 왕으로서 그가 왕위에 올라 자신만의 정치적 색깔을 내기 시작하던

선조 8(1575)에서 23(1590)사이에 벌어졌던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암울하게 장식한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로,

역사에 대한 지식이나 주워들은 정보가 조금 누구의 기준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 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일견 세력싸움이라 하기도 하고, 나처럼 지식이 있다고 하기도 없다고

하기도 애매한 부류들은 어디서 습득한 지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알량한 지식을 무기로 무턱대고

정치 이념적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종의 정치 격변사’(나쁜 말로 이야기하면 파벌 싸움’)

고 이야기하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느 쪽이던 목소리 큰 인간이 속한 부류가 이긴다 -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시각과 지식을 기본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상태이기에 당시의

그런 사건의 배경과 이유를 단정적으로 뭐라 평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나 해당 작품을 읽고 또

유사한 작품 속에서 체득한 정보에 근거하여 또 살아오면서 주변으로부터 얻어들은 지식과 학창

시절 짧게 배운 역사에 대한 지식의 편린을 갖고 함부로 떠드는 행위는 저자와 같이 역사학을

공부하신 분이라면 모르겠으나 나와 같이 역사적 시각과 관점도 일천한 범인(凡人)의 입장은

상당히 주제넘은 행동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되어 작품 내용 중 나의 관점으로 중요하다고 생각

되는 부분을 성의껏 축약하는 것으로 나의 개인적 의견으로 포장해 보았고, 나의 관심에서 벗어

났거나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에 대해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은

일반적인 검증의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나와 같이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이 모른다는 사실

자체는 해당 역사적 사실이 틀렸거나 아직 검증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한다고 판단하여 - 이번

축약에서 제외하였다.

추후 그분들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나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면 다루어볼까 생각한다.

여기서 역사에 대한 나의 관점이라는 것은 이런 저런 작품을 접하다 보니 생긴 것으로 어느

역사 학자가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며 생성된 개인적 주장 중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특정 시기,

특정 사안에 대한 개괄적인 동의를 표한다는 의미이지, 저자가 바라보는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하는 것은 절대 아니며 그냥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으로 우리가 몰랐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족한 지식을 보충해 본다는 식으로 저자의 주장을

용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었으면 한다.

나는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는 무색무취의 인물로 그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은 그냥 한국사를

사랑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해당 작품의 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점검하고 알고 있어야 할 사항이 있다.

작품에서는 나와 같은 논조로 이야기하지 않았으나 작품을 읽은 나로서는 철저히 먼저 이런

생각의 기초를 다져놓지 않고 작품에 접근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 줄기는 대체적으로 3가지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1) 선조는 명종비 인순왕후의 사망을 자신이 정치를 시작해도 좋은 출발점으로 인식했고

2) ‘개혁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집권 초기의 집권자(선조)에게는 부담스러운 과제였기에 독자적

   세력 기반과 정치적 경험이 일천한 입장에서는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에

   현상유지 정책을 선택했다.(P 44)

3) 새로운 제도(낭천제도)는 기존 세력을 견제할 수 있었던 반면 종국에는 그 제도로 인해 탄생한

   세력에 의해 반발을 사게 된다.(P 48)

 

   [동서분당의 조짐]

- 선조 8년 황해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발단이 되어 동서분당의 단초로 발전하는데 동인과

  서인 간의 직접적인 분열의 원인은 대사간 허엽이 사간원 이름으로 과거 살인 사건을 담당

  했던 위관 박순의 추고 요청에 대해 김효원의 동의 아래 사헌부가 동조해 벌어진 사건이다.

   (P 65)

  평범하게 지나갔을 사건이 허엽이 개입함으로써 정치적인 사건으로 변질되는데 중요한 것은

  문제를 제기한 허엽과 피의자가 친척 관계였다는 것이다.(P 52, 57)

 

   [기준 없는 사건 처리]

1) 선조 11년 진도 군수 이수가 세금으로 거둔 쌀을 실력자(윤현, 윤두수, 윤근수)들에게 뇌물로

   주었다는 고발에 따라 이들을 조사하고 탄핵하나 선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조선은 사헌부, 사간원 대간에게 소문으로 들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를 근거로 탄핵하는 것도

   허용했는데, 탄핵을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해당 사건은 ‘3 으로 불리우던 당시의 세 윤씨에

   대한 사건으로 뇌물을 받았는지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탄핵이 거부된 사건이다.(P 79)

 

2) 전라도 무안 현감 전응전이 관곡 1백여 석을 착복하는 독직사건이 발생, 의금부 조사결과

   뇌물리스트에 윤의중(이발의 외삼촌)과 이양원(왕실)이 연루된 것이 확인되어 보고하자 선조는

   뇌물이 관행이라는 이유로 관대히 처분한다문제는 선조가 아닌 대간들의 태도였다.

   , 이 시기에 일어났던 다른 독직사건 특히 이수 사건에서 보여준 대간들의 자세와는 달리

   완전 딴판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당시 모든 사건은 사안의 배경에 따라 대응이 달라

   지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이다.(P 76)

 

3) 또 다른 독직사건이 발생하는데 웅진 현령 이신로의 뇌물 사건으로 뇌물의 수뢰자는

   우상 노수신이었는데 이 사건을 이수사건과 함께 처리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관련된 인물에

   대한 탄핵을 중단한다. 결국 추후 재조사를 하나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석방된다.(P 80)

  

   [백인걸 상소 대필 사건]

- ‘이수의 옥사직후 선조는 구언을 청하는데 사헌부에서 올린 정희적의 차자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 정희적은 차자를 통해 동인이 옳고, 서인이 그릇되었으며 심의겸(인순황후 일족)

   정철, 김계휘는 소인이며 사당의 일파라 규정하였는데, 이는 마침내 동인과 서인 간의

   구분이 시비(是非)를 따지는 것에서 정사(正邪)를 나누는 것으로 전환되었다.(P 87)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백인걸(지충부지사)’·를 파타하고 어진 사람만 등용해야 한다

   상소를 올리자 승정원과 삼사를 장악한 동인이 들고 일어난다.

   같은 시기에 이이역시 유사한 상소를 올리지만 백인걸의 상소를 대필한 사실과 함께 사간언

   송응형백인걸이이의 문제를 제기하며 정국은 혼란에 빠진다.(P91~106)

 

- 혼란의 정국 속에서 동인과 서인 간 갈등이 심화되자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동인과 서인의

  보합(保合), 조제(調劑) , 보합조제론(保合調劑論)이 등장하는데, 이는 동인이 구신이 아닌

  같은 사림인 서인과 함께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하나의 사림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조제보합론의 핵심이다.(P108)

 

   [선조가 이이를 부른 이유]

- 30세를 앞둔 선조는 크게 병치레를 한 후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하는데, 동인이 장악한 대간직

  에 서인 측 사람들을 등용한 것이다. 이는 종전의 선조의 인사 스타일이 아닌 조정 상황을

  면밀히 파악한 후 나올 수 있는 정교한 조치였는데, 이때부터 선조는 자기만의 정치 색깔을

  나타내기 시작했다.(P120)

  당초 이이가 조정을 떠난 이유는 독주할 기미를 보이는 서인을 이이가 제어하지 못했고, 서인

  내부에서 정철의 발언권이 커진 것이 그가 떠난 이유다.(P123)

 

   [탄핵 사건 2건과 정인홍]

- 선조14(1581) 동인들은 수원 부사 우성전을 탄핵하려 했다.

  역학에 능한 그가 변론하는 과정에서 여러 논적(論敵)을 만들었기 때문이며 특히 정인홍

  대해 발언한 내용이 정인홍의 귀에 들어가자 사감(私感)을 가진 그가 탄핵에 나서게 된 것이다.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면된 그 사건으로 우성전과 가까웠던 사람들이 모두 불만을 갖게 되었고

  이때부터 비로소 남북분당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P128)

- 우성전 탄핵 이후 정여립의 이조전랑 후보 추천을 반대한 이경중에 대해 탄핵을 모의하는데

  이 역시 정인홍이 주도로 이뤄진다.

 

   상기 두 사건은 외견적으로는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아니라 오히려 동인 내부의 갈등이

   요인으로 정인홍이 모두 주도한 것으로 보이나 배후에는 이발이 있었다.(P131)

 

- 또한 이이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이발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발 역시 표면적으로는 이이가 주장한 정치적 목적과 대의를 따르는 모습을 보였으나

  인순왕후 동생 심의겸을 증오했고 끝내 정인홍을 이용한 탄핵에 성공한다.(P141)‘

 

   [윤승훈이라는 인물]

- 동인의 집요한 노력으로 심의겸 탄핵에 성공하자 심의겸정철의 관계를 갖고 윤승훈

  문제화 삼는다. ’이이정철을 두둔하고 나서자 사간원 동료들의 동의도 얻지 못한 채 선조에

  상소를 올려 이이를 공박하나, 선조는 윤승훈에게 천박하고 경솔한 작태를 부리지 말고

  직분에 충실하라는 지적을 받는다.(P147)

   ’이이가 반박하자 언관에 대한 조정의 금기 사항(비판, 비난)을 건드린 것으로 문제가 된다.

  당시 조선의 정상적인 정치운영 구조는 대신과 언관을 양대 축으로, 대신은 민생을 포함한

  국정현안 문제 해결에, 언관은 관리의 부패를 막는 것이 주 임무였는데, 이를 정면으로 반박

  했던 인물이 바로 이이였던 것이다.(P153)

 

   [이이, 선조에게 개혁을 호소하다]

- 이이가 조정에 복귀하면서 가졌던 목표는 사림을 하나로 통합하여 그 단합된 힘으로 선조에게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특히, 인사권에 관한 것으로 당시 조정의 인사권은 이조판서가 아니라 이조전랑과  삼사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동인으로 이 상황을 바꾸지 않고는 이조판서가 인사행정에

  영향력을 가질 수 없었기에 이이가 이를 지적하였고 사헌부 장령 홍가신이에 동조하였으나

  유성룡이 반대하고 나선다. 이 시기에 류성룡은 개혁의 당위성보다는 당파적 행동이 더 중요

  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P158~165)

 

   [이탕개의 난과 선조 그리고 이이]

- 함경도 북부 지역에는 초기부터 번호(藩胡)‘라 불리우는 여진 부족들이 거주했다.

  이들은 조선 국경 부근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고 조선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 정부의 관심이 줄어들고 국방상 완충역활의 필요성이 줄어들자 일부

  번호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을 공격한다. 이것이 이탕개의 난이다.(P177)

- 이탕개의 난을 통해 이이는 여러 개혁안을 선조에게 건의하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반대로 무산

  되고 만다. 이즈음 종친인 세종의 아들 담양군의 증손 경안령 이요가 정치적 파란을 불러

  일으키는 발언을 하는데 이 발언에 선조가 동조하면서 파장이 커지는데, 이요의 발언 뒤에는

  같은 당여인 이이의 사주가 있다고 하면서 이때부터 이이를 직접 공격하기 시작한다.(P185) 

 

   [성혼의 상소와 계미삼찬]

- 선조는 대간에 대한 질책으로 이이가 사직 이후 성혼의 상소로 정치적 쟁점이 다시

  붙으면서 송응개가 사건의 중심에 서는데, 그를 비롯한 추종세력들이 이이를 강렬히 통박하는

  상소를 너희들이 이 일을 가지고 다투면 능히 이탕개를 잡을 수 있느냐질타한다.

  송응개의 상소는 이이가 제기한 문제가 아니라 이이 개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의

  계미삼찬의 빌미가 된다.(P219~229)

 

   [계미삼찬 이후의 이이의 입장]

- 계미삼찬 이후 조정에는 3가지 말이 있었다.

  서인 측은 동인을 청요직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과 동인 측은 이들도 사류의 일부이니

  배척하지 말고 전처럼 기용하되 갈등의 단서를 없애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마지막으로는 문제를

  악화시켰던 동인 측 몇 사람을 제외하고 동서 구분없이 인물을 등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이이는 마지막 입장이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 언관권 축소를 통한 추락한 대신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P245~257)

 

   [조정의 재편]

- 동인 측으로 치우친 조정에서 동인을 견제하기 위해서 선조는 이이를 선택했고 이이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굳어진 계기는 여진족의 군사 공격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때부터 선조는 자기 스타일의 정치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 선조의 통치 스타일을 온전하게

  완성시켜 준 사람은 이산해이다. 선조가 생각한 성혼은 이이의 조력자이거나 연장선으로,

  이산해에 대해서는 이이와는 독립적인, 나아가서는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인물로 선조는 인식

  했다.(P245~271)

 

   [선조의 정치]

- 선조 17년 이후 조정의 정치적 무게중심이 동인 쪽으로 확연히 이동했다. 특히 선조는 내 뜻을

  말하겠으니 사관은 기록하라라고 할만큼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시작하는데, “내가 등용한

  현인은 이이와 성혼이다. 때문에 무릇 이 두 사람을 공격하는 자는 반드시 간사한 자라고

  생각된다고 할만큼 선조는 이들에 대한 신뢰를 보인다.

  특히, 선조는 특지(特旨)를 통해서 자기 목소리와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조정 내 당파간 목소리

  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켰다.(P272~289)

 

   [기축옥사]

- 정여립에 의해 주도된 모반 사건은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데, 정려립 집에서 수거한 문서,

  즉 정여립이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서찰에 근거하여 심문이 진행되었다.

  정치적 갈등이 고조되면 따져 보아야 할 사항을 따지지 않고 쉽게 피아(彼我)로만 구분한다는

  점이 문제점인데, 선조는 이를 자의적 판단에 의존해 처리를 하였다는 문제가 있다.

  , 선조는 임금의 지위에 더하여 신뢰성 높은 정보를 독점한 채,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판단에

  따라 정보를 선택적으로 활용했다.(P293~320)

 

   [전주 생원 양천회의 상소]

- 양천회 상소는 정여립 사건의 외연을 확대하는 촉매가 되어 본격적인 정치 쟁점화 된다.

  그의 주장은 정여립이 그렇게 된 것은 조정에 있는 당국자들과 결탁해 벌어진 일이며 비록

  그들이 정여립의 그러한 행동을 알았거나 행동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정치적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상소였다.

 

- 상소는 중요 동인 측 인사들을 퇴진시켰고 서인 중심 인물들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우상 정언신의 퇴출이다.

  대신을 새로 임명하면서 이산해가 추천한 정철을 정언의 자리에 배치하는데 이는 선조 8

  이래 늘 동인의 표적이었던 정철을 선조가 이를 이용하지만 정철은 성혼과 함께 정언신의

  구명 및 죄의 경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P321~328)

 

 

상기 내용만 갖고도 해당 작품의 70% 이상은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여겨지며 여기까지 내용을

갖고 왜 이런 작품이 이 시기에 이런 작품 제목을 갖고 출간되었을까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관점으로 생각한 몇 가지를 추려 보면

 

첫째 조직의 분란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앞세운 소수에 의해 일어나며

둘째 전체를 관장해야 할 최고 지도자의 올바르지 못한 처신

셋째 리더들의 열린 마음과 소통하려는 자세의 부족

넷째 어떤 명분으로도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단죄하면 절대 안 되며

다섯 리더들의 겸손한 자세가 부족했다

  

점이었는데 어느 것 하나 새로운 것이 없는 우리 모두가 학창시절에 다 배운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사건 사고를 보아도 위에서 언급한

현상이 없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분명히 반복된다고 볼 때 모두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산은 오를 때 보다

내려올 때 조심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있다.

마음에 두고두고 새겨야 할 문구가 아닌가 생각하며 글을 접는다.

 

   작품으로 얻는 지식들

  

- 처치(處置)와 피혐(避嫌)

  사헌부와 사간원의 결정방식은 전원합의 방식인데, 사헌부에서 전원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각자 자신의 의견을 밝힌 후 피혐하고 이를 사간원으로 넘겨 다시 합의를 하는데 여기서도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이를 처치라고 한다.

  여기서도 역시 합의가 안 되면 최종 결정은 홍문관으로 넘어가 결정된 결과가 사헌부, 사간원

  에서 제시한 의견과 동일한 의견을 남긴 이들은 살아남고 나머지는 물갈이 된다.

- ‘숙배(肅拜)’란 어떤 벼슬에 임명된 관원이 임지로 가기 전에 임금에게 올리는 인사

- ‘위관(委官)’이란 추국(推鞫)할 때 삼정승 가운데서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는 재판장

- ‘승정원은 도승지 포함 6명의 승지로 구성되는데 각 승지는 6조 중 하나씩을 맡아 왕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 ‘구언이란 임금이 관료조직의 위계를 뛰어넘어서 신하들 개인의 의견을 구하는 절차

- ‘계사(啓辭)’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 말이나 내용혹은 중앙 아문에서 국왕에게 올리는

  문서로 임금에게 전달하는 것을 전계(傳啓)‘라고 한다.

- ’선전관은 국왕을 지금거리에서 모시는 무관

- ’도직이란 도적을 잡기 위해 중요한 지점마다 세운 검문소

- ’승전색이란 내시부에 속한 직책으로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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