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제국 진시황가의 CEO들
진문덕 지음, 원지명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추천 권유도 8

 

작품은 진(, 벼이름 진)의 흥망성쇄를 통해 기업들이 배울 점은 무엇인가를 병행해서 기술한

작품으로 경영적인 측면에서의 활용도 보다는 역사서로서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워 나의 손길을

다시 불러들이고 말았다.

나는 지난 2002년 당시 작품을 읽고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남겼었다.

은 전통적으로 전투 부족국가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용맹스런 장수나 실제 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략가 양성에는 상당한 노하우를 지닌 반면, 국가를 경영하는 핵심참모나 제도의 수립과

시행을 책임질 행정 관료의 양성 측면은 소홀했다.(P 46)

그런 나라의 통일 과정을 기업 운영에 적용해 보기를 권하는 측면에서 작품이 집필된 것으로

판단된다.

 

영웅은 탄생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점()의 집합체이듯, 지금에 찍혀지는 점이 훗날 직선이 될지 아니면 사선이 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점을 찍는 순간, 점을 찍는 행위자의 마음이 진정 이루려는

대상에 대한 정성과 노력 그리고 간절한 소망 속에서 점을 찍는다면 점들의 모임은 행위자의

의도대로 그려져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대 시황가의 CEO들은 언제 올지 모르나 자신들 후손의 손으로 중원의 평정이루어지기

를 간절히 빌어 온 결과, 그 꿈을 후손인 진시황대에서 이루어 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의 왕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는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국의 왕족 CEO들 역시 자신들이 점을 찍는 순간 수많은 노력과 심혈을 기울였지만 시대와

상황이 그리고 그런 목적 달성을 위한 구심점이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원의 패자로 등극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또 다른 진()이라는 나라이다.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의 '평화유지군' 역할을 해 왔던 나라는 사분오열되면서 패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중국의 또다른 역사서인 열국지라는 작품을 통해서도 살펴보면,

나라에 관한 일화나 귀중한 사례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사례가 많다는 것은 당시 중원의 중심에 위치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국가가 왜 중국이라는 대 제국을 평정하지 못했을까.

이유는 하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력만큼, 준비를 하지 않았고,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나라를 이끌어

갈 구심점이 없던 것이 큰 원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변방의 소국으로 출발한 ,

그들은 오랑캐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과 열린 정치의 장을 마련하여 '관중'

버금가는 '백리해', '왕전' 등과 같은 신하를 얻었으며 어렵게 얻은 신하들이 제안하는 각종

우수한 정책을 제도에 적절히 반영한 결과, 나라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한다.

 

자신의 어머니는 여불위가 소개한 '노애'라는 작자와 통정을 하는 등 모후로서의 자격을 상실

했다고 판단하자, 진시황은 자신의 어머니를 별궁에 유폐시키며 어머니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하는 자가 나오면 죽이겠다고 공표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거꾸로 해석해 보면 그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끊임없이 신하들이 진시황

에게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

이겠는가.

죽기를 각오하고 또 다시 진언을 하기 위해 찾아 온 이름 없는 선비(모초)의 간언을 듣고, 진정

으로 뉘우치며 진시황은 다시 어머니를 모후의 자리에 복귀시키는 것을 보면서, 나는 진시황의

됨됨이가 중원을 평정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인물이라고 판단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이라는 나라는 아주 옛날부터 통일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져

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작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의 연산군에 버금가는 진시황에 대한 여러 극악 무도한

  이야기를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있다

 

본 작품은 약육강식만이 존재하는 기업 생태계 속에서 활동하는 기업인들에게 있어서는 언제

인지는 모르나 일류 기업으로 나아가는 초석으로, 책을 읽는 개인들에게는 미래를 준비하는

예비 CEO’로서의 한 점을 긋는 순간에 불과하다. 그러니 작품을 통해 전부는 아닐지라도 조금

이나마 뭔가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옥의 티]

1) 466'성장했기 때문이' -----> '성장했기 때문에'

2) 2125'사망 천리' -----> '사방 천리'

3) 265쪽 밑에서 7'변화 욕구과' ----> '변화 욕구와

  

() 왕조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목공효공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배출하며 당당히

역사의 전면에 나서며 특히, 효공에 이르러서는 왕과 찰떡궁합의 콤비를 보여준 상앙(商鞅)’

이라는 불세출의 개혁가가 등장하면서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혜왕과 소양왕으로

이어지는 명군의 등장으로 전국시대 말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군단

()’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선조들의 노력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걸출한 제왕 시황제(始皇帝)에 이르러 비로소

그 결실을 보게 되었으니 바로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탄생한 것이다.

 

- 제후국 진()에게 부여된 주요 임무는 주 왕실의 큰 고민이자, 역사 이래 중원의 가장

  위협이었던 서역 오랑캐 서융(西戎)’에게서 중원을 지키는 일이었다.(P 36)

- 주 평왕은 진 양공의 충성심을 믿고 중원 최대 위협인 서융을 책임지게 하여 왕실의 안전을

  보장하고 제후들의 신임을 유지하고자 했다.(P 41)

- () 목공(穆公)은 자신의 인간적 매력과 백성들의 절대적 신뢰를 토대로 진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특히 외부 인재 영입을 강력히 실행하여 공손지’, ‘건숙’,

  ‘백리해와 같은 인재를 얻는다.

  특히, ‘건숙과 같은 인물은 목공에게 천하의 패자가 되기 위해서는 탐욕하지 말고, 화내지

  말고, 재촉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큰 깨달음을 주었다.(P 47 ~ 51)

- () 효공(孝公)21세에 등극하여 뛰어난 지도력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중국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개혁을 주도하며 혁명을 주도했다.(P 81)

  효공 역시 과거 목공처럼 외부 인사 영입을 통해 암울한 현실에 탈춣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할 때 상앙(商鞅)’을 만나게 된다.(P 83)

- 상앙은 이극오기에게 영향받은 인물로 효공의 절대적 지지와 신임을 얻어 강력한 법의

  집행을 통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치술(治術)을 펼치고자 했다.(P 85)

- 관습에 위해된다 하여 무조건 반대해서는 안 되며, 이를 따른다고 해서 무턱대고 칭찬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발전을 원하다면 변해야 한다.(상앙) (P 93)

- 뛰어난 조직 장악력을 갖춘 상앙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는데 그것은 바로 탄력적인

  운영의 묘미였다. 그는 현실의 비이성적 상황을 외면한 채 무조건 공권력의한 강제

  집행만을 고집하는 과오를 범했다.(P107)

- 소진과 장의에 의한 합종연횡책이 바로 이즈음 나타난다.(P123-137)

- () 역량을 극대화시킨 인물은 혜왕의 이복동생인 소양왕(昭襄王)’이다

  그 휘하에는 저리질’, ‘위염’, ‘백기범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P140)

- 조나라와의 장평전투가 진의 앞길을 가늠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P152 ~ 163)

* ‘장평전투리더관리자라면 반드시 읽고 연구해 볼만한 사건으로 자초여불위

  ‘이사의 활약에 대한 사항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P164~179)

- 진왕의 축객령에 의해 축출될 위험에 노출되자 그는 무릇 능력과 충성심만 출중하다면 어디

  출신이든 무슨 상관이며 진심으로 진에 충성하고자 하는 수많은 인재를 내치지 말고 더 훌륭한

  정책과 지략으로 대왕에게 은혜에 보답하고 대왕의 영광을 만천하에 빛내게 할 기회를 주자

  이사는 집요하게 통치자에게 건의해 성공한다.(P186)

- 여불위는 진왕 정()’에게 자기 사람을 시종으로 천거해 왕을 보좌하면서 뒤로는 조정

  왕에 대한 상세한 관찰,보고를 하게 했다.

  그는 왕에게 첩보전을 통한 새로운 통일전략을 제시하며 그 중요성에 대해 여불위와 같은

  금전적 로비 활동 외에 왕 직속의 강력한 정보, 전략 조직망 구축을 건의했다. 이 조직을 통해

  각 제후국에 퍼져 있는 진의 정보 조직을 일원화하고 일사불란한 정보 전달 체계확립을 통해

  통일을 대비한 한 차원 높은 첩보전을 주장했다.

  진왕 정은 이사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자신이 직속 정보 조직을 관장할 자리에 위료

  임명하고 진나라 정보 전략의 총책을 일임한다.(P188)

- 효공 시대는 상앙, 혜왕 시대는 장의와 소양왕 시대를 장식했던 양후’, ‘범저’  그리고

  마지막 진시황 시대의 여불위위료’, ‘이사까지 자타가 공인하는 전략과 첩보전의 대가들의

  활약에 의해 중원 최강자의 위상을 유지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P201)

- 영토 확장으로 진나라의 판도가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영토

  확장과 대규모 신민 영입에 따른 효율적인 통치권 확립 및 적절한 제도 개혁이 뒷받침 되어야

  했다.(P210)

- 진시황은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를 천명하고 천하를 36개 군으로 재편하며 각 군()최고

  행정집행관인 군수(郡守)와 군사를 관장하는 도위(都尉) 그리고 감찰 업무를 수행하는

  군감(郡監)을 두었다. 또 군 밑에는 현()을 두어 현령(縣令)이 다스리게 하고 현승(縣丞)

  보좌하게 했다.

  실질적인 권한을 잃은 각국의 구 귀족세력을 포함하여 모든 백성을 평등하게 진의 지배를

  받도록 배려했다. 특히 군수는 물론 현령 등 각 지방의 하급관리까지 중앙에서 직접 선발하고

  파견하여 명실상부 중앙 집권제의 구축을 실현했다.(P219)

  졸속 시행된 군현제는 이후 맹목적인 중앙집권제 옹호와 혹독한 법치주의 이상 실현이란

  중대한 과오를 불러일으켜 진 제국 멸망을 앞당기는 또 하나의 결정적 도화선이 된다.(P221)

- 진 제국이 처한 문제는 융통성이 없는 반강제적 법령 시행에 본질적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며

  노생서복같은 간신들에 의해 정권 농단이 펼쳐지면서 몰락의 길을 재촉하게 된다.(P259)

    [경영의 포인트]

- 만약 창업자가 빠른 시간 안에 회사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 기업만의 독특한 문화적 토대를 확립하는데 역점을 두어라.(P 62)

- 창업자가 명심해야 할 점은 창업자의 경영철학이나 방침이 기업 문화를 전적으로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초기에 기업문화를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방향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P 62)

- 걸출한 지도자란 반드시 환경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뛰어난 적응력과 통찰력을

  지녀야 하며, 이를 기업 문화에 적극적으로 투영할 수 있어야 한다.(P 63)

- 행동이 앞서는 저돌적 성격의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 창립되는 영업형 조직은 좌충우돌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수많은 도전과 난관을 극복해 나가면서 새로운 기회를 창출한다. 따라서 이런

  형태의 조직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독립된 가치관, 사고를 가진 각각의 구성원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일치된 목표와 이익을 제시하고 일사분란한 계획과 운영으로 내부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켜 잠재된 영업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전체

  구성원의 단결된 힘이 필요하며 일정 규모가 되면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야 한다.(P 70)

- 성장 가도를 달리는 기업일수록 성장 과정에서 드러난 위협요소를 없애거나 개선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오히려 안정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P 76)

- 본디 개혁이란 상호간의 신뢰와 믿음이 뒷받침되어야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P104)

- 대부분의 경영자나 기업 관리를 담당하는 책임자가 제일 우선하는 작업이 바로 제도의 정비 및

  수립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제도를 수립하고 관리하는 작업이야말로 그 어떤 경영 과제

  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한 일이라는 점이다.(P116)

- 중국의 왕조들이 그토록 수많은 제도를 시행했음에도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는 손에 꼽을

  만큼 적은 것은 바로 보수적 관료계층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이 개혁이나 새 제도의 수행에

  소극적 자세를 취한 데 원인이 있다.(P118)

- 제나라 환공과 관중의 개혁이 성공하게 된 것은 점진적 개혁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인데 그의

  개혁은 40년이란 긴 시간을 두고 진행되었다.(P119)

- 성공한 기업의 기업 문화는 자칫 창조적 사고와 언로의 차단을 가져오며 능동적 변화 욕구와

  환경 적응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공한 기업의 최대 적은 매너리즘에 빠진

  바로 그 자신이다.(P265)

- 진 제국의 천하통일은 상앙 변법 이후 절대적 가치를 부여받아 온 법가적 전통큰 힘이

  되었으나 반대로 구성원들의 창조적 사고와 탄력적 운영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해 결국

  국가 체제 수립 및 운영상에 치명적 오류를 가져오고 말았다.(P266)

- 성공을 거둔 기업은 무엇보다도 전통은 계승하되 새롭게 재창조하는 기술을 개발해야만 한다.

  (P 262)

- 위기를 겪는 기업들이 모두 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겐 수많은 기회가 있으며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것이다.(P296)

- 망하는 기업들의 특징(P297)

   1) 문제의 핵심을 찾지 못한다.

   2) 책임 회피에 급급하다

   3) 목적 달성 후에는 기업의 전망이나 위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 기업의 사활을 손에 쥔 경영자라면(P299)

   1) 이성적으로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며, 감정이나 정서적 접근을 철저히 차단한다

   2) 가시적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더 큰 이익을 위해 개혁의 칼날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3) 지원 세력을 찾는다

   4) 경영층은 조금이라도 개인의 이익이나 희생의 댓가를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한다

 

   [작품으로부터 얻은 지식들]

 

   * ‘시황제라는 단어의 탄생?

- 아주 오랜 옛날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이라 불리던 3자가 군림했으며 그 중에도

  태황이 가장 존엄한 존재였다고 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왕을 태황(泰皇)이라 존칭하고,

  왕명(王命)을 제(), 왕령(王令)을 조(, 고할 조)라 개칭하며, 천자 스스로 칭할 때는 짐()

  라 하기를 권유하였다.

- 이전까지 주 왕실에서는 천자가 스스로를 칭할 때 과인(寡人, 부족한 사람)이라 했다.

  과인이란 겸양의 표현 대신 천하의 공주(共主)로 군림하던 오제를 본따 제왕의 지칭을

  ()’으로 하자는 건의를 올렸다.

- 그러나 진왕 정()태황이란 너무 구시대적이고 새로운 제국의 출발을 의미하는 참신한

  기상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자는 버리고 ()’자는 남기되 전통적 제왕의 상징인

  ()’를 첨가하여 황제(皇帝)’라 칭하기로 결정했다.(P211~213)

 

   * 중화민족(中華民族)의 유래?

- 위진 남북조(후한 때부터 수나라가 통일하기까지 220 ~ 589)시대 이래 중원에 편입된 여러

  부족들을 위한 융합정책이었다.

- 참고로 주 왕조 때 겨우 각 부락간의 관계가 제도화되고, 조공 및 군사 지휘권이 체계화되면서

  비로소 천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 특유의 국가 개념이 형성되었다.

  천자란 주 왕조의 근간을 이루었던 태양 토템족의 상징으로 이후 국가의 최고 권력 및 군신

  간의 주종 관계에서 절대적 위치를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천하(天下)’주 천자의 땅이라는 뜻이었다.(P222~223)

- 중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국가 개념이 확립된 시기는 춘추시대 중기에서 전국시대 초기.(P224)

 

   * 진시황의 진면목

1)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정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관행으로

   볼 때 이는 정책 실패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다.

   * 제나라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은 사람) ’서복(徐福)‘불로장생의 명약노생이란

     작자에 의한 국정농단으로 갱유(坑儒)‘를 촉발시켰고,

     분서(焚書)는 이사의 건의로 추진된 일종의 사상 통제 정책의 일환이었으나

     갱유(坑儒)는 전적으로 진시황의 배신감에서 비롯된 대규모 보복 사건인 것이다.(P262)

2) 진시황의 키는 184정도였다고 한다

3) 집권 초기부터 자신이 죽을 때까지 왕권 회복 과정에서 일어났던 유혈정변 외 단 한 번도

    이유없이 중신이나 신라를 죽인 적이 없었다.

4) 첩보 전략의 대가였다고 한다.

5) 잦은 순행으로 민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 장군 몽염(蒙恬)과 만리장성

- 대외적으로 해결할 문제에 쌓인 진시황은 노생이라는 자로부터 제국과 자신에 대한 예언을

  받아 오는데 이때 받은 글자가 망진자호(亡秦者胡)‘였는데 ()‘를 흉노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장군 몽염에게 오랑캐를 정벌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오랑캐의 침략에 맞서고 중원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만리장성을 축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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