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료전쟁 가일스 밀턴 시리즈 1
가일스 밀턴 지음, 손원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3

 

여름 휴가(?)를 동해안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결정하고 와이프와 차를 몰고 가다 우연히

고속 도로 휴게소에 들르게 되었는데, 매점 한 켠에 여러 책자들이 할인 가격에 팔리고

있어 책이라면 환장하는 나는 냉큼 집어 들었는데 바로 이 작품이 선택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참 실망한 작품이었다는 말 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

출판사의 명성에 상당히 흠집을 내는 그런 출판물이었다는 이야기 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 독자들께 절대 구매를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내가 작품을 이렇게 혹평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각 장마다 중요한 사건에 대한 결론부분에 이르러서는 '각종 자료가 유실되어 확인할 수

없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등의 이야기가 초반에 자주 묘사되고 있어 작품으로서

의 매력을 반감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였다면 두 가지 선택 방법이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는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철저한 고증과 자료 수집을 통한 역사적 퍼즐을 꿰맞추어

완성품을 내 놓던지, 둘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약간의 허구적인 요소를 가미해 작가의

상상력을 펼쳐 나름대로 작품을 이끌어 나갔어야 하는 아쉬움이 크게 밀려온 작품이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서구 열강, 더 정확히 말하면 영국의 향료 쟁취사였다.

작품을 읽으며 과거에 인도네시아말레이지아그리고 싱가폴등에 출장을 갔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당시 그 지역에 많은 수의 '네덜란드인'들을 유적지를 여기저기서 목격하면서

'이 사람들 동양 역사에 관심이 많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작품을 통해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가끔 우리의 서울에서 마주치는 일본인 관광관객들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또 하나 웃긴 것은 작품의 저자가 영국인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들은 굉장히 젠틀한

사람들로, 네덜란드인과 포루투칼 그리고 이슬람 쪽 사람들은 예의와 절차도 모르는

극악무도함의 극치를 달리는 민족으로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 많이 보이고 있는 점은

'뭐 묻은 놈이 뭐 묻은 놈 나무라는 듯한 인상'을 받아 씁쓸함을 더 했다는 이야기 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

작품을 읽는 도중 어느 인터넷 기사를 보니

 

"임진왜란은 포루투칼이 배후 조정했을 것이다

 

라는 제하의 기사가 난 적이 있어 관심있게 읽어 보았는데, 향료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네덜란드, 포루투칼, 스페인 등이 향료 섬을 찾기 위해 활발하게 해상 활동을 했었다는

자료를 분석해 보면 위에 언급한 인터넷 기사가 분명 억측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열강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수 년 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인터넷 기사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론적, 학술적으로 맞고 틀림을 떠나 그렇게 시대와 장소를 통괄하여 연관을 짓는

역사 평론가들의 시각에 높은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왜 포루투칼이 임진왜란의 배후 조정자였을까?

제가 여기다 그 이야기를 써 버리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상세 사항은 읽는 분들이 책을

통해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 영국이 향료를 확보하기 위해 시작한 역사적 처녀 항해는 15536[리처드 챈셀러]가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시작한 원정대 파견이 최초이다.

   중세 유럽에서 절대권을 갖고 있던 당시 교황으로부터 '동쪽 항로'에 대한 허가를 해양

   대국이었던 '네덜란드''스페인', '포르투칼'이 이미 받아 놓은 상태라 부득이하게

   신 항로의 개념으로 북극해인 '북동 항로'를 개척하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한다.

    (그 후로 400년이 지난 핵잠수함이 만들어진 이후에 성공할 수 있었다.)

   ※ 월계수와 비슷한 높이와 잎사귀를 지닌 이 나무에는 종 모양의 꽃과 함께 레몬 빛의

       즙이 풍부한 열매가 열린다. 식물학자들은 [미리스티카 프라그란스]라 부르지만

       영국 상인들은 [육두구]라 불렀다

      '육두구'17세기 유럽에서 가장 탐나는 사치품이었다. 전염성 흑사병에 육두구

       향만이 유일한 치료법이라는 주장이 나온 다음부터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2) 포르투칼은 1471년 처음으로 '적도'를 항해한 이래 불과 40년만에 향료섬(몰루카 제도)

    까지 무사히 항해할 수 있는 항로를 개척하여 많은 육두구와 향료를 확보하며, 1511

    향료섬을 장악해 요새와 보루를 구축하게 되는데 당시는 그런 행동만으로도 자국의

    영토라고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베니스의 탐험가 [존 캐벗]이라는 인물이 대서양 건너편에 향료섬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1497년 탐험에 나서나 실패하고 돌아온다. 하지만 이 실패 정보를 들은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달랐다. 그는 휘하에 [안토니오 피가페타]라는 인물을 탐험할 때

    동승시켜 향료섬으로 향하는 스페인 선단의 역사적 항해를 모두 기록하게 된다

    그가 쓴 일지는 후일 영국의 학자이자 주교인 [새무엘 퍼키스] 손에 넘어가 영국까지

    전파돼 런던의 상인 모험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드디어 [마젤라]은 스페인 '카를 5'의 후원을 받아 2척의 배(트리니다드, 빅토리아 호)

    를 거느리고 서쪽 항로를 개척하며 향료섬으로 출항해 목적지에 도달한 후 9달만에

    출항지로 돌아온다.  

    스페인이 향료섬을 개척하자 포루투칼이 강력 반발한다. 20여 년 전의 '교황 칙서'

    토대로 볼 때 서쪽 신발견지는 스페인령으로, 동쪽은 포르투칼령이 되는데, 16세기경의

    지도는 정확성이 떨어져 논란이 된다.

    스페인은 새롭게 발견된 향료섬이 자신들 소유로 섬의 재산은 스페인 국왕의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런 주장에 누구도 반대를 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스페인 국왕은 포루투칼

    에 보상금을 받고 향료섬을 넘겨주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 짓는다.

    향료섬에 관심은 다른 열강들도 점차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중에서도 영국이 강한 집착을

    보이면서 향료섬을 향한 항로를 개척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3) 런던 상인들은 향료섬 항해를 위한 재 탐험을 강행하는데 최초 항해 실패 후 24년이 지난

    1577[프랜시스 트레이크]가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의 적극 후원 속에 지휘봉을

    잡고 5척으로 새 항해를 시작한지 꼬박 68일만에 포루투칼이 최초로 성공한 한 세대

    후 영국의 배가 향료 섬에 겨우 도착하나 이미 이 섬에 도착해 있던 포루투칼의 저지로

    철수해야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상인들은 다시 한 번 향료섬 항해를 기획하면서 [에드워드 펜턴]

    선장으로 지명하나, 그는 항해에는 관심이 없고 아프리카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영국의 탐험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영국 상인들은 1583[랠프 피치]를 선장으로 하는 향료섬 탐험대를 재 출발시킨다.

    [피치]는 상인들의 기대를 저 버리지 않고 8년 만에 영국으로 각종 조사 자료를 들고

    귀환한다. 이즈음 스페인의 [펠리페 왕]이 대규모의 무적 함대를 이끌고 영국해협으로

    올라오자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 스페인군을 격파하면서 국제 사회에서 영국의 존재

    가 부각되기 시작한다.

 

4) 스페인 무적 함대를 무찌른 직후 세계를 항해하고 온 [토머스 캔버디시]는 영국의

    지도층에게 발빠른 세계로의 진출을 주장하지만 당시 세상을 '포루투칼''스페인'에게

    분배해 준 '교황 칙서'로 인한 제약이 많았으나 [엘리자베스 1]는 

    "바다와 하늘은 모두의 것이다. 따라서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내 신하들이 항해하는 

     것은 합법적인 행동이다"   

 

     라는 선포를 함으로써 해외로의 진출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1591[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동인도제도 무역권 승인을 받고 대대적인

     원정대를 모집하여 [제임스 랭커스터]를 지휘관으로 3척의 배가 출항하나 희망봉 부근

     에서 두 척은 침몰한다. 항해 도중 만난 포루투칼 상선을 탈취해 영국으로 돌아가지만

     출항 당시 198명 중 25명만이 생존해 돌아 왔다.

     이 항해의 실패로 런던 상인들은 한 동안 무역항로를 튼다는 생각을 한동안 접는데,

     네덜란드인들이 향료전쟁에 뛰어들어 눈부신 성공을 거두자 동인도 제도로 보낼

     새로운 원정대를 결성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5) 네덜란드는 1595[코르넬리스 호우트만]을 대장으로 4척의 배로 구성된 원정대를

    출발시키나 희망봉에 다다를 무렵 '괴혈병'과 선원들의 반란으로 문제(자중지란 및 군기

    문란)가 발생하나 천신만고 끝에 '수마트라'를 거쳐 향료섬인 '반탐 제도'에 도착했을

    , 낮은 가격으로 향료 등을 쉽게 구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네덜란드인들은

    높게 책정된 가격으로 인해 아니면 여타의 이유로 인해 이성을 잃고 현지인들을 무차별

    살육하게 된다.

    이 행위는 동인도 제도에서 네덜란드인들이 파괴를 쉽게 하는 전례가 되었다

    결국 2년 여에 걸친 항해 끝에 원정대는 기대에 못 미치는 소량의 향료정향’  그리고

    후추를 싣고 네덜란드로 돌아와 향료 가격이 폭등하여 상당한 이익을 남긴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네덜란드인들은 1차 원정 당시 대장으로 활약한 인물을 중심으로

    2차 원정을 준비한다.

 

6) 당시 유럽에서는 새로운 영토가 자국의 영역임을 다른 유럽 국가에 알리기 위해 요새를 

    세우거나 혹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가시적인 상징물을 표시하는 것을 국제적 관례

    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상인들은 다른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는 향료섬을 향해 

    배를 모는 것이 실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일이 성사되어 육두구의 보고인 반다 제도에 국기를 게양하게 된다면 영국은 동인도

     제도에서 가장 부유한 섬 중 하나에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었다.

 

7) 영국 여왕은 모험을 좋아하는 스타일로 향료섬으로의 항해를 권장하였으나 '추밀원'

    반응은 달랐다. 그들은 비록 겉으로는 항해에 열광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항해를 중단

    시킬 속셈이었다.

    당시 강대국이던 '스페인'과 민감한 협상을 벌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라

    더 그랬다. 영국 상류층의 지속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 상인들은 합리적인 논리를 

    만들어 자신들 항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나선다.

 

    마침내 비록 실패는 했지만 1차 원정대의 대장이었던 [제임스 랭커스터]를 지명하고,

    일등 항해사도 네덜란드인들이 항해할 당시 참여한 경력이 있던 [존 데이비스]

    지명해, 여왕의 서명을 받아 160125척으로 선단을 구성하여 출항하게 된다

 

    여왕은 상인들에게 청색 바탕에 흰색과 적색의 줄이 13개 그려진 새로운 기를 수여하는

    데 훗날 이것은 미국의 13개 식민지의 국기의 모태가 되었다. 1차 항해에서 '괴혈병'

    으로 선원들이 고생한 것을 안 선장은 '레몬즙'을 상식하도록 선원들을 독려한다.

    마침내 영국을 떠난 지 6개월 가량 지난 160265'수마트라 항'에 도착한다

    당시 영국 여왕은 영국 배가 다른 배들을 약탈해도 좋다는 승낙을 해 준 상태로 [랭카터]

    항해 도중 만나는 포루투칼 상선을 많이 공격하여 각종 화물을 빼앗는 등 해적선

    형태를 띠기도 했다.

    수마트라항에 도착했을 당시 [술탄]이 열렬한 '친영파'라는 사실과 스페인 함대를 무찔

    렀다는 소식을 알고 있어 상업 활동을 하기가 아주 수월했다. 1603911일 영국을

    출발한지 27개월 만에 선단은 반담 제도에 몇몇 잔류 인력을 주둔시키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8) 앞의 원정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런던 상인들은 또 다른 항해를 위해 [헨리 미들턴]

    에게 부여하기로 하고 4척의 배로 선단을 구성 160412월 출항, [랭커스터]알려 준

    대로 향료 섬 동쪽에 있는 '물루카 제도''암보이나섬'에 도착하나 이미 포루투칼이

    점령하고 있어 향료 거래를 할 수 없게 된다.

    어렵게 향료 협상을 이끌어 내나 갑자기 네덜란드 선단이 나타나 포루투칼로부터 섬을

    빼앗으며 영국도 함께 쫓겨난다. 할 수 없이 다른 섬(테르나테섬, 티도레섬)을 찾았으나

    이 역시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빼앗기고 만다.

    마침내 반다 제도의 가장 외진 '런 섬'을 발견하고 향료 거래를 시작하게 되고 1606

    향료를 싣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9) 네덜란드인들은 포루투칼과 싸워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자신들이 관심을 가진 모든

    '향료섬'에서 포루투칼을 몰아내고 사실상 패권을 거머쥔다.

    그들은 반다 제도로 관심을 돌려 무력으로 장악하려 한다. 네덜란드의 위협에 직면한

    영국은 인도에 물류기지를 세울 계획을 수립한다.

     그러나 인도는 강력한 무굴제국의 황제 [자한기르]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그는 이미 

     배타적 무역권을 '포루투칼'에 내 준 상태였다. 이 문제를 타개하고자 런던의 상인들은 

     [윌리엄 호킨스]라는 인물을 인도로 파견하나 끊임없는 [자한기르] 왕의 변덕으로 인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귀국하게 된다.

10) 1599[야코브 반 네크] 선장이 성공스런 교역을 마치고 네덜란드로 돌아 오는데 그의 

      교역 성공의 원인은 지난 1595[코르넬리스 호우트만]이라는 인물이 저지른 행동을 

      지우는데 초점을 맞추어 행동한 덕분이었다.

      네덜란드는 우연 곡절 끝에 1602년 영국의 동인도 회사와 경쟁이 될 수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고 '17위원회'가 만들어진다. 조합이 만 들어진 직후 [세발드 데

      베르트]를 선장으로 하는 선단이 '실론'에 도착하여 이 섬의 왕과 점령군인 포루투칼에

      대항하지만 문화적 차이로 인해(소를 잡아 먹는) 원만하게 진행되지는 못한다

      동 시기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 역시 선단을 준비해 출항시킨 결과 과거 항해 경험있던

     [데이비드 미들턴]만이 향료 교역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네덜란드 향료 교역의 교두보를 마련한 선장은 [페테르 베르호에프]였는데 그는 반다

     제도에 상륙해 모든 향료를 자신들에게 만 팔 것을 강요하다 그 곳 원주민들에게 학살

     당하고 만다그를 이은 후속 지휘관들이 마을을 철저히 짓밟게 된다

     이 결과 16098월 반다 제도의 '네이라 섬'은 영원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조약을 맺고 동인도제도에서 네덜란드가 얻은 첫 번째 영토가 된다.

 

11) 1609[윌리엄 킬링]이 반다 제도를 떠난 뒤, [데이비드 미들턴]'엑스페디션'호를

      이끌고 네덜란드가 선점하고 있던 동인도 제도에 도착한다.

      반다 제도에 도착한 [데이비드 미들턴]의 등장으로 반다 제도의 주민들은 네덜란드에

      대한 적개심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영국과의 교역을 증가시킨다

      한편 런던의 상인들은 교역을 통해 부의 증대를 꾀하기 위해 1610[헨리 미들턴]

      경을 책임자로 한 동인도 제도로의 출항을 준비한다

      선원에 [나다니엘 코트호프'라는 인물이 포함되는 데, 그는 영국의 향료섬의 역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활동을 한다. 그들은 항해 중 만난 [레지브 아가]라는 인물

      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우연곡절 끝에 3년만에 귀국하나 만신창이가 된 상태

      였다.

 

12) 네덜란드와 영국은 정향이 풍부한 '암보니아섬'을 놓고 각축을 벌이지만 향료 무역이

     계속 이익을 보려면 평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여 협의를 하나,

     양 국가간의 협상은 결렬된다.

 

     1616[니다니엘 코트호프]가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영국인들에게 호의를 보여 주는

     '런섬'으로 출항한다. 여섯 개의 섬으로 구성된 향료의 본거지인 반다 제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런섬'을 반드시 장악해야 했다. 네덜란드의 폭정에 가까운 교역이 싫어서

     런섬으로 도망 온 원주민들은 자신들을 온화하게 대우해 주는 영국인들에 호감을

     가지며 영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향료를 놓고 끝내 양국은 전쟁에 돌입하는데 [코트호프]가 이끄는 열악한 영국 군대는

     [얀 피에테르존 코엔]의 네덜란드군에 대항하여 1,540일에 이르는 포위 공격을 정면

     으로 막다 산화한다. [코트호프]의 저항은 영국에는 상당한 이익을 안겨 주었지만 그의

     잔인한 죽음은 영국사에서 조용히 묻혀 버렸고, 위대한 영국 영웅은 그를 기리는 묘비

     나 비문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13) 런섬을 장악한 네덜란드는 바다 여기 저기에 산재해 있는 영국 선단을 궤멸하는 게

     목표였으나, 161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모든 싸움을 중단

     하기로 '방위 조약'이라는 협정을 맺는다.

     조약 내용은 앞으로 모든 향료섬 무역에서 3분의 1권한을 가지며 그 대가로 영국은

     스페인과 포루칼로부터 이 지역을 방어하는 데 적극 협조하기로 약조를 한 것이었다.

     그런 협정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코엔]은 반다 제도의 원주민들에게 가혹 행위를

     스스럼 없이 자행했고, 암보니아의 총독인 [헤르만 반 스페울트]를 충동질해 그가 자행

     한 여러 악행 중 하나가 '암보니아 학살'로 용병들의 사소한 실수로 시작된 영국,

     프랑스 및 현지 원주민들에게 자행된 네덜란드인들의 잔혹한 행위는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고 한다.

 

14) 반다 제도는 네덜란드가 완전 장악하고 암보니아 역시 네덜란드가 장악하고 있었다

     북쪽에 있는 테르나테섬과 티도레섬 역시 암보니아 보다 정도가 덜하긴 하지만

     네덜란드의 세력권 안에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16544, '웨스트민스터 평화조약'을 체결, 영국과 네덜란드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1656년 동인도 회사는 마침내 손을 들고 만다.

     영국의 향료 전쟁의 역사 속에는 '코트호프의 충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책에서 얻은 상식

 

- 포카혼타스(pocahontas) 백인과 결혼해 아메리카 원주민과 영국 정착민들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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