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서 영성으로 - 2017 신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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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9

 

작품을 읽으며 나의 기독교 입문 계기를 다시 한 번 뒤돌아 보게 만든 작품이다.

내가 기독계에 입문하게 된 동기를 굳이 들라면 아마도 나의 '아내'와 시인이신 '윤동주

선생'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첫 번째 이유인 '아내'와 관련되어서는 거의 모태 신앙 수준의 종교 생활을 해 오던 나는

아내와 결혼하면서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결혼 초 대개 종교에 대한 상반된 의견을 지닌 남녀가 만나 화합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결혼을 한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우리 부부도 그런 과정을 역시 겪었다. 아내의 소망은 나와 손잡고 교회에 다니는 게

최고의 소망이었으나 나는 절을 다니시는 어머님의 종교관과 내가 평소에 막연히 가지고

있던 반 기독교적인 정서로 인해 교회에 다니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었다.

한 여인과 같이 산다는 게 뭔지, 아내라는 여인이 뭔지 간곡한 아내의 부탁으로 또 아내의

()를 살려 주기 위해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 주고자 - 죽은 자의 소원도 들어

준다는 데 -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출석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윤동주 시인때문이라고 이유를 든 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나름

심오한 가치관에 의한 것이다. 세세한 이야기를 하자면 길고도 긴 이야기로 개인적인 질문

을 해 오면 답을 하고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우리 교회나 개신교 지도자 분들이 나의 주장을 들으시면 분노하실 수 있겠으나 나는

종교인 - 개신교 - 으로서 중요한 것은 교회에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상의 소유자이다.

그것 보다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또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를 찬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평소 삶 속에 예수적 삶의 요소를 얼마나 녹여서 실천하고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

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뭐 저래, 목사가 뭐 저래, 전도사가 어째 저래 등등

교회에 다니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을 외치면서도 교회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듣고, 보며 살고 있는가?

따라서 교회에 다니고 안 다니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예수적 삶을 평소 자신의 생활

속에서 얼마나 실천하며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예수적 삶을 추구하다 보면 우선은 주변과의 소통도 원활해지면서 나아가서는 저절로

절대자와의 소통의 문도 열린다는 게 나의 평소 생각이다.

평소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생적으로 무서운 외모와 말투를 구사하는 나의 평소

행동을 유심히 살피다가 내가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고 하면 크게 놀라서 묻는다.

 

"형씨도 교회를 다녀요?",

 

", 전에는 고등부 교사도 했었는데요"

 

대화가 이즈음 되면 상대의 표정이 변하면서 말투도 변한다.

 

"외모와는 전혀 다르신 분이네요. 다정 다감하고 마음이 여리시네요"

 

등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교 이야기도 나올 수 있고 그러다 교회 이야기로

연결이 되고 그러면서 미약하지만 전도라는 것도 하게 된다. 그런 관계로 맺어진 사람은

이전보다 더 끈끈한 관계가 된다.

 

교회에 다니며 나는 여러 종류의 사람을 보아 왔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기 전에 자신의 요구 사항을 빨리 해결해 달라는 이야기(기도)

먼저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데 이것은 큰 문제라고 본다.

우리의 절대자인 하나님이 무슨 큰 채무를 진 사람처럼 이거 해 달라 저것을 이루게 해

달라는 등 끊임없는 요구를 하고 있는데 이런 기도의 행태는 진정한 교인이라면 시급히

고쳐져야 할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작품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딸을 낫게만 해 주면’, ‘손자의 병이 낫게만 해 준다면나머지

여생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인질 협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가를

바라는 식의 기원은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이렇게 감히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최소한 나는 그런 내용의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언젠가 독서일기에도 언급했었지만 나는 사원시절 회사에서 무주택 사원들에게 분양

해 주는 사원 아파트만을 바라보고 임신으로 만삭이 된 아내와 희망에 찬 나날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입주자 명단 발표 며칠 전 회사 규정이 갑자기 바뀌어 당연 입주자로

생각하고 있던 내가 등 외로 밀려난 적이 있었다. 입주자 발표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속상함과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대낮부터 술을 먹고 널 부러져 사글세 방 귀퉁이에서

자고 있었는데 어스름한 저녁에 인근 교회의 청년들이 가가호호 방문해 예수님의 탄생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우리 집 차례가 되어 사글세 방문 앞에서 이들이 노래를

불렀다잠이 달아난 나는 문을 활짝 열고 청년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우리 집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다니며 기도를 했건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집 사람에게

해 준 게 뭐냐고, 시끄러우니 다른데 가서 노래를 부르라

 

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쫒아 버린 적이 있었다.

-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님이 열성 신도인 집 사람에게 내린 복이 바로 남편인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참 골 때리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교회 청년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지금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가 없는 그런 행동이었다. 그 때 일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위와 같은 사건을 비롯해 여러 소소한 사건이 내게 겹치고 또 겹쳐서 일어나 상당히 힘든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 중에

 

"우리가 하나님이 안 준 것만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가 받은 것을 한 번 세어 보세요 아마

주님께서 안 주신 것보다 여러분께 주신 것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나는 그 말씀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고 더 이상 주님께 무엇을 구원하는 보챔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자신있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기준으로

하나님이 주신 게 많은지 안 주신 게 많은지를 세어 보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단연코 이야기하는 데 주신 게 더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후 나는 내가 먼저 간구하는 내용의 기도는 가급적 자제를 하고 있다.

나도 사람인지라 왜 복을 받고 싶지 않겠으며 또 왜 금전적으로나, 육체적인 쾌적함을 싫어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절대자의 가르침 속에서 평소 생활을 잘하면 그게 바로 ''이고

'행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을 주실 분은 '아직 너의 차례가 아니다' 혹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데, 복을 달라고 열심히 간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차라리 그 기도 시간에 다른 내용을 기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

해 본다

 

교회에 다니며 아직까지도 신앙심이 신실하지를 못해 나는 신실한 신자의 증표처럼 여겨

지는 '방언'이나 '영적 체험'도 뚜렷이 경험해 보지를 못해 신앙심의 깊이를 갖고 이야기할

소재가 별로 없다. 기도 시간이나 구역 모임이라는 데 나가서 다른 신도들이 기도를 하는

것을 보거나 들어보면 거의 신이 강림한 수준으로 기도들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기도

시간이 길어야 대략 5분을 넘기지 못하는 나의 기도빨은 언제나 초라해 진다.

그러다 보니 구역 모임에 나가는 것 자체가 항시 곤욕이요 난처함의 연속이었다.

그런 나의 기도빨이 발휘 된 적이 있었다.

이것은 누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믿어 달라고 생 떼를 부리지 않겠다.

지금 생각해 봐도 신기할 따름이지만 증명할 수 없기에 나 혼자 생각만 한다.

아마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였을 것이다.

 

사고가 난 후 긴 시간 동안 생존자 소식이 없어 전 국민이 애를 태우던 어느 날 밤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조용히 작은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신실한 신앙심이 그리 크지 않은

나이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를 않는데 갑자기 '삼풍 백화점' 희생자와 매몰된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폭포수처럼 일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눈물, 콧물을 쏟으며 기도를 불같이 한 적이 있었다.

- 나도 당시에 왜 그랬는지를 지금도 알 수가 없다 - 우리 가족이나 친척 중에 삼풍 백화점

사건과 관계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나의 그런 불같은 기도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날 생존자가 처음으로 한 명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것 말고도 여러 건의 기도빨 사례가 있는데, 누가 증거를 대라고 하면

증거할 수 없으니 답답하지만 뭐 그리 억울하지도 않다. 이런 저런 체험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분명히 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런 저런 이유와 또 사례를 통한 신의 존재를 믿게 되면서 교회의 둘도 없는

신자 - 그러나 열성 신도는 아니다. 교회나 일부 신도가 잘못하는 모습이나 판단을 할

경우 핏대를 세우며 지적을 하기 때문이다 -가 되었으며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주일을 지키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우선은 집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이렇게 되었다.

유태인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울리지 마라. 하나님께서 아내의 눈물방울 숫자를 세고 계신다"

 

나는 세상에서 이 말이 제일 무섭다. 그래서 더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서 그 분이 언급하신 말씀 중 가슴에 와 닿는 문구를 살펴 보면

 

[종교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속에 얽매인 끈에서 벗어나 영혼을 해방

시키려는 욕망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차피 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정말 튼튼하고

영원한 끈에 끌려 다니고 싶다.]

 

비유가 꼭 적절하다고 보여지지는 않으나 성직자의 비리나 부패를 무신론자들이 공격할

때마다 내가 답을 잘 찾지 못함에 단서를 주신 문구는

 

[부패한 교회, 성직자가 있다고 해서 교회를 가지 말라는 것은 병원 의사가 오진하여

사람이 죽었으니 병이 나도 병원가지 말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나도 열심히 다니지만 오늘날 교회는 정말 많은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가장 큰 문제는 나부터도 그런 마음이 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목적에 맞게 쓰려고 하는 불경한 것이

너무나 많다. 그 중에 한 명이 본인이다.]

 

정말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읽으며 나는 교수님께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주제넘은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최근 개신교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고, '헤르만 헤세'라는 석학도 교회의 '이기주의적 성향'에 대한 자기반성을 요구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교회의 첨탑이 높아질수록 인간들의 죄상은 더욱 더 흉악해지고 교회의 크기가 대형화될수

록 몰지각한 인간들은 더 늘어나고 있는 이런 현실 속에서 이 시대의 지도자로서 우리

교회와 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종교와 종교인으로서의 방향에 대한 말씀을 끊임없이

던져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개신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적하고 반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어야 하는데

우리 겨회는 환경적으로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고 또 쓴 소리

하는 것을 본 적도 없다. 이것은 개신교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리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

생각한다.

 

또한 작품에서 언급하셨던 내용 중

 

"부패한 교회, 성직자가 있다고 해서 교회를 가지 말라는 것은 병원 의사가 오진하여

사람이 죽었으니 앞으로 병이 나도 병원가지 말라는 말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교회를 부정하며 가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까지 모두 안고 갈 수 있도록

기독인이라면 모두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교수님의 고견을 말씀해 주실 것을

진정으로 건의를 드려 본다.

 

교수님의 작품을 통해 수 년째 교회를 다니고는 있으나 항시 초심자와도 같은 어수룩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같은 미약한 영성의 소유자에게 진정한 깨달음을 느끼게 해

주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성인으로서의 말의 향연

- ‘기도는 고공비행을 위한 비상(飛翔)입니다.

 

- 죽음보다 강한 것이 창조의 욕망이다.

 

- 메멘토(memento)는 라틴어로 '기억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이고 모리(mori)는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메멘토 모리'라는 부르짖음은 '죽음을 생각하라'로 이는

   무신론자들이 외칠 때 하는 말이다.

 

- 상상력이란 사물을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해부하고 쪼개는 행위이다.

   존재의 그 딱딱한 껍질 안에 잠재해 있는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를 끄집어 내는 것.

  

- '사랑'은 말로, 몸짓으로, 나타나지만 ''은 조용히 지열처럼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맨 밑바닥에서 타오릅니다.

 

- 비만은 건강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다.

 

- 의문은 지성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

 

- 리더가 누군가를 이끌어 가려면 감동을 주아야 합니다. 영혼을 일깨워서 눈물이

   솟아나게 해야 합니다. 눈물이 흘러야 영혼에 무지개가 생깁니다.

 

- 문화(文化)라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준말로서 지도력을 가지려면 반드시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 예술가가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물귀신처럼 남을 자기 대신 어둠의 심연 속으로

   끌어 들이는 힘은 있지만 그 곳에서 나와 구제의 높은 곳을 향해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은 없다.

 

-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다. 자기파괴라는 극적인 경험이

   없이는 영성을 갖기 힘들다.

 

- 영성의 세계는 이해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절망을 계기로 영성의

   세계로 던져 넣어지는 것이다.

 

- 가족의 사랑과 공경이 지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값어치 있는 일이었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초월하는 마지막 고개의 시험을 과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인이 기독교를 비판할 때 가장 많이 지적되는 부분이 바로 가족주의적 시각에서 본 

   예수님의 행적들이다.

 

- 혈육의 낡은 가정관을 사랑과 믿음,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으로 확장하고 승화한 것이

   예수님의 가정관이었고 기독교의 가족관이다.

 

- 땅에서 사는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율법을 통해서 비로소 하늘의 아버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 빛은 하나인데도 분광작용에 의해서 제가끔 달리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도 문화에

   따라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 회교문화권에서는 돼지고기만이 아니라 개도 금기의 대상이라고 한다.

   이는 마호메트가 동굴에 숨어 있을 때 개가 짖어 잡힌 적이 있어 악마의 사자라고 생각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음치를 놀릴 때 "개처럼 노래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 인간이 풀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 하나님은 늘 침묵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풀어야 한다. ,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노력해야 한다.

 

-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이 맞춰지지 않으면

   하나님 믿지 않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불평을 한다.

 

- 인생이란 15분 늦게 들어간 영화관(로맹 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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