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9

 

슬픔이 우리를 짓누를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기독교인이거나 종교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본 질문을 보면 참으로 원론적이고

도 원초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나만의 독선과 아집의 세상에 빠져 잘난 척 하고 살다가 겨우 주님을 영접해 살기 시작한지

십 수년이 안되어 종교적 신념이 아직은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나를 비롯한

대개의 신자들은 자신이 힘들고, 지치고, 피곤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특히 삶이 또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고 느낄 때 서두에 언급한 질문을 절대자이신 주님께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 온 답은 아마도 '묵묵부답'이었을 것이며 그런 상황을 당하고 나면 꼭 한다는

소리가 '신은 없다'거나, '신은 나를 버렸다' 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절대자를 믿어 온

스스로나 절대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비난 혹은 조소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이 작품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자기 삶에서 가장 충격적인 슬픔으로 인해 감정적으로 마비되는 상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러한 마비상태를 일어서고자 하는 '한 사람'의 주의 깊은 시도

를 적나라하게 펼쳐 놓은 기록이라고 작품 해설서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나는 이 점에 절대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는 바이다.

 

작품 속에서 나오고 있는 결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결국 우리가 불완전한 탓에 '사랑'이라는

혜택을 누리는 대신 그 대가로 사탄이 주는 고통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작품이 이야기해 주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

작품 여러 곳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 보게 하는 문구가 여럿 나온다.

 

- 행복할 때는 행복에 겨워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너무 행복해서

   그분이 우리를 주장하시는 게 간섭으로 여겨지기조차 하는 그 때, 우리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그 분께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면 두 팔 벌려 환영을 받을 것이다.

 

- 만약 하나님이 '사랑의 대용품'이었다면 우리는 그분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어 버려야

   옳다

 

-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 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 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

   나는 의심할 것이다.'

 

- 과거는 과거이며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고, 시간 그 자체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며,

   천국이란 '이전 것은 지나가 버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뇌의 깊이가 남다른 분의 짧은 이야기이지만 그 어느 작품집보다 신앙적, 심리적 성찰의

깊이가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래의 단락은 내가 작품을 읽으며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단락으로 모두 음미했으면 해서 여기에 옮겨 보았다..

[왜 사람들은 모든 괴로움이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다고 확신하는 걸까? 기독교 세계에서

  도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고 동방에서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작품 저자의 부인)가 안식한다고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다른 것은 제쳐 두더라도, 남은 사람을 이토록 괴롭게 하는 이별이 떠나는 사람에게는

  왜 고통스럽지 않단 말인가?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 품 안에 있기 때문이다'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하나님 품 안에 있었으며 나는 하나님의 손이 그녀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봐 오지 않았던가. 우리가 육신을 벗고 나면 하나님이 갑자기 더 다정하게 대해

  주시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인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일관성 없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다가 말다가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선하지 않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승의 삶에서 그

  분은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보다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보다 더한 고통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가 말이다. 만약 일관성 있게 고통을 주시고자 한다면, 죽은 후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주실 수 있으리라. 어떤 때는 '주여 주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때는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힘들다. 그러나 우리의 믿는 바가

  진실이라면, 하나님은 그렇게하지 않으셨다.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셨던가]

                                                                                                                  (50~51)

 

작품을 읽으며 나 역시 우리들에게 부지 불식간에 다가 올 수 있는 '슬픔'에 대한 생각을

잠시나마 짧게 해 보았다. 작품의 결론처럼 죽음으로 인해 찾아온 '슬픔'이란 어떤 행위의

종결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사계절의 변화처럼 '우리 생의 한 과정'이라는 작가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사계절이 순환하듯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사랑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게 인생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죽음으로 인해 다가 오는 이별을 인생의 끝으로만 여기지 말고 인생의

한 과정 자체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제일 아름다운 결론을 내릴 수 있게 오늘을 감사하며

충실히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약하기 그지 없는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이 순리이고 살면서

주님께 의지한다면 그러한 삶의 모습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한없는 사랑, 한없는 관심을

보이시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작품을 읽고 나름대로 내린 작품의 결론이다.

 

오늘 아침 출근 길에 우연히 듣게 된 찬송가 310장이 지친 몸으로 하루를 열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직장으로 나서는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1.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 해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2.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 해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3. 왜 내게 성령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 해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4. 주 언제 강림 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 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 해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작품의 서평을 덮으려는 순간 우연히 마주한 어느 신문의 칼럼에서 읽은 글인데 작품의

주제와 너무도 맞아 떨어져 여기에 옮겨 본다.

 

"우리가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과 직접 가서 마주하는 실제 모습은 크게 다르다.

 사진은 '관점'을 가지고 봤고, 직접 가서 목격하는 것은 '광경'을 봤기 때문이다.

 ‘광경이 눈에 보이는 현상 그 자체를 말한다면, ‘관점은 그 광경을 어떤 입장과 의미를

 가지고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왜 똑 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불평하는데 어떤 사람은 감사와 기쁨이 넘칠까요.

 전자는 광경을 봤기 때문이고, 후자는 그 광경을 관점의 눈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바라 보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광경이 달라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광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광경을 해석하는 관점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광경에 붙잡혀서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불행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광경을 경험하고도 해석, 즉 관점이 다르니까 그래도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끌려가 고생하다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요셉은 식량을

 구하러 온 자기 형제들을 보고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45:7)

 

라고 고백합니다.

왜 오늘 요셉의 신앙이 아름답습니까.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형제들 앞에 이렇게 고백

했어야 합니다.

"형님들이 나를 시기 질투해서 팔아 버려 고생하다 이 곳 애굽까지 끌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저도 안 찾으시고 뭐 하셨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광경이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그 아픔을 영광의 면류관으로 바꾸는 믿음의 관점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광경을 믿음으로 해석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 역시 두려움과 괴로움 속에 살아간 날이 더 많겠지만, 그가 다시 목에 힘을 주어

하나님이 먼저 나를 이 곳으로 보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비결은, 자신의 광경을 믿음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당하고 있는 광경을 보면 억울하고 섭섭하고 두려워

집니다. 그런데 믿음의 관점으로 보았기에 도리어 '용서''감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 고난은 변장된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저절로 축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 때문에 평생 상처를 끌어 안고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을 만났을 때, 광경을 믿음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그 고난으로 인해 성장하게 될 것을 보는 눈이 있으면 조금은 그 아픔을 기쁨으로 넘겨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믿음의 관점으로 살기에, 고난 중에도 인내할 수 있으며, 고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관점이 없을 때에는 나의 실패와 무능력함 때문에

괴로워했지만, 이제는 믿음의 관점으로 나의 실패도, 나의 약함도 간증하게 하시고, 선교의

도구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 오산 하늘 땅 교회 이재학 목사님 칼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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