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여행 - 걸으면 행복한 길 23
신영철 글 사진 / 생각을담는집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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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걷는 숨겨진 명소 여행

 

책이란 참 묘하다. 어느 날 집어든 책들이 운명을 바꾸기도 하고, 삶의 굴레를 탈피해 전혀 다른 세상으로 이끌고 가기도 한다. 그곳에 앉아 세상을 여행하고 역사를 관통하는 예지를 갖게 한다. 그러나 생각이나 상상이 아닌 삶 자체를 이동시켜 버린 적도 많다. 책의 힘이란 어떤 의미에서 혁명적이고 불순한 것이다. 이 책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20여년을 홀로 걸어왔던 흔적을 담았다. 사진도 직접 찍어 올렸다. 신영철, 이름도 맘에 든다. 특히 나의 고향도 사진도 몇 컷 올려놔서 그런지 책이 더 정이 간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많다. 이 책이 더 맘에 드는 건 사진이 많다는 것과 중급이상의 사진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도 사진의 초보는 아니다. 아무리 글이 좋아도 사진이 잘 못나면 책을 덮고 싶어진다. 최소한의 배경과 구도는 가지고 있어야 참고 넘어간다. 이 책은 그런 수준을 넘어 멋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래서 글도 쏙 들어 온다. 문장력은 약하지만 사실적 표현과 체험이 가득한 글이 현장성을 살려 준다.



여행 서적을 읽다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다 거기서 거기다'는 생각이 떨칠 수 없다. 아무래도 책을 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을 우선적으로 여행한 탓이리라. 팔리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대중성을 떨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담, 동일한 장소 비슷한 공간을 어떻게 할까.

 

방법의 문제다. 저자는 스스로를 '느림보'로 정의했고, 여행도 걷는 여행이다. 이것은 중요한 방법이다. 차로 가서 편하게 한 바퀴 돌고 오는 여행이 아니다. 최소한 1박2일은 잡아야 갈 수 있는 곳이 많다. 여행을 위한 여행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목차를 넘기고 나면 바로 다음 페이지에 걷기 여행을 위한 12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제목만 옮겨보자

1. 여행코스 선택하기

2. 짐 꾸리기

3. 복장

4. 식사와 간식

5. 스트레칭

6. 길 찾기

7. 안정보행

8. 에티켓

9. 휴대폰 배터리 관리

10. 귀가

11. 숙박

12. 여유

 

제목만 봐도 저자가 베테랑임을 직감한다. 특히 안전보행에서 차와 마주보며 걸으라는 충고는 쉽게 깨다는 것이 아니다. 운전자나 보행자나 모두 안전을 위한다면 서로 마주봐야 좋다. 뒤에서 갑자기 차가 추돌하며 피할 수 없다. 앞에서 오는 차는 어느 정도 대처도 가능하기에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다. 소소한 배려가 보인다.

 

이곳저곳 다니며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풍경을 담아 글로 풀어냈다. 고향 지근인 장흥이 야기는 약간의 충격이었다. 수십 번 지나쳐간 곳인데 고인돌 공원이 있다는 말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장수풍뎅이 마을도 처음이다. 보림사는 익히 들어 알지만 가본 적은 없다. 문득 치적에 이런 곳이 있나 싶어 미안하기도하고 호기심도 생긴다. 



구석구석! 이말 말고 이 책을 표현할 말이 없다. 저자의 지독한 열정이 가득하다. 등에 작은 배낭을 매여 시골 버스터미널에 내려 국밥을 먹고 구멍가게 주인과 대화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이오덕 선생은 글이 곧 인격이란 했다. 저자의 글을 보니 착한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차분히 글이 읽히고 낯설음에 대한 경계심보다는 낯선 이들과의 아름다운 정다운 이야기가 들려온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좀 더 성찰이 있는 문장을 곳곳에 심어 놓으면 어떨까 싶다. 위대한 작가는 아닐 지라도 여행을 통해 알게 된 인생의 맛, 존재 의미들을 여기저기 뿌려 놓는다면 읽는 이로 하여금 사색의 기회도 주지 않을까 싶다. 그냥 여담이다. 앞으로 여행하게 될 독자의 몫이기도 하리라. 사진과 글이 어우러진 책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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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낙서


필사적이다. 오늘을 잡기 위해서. 누군가의 소식도 듣지 못한체.

거리를 거닐다 횡한 생각이 든다. 왜 아무도 없지? 시장인데? 

그게 궁금한게 아닌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시장인데 왜 사람이 없냐구? 가끔 몇 사람이 지나치지만 왠지 횡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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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이 참 좋다.


알라딘이 좋다. 오지랍 넓은 성격이라 다른 인터넷 서점도 헤집고 다녔지만 결국 알라딘으로 최종 결정. 무슨 이유이겠는가. 글쓰기가 최고라는 점을 든다. 크롬를 사용하는데 알라딘 만큼 잘 열리거나 잘 써지는 서재가 없다. 인터파크나 교보 같은 경우는 낯설고 어색하다. 몇 달 동안 집중해서 글을 올리고 나름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원했지만 쉽지 않다. 특히 인터파크의 경우는 크롬과 맞지 않는다. 어쩔때는 크롬을 종료하고 익스플로어를 띄워야 글쓰기가 가능하기도 하다. 힘들다. 


 어떤 녀석이 집 앞에 꽁초를 버리고 갔다. 이런 녀석들은 얼굴만 봐도 안다. 거의 끝까지 피운 걸 보니 청년이거나 중고생이다. 성인들은 건강을 위해서 끝까지 물지 않는다.


작년에 즐겨 읽었던 셜록홈즈에서는 사용하는 물건을 통해 사람의 인상착의나 성경, 심지어 학벌이나 배경까지 알아 내는 장면이 나온다. 대단한 홈즈다. 아니면 작가인 코난 도일이 대단하던지. 한 인간에 대한 천착이 만들어낸 위대한 소설임이 분명하다. 요즘은 시간이 나질 않아 거의 읽지 못하지만 두고두고 읽을 책임에 분명하다. 


요즘 읽고 싶은 책이 몇 권 보인다. 단연코 최고는 조정래 선생님의 <정글만리> 시리즈다. 지난 달 아내에게 사준 <태백산맥>은 그대로다. 아내가 역사소설은 읽기 부담스럽단다. 그럴꺼면 내가 좋아하는 책을 살껄 약간 후회가 된다. 그대로 명작이니 시간 나면 읽을 참이다. EBS에서 방영한 <자본주의> 또한 매력적인 책이다. 마지막 한 권은 바로 <미생> 첫 권을 더 나가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요즘 나온 최고의 책이 아닐까 싶다.















공감이란 결국, 그가 아닌 너와 나로서의 마음이 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단화된 객체가 아닌 존재와 존재로서의 조우처럼 아름다운 것이 없다. 알라딘에서 공감까지 왔다. 알라딘의 편리함은 사용자 중심의 공감이 아닐까 싶고, 읽고 싶은 책 또한 마음이 통할 것 같은 기대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소망이 있는 법이다.


알랭드 보통의 책은 잘 읽지 않는다. 한 권있는 책 <무신론자의 종교>를 읽고 참 글을 잘쓴다는 생각을 했다. 보편적이면서도 마음 깊숙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덤덤하게 그려준다. 종교에 극성인 사람이 보면 자신의 종교를 폄하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가 이번에 신간을 출간했다. 제목이 특이하다. <영혼의 미술관>이다. 왜 종교적 색체가 짙은 제목을 정할까? 그만의 노하우? 아니면 성격? 아니면 번역자의 생각? 하여튼 그의 책은 사고 볼 일이다. 찾아보니 그것 말고도 제법 책이 많다. 독자층이 탄탄한가 보다. 좀더 그에 대해 알아보아야 겠다. 

지루한 금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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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0-12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의기쁨과슬픔,도 표지가 바뀌어 새로 나왔군요. 글쓰기 좋은 알라딘에 전 요새 뜸한데 곧 돌아오겠어요^^ 낭만인생님과는 달리 오지랖 안 넓은 전 다른 곳에는 가보지도 않지만요ㅎㅎ 즐거운주말 보내세요^^.

낭만인생 2013-10-12 11:50   좋아요 0 | URL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라딘이 글쓰기에 편하네요.. 쭈욱 이곳에 머물 생각입니다.
 

메타언어 (meta言語)란?


메타언어가 뭘까? 금시초문이다. 메타도 알고 언어도 알건만 두 단어의 요상한 합성어인 '메타언어'는 모르겠다. 도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더이상 이해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요즘 시대가 좋은 건 국어 사전에 없어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쉽게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네이버 검색을 통해 알아 보았다. 


[명사] <언어> 다른 언어를 기술하거나 분석하는 데 쓰는 언어. 영어 문법을 한국어로 설명할 경우에 한국어를 말한다.


먼저, 명사다. 당연한 것이지만. 뜻풀이를 보면 다른 언어를 기술하거나 분석하는 데 사용하는 단어다. 이 언어를 처음 발견한 곳은 경향신문에서다. 논설위원인 이대근이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조의 논지를 펼치면서 사용했다. 용례를 직접 인용한다.(사이트링크)


 성장, 경쟁력, 성공 같은 메타언어의 틀 안에 갇혀 있던 한국 사회를 깨우는 변화의 신호인가? 


메타언어가 다른 언어를 기술하기 위한 언어라면 위의 용례는 틀렸다. 그러나 메타언어의 용도를 포괄적으로 잡으면 용납할만하다. 즉 박근혜 정부를 기술하는 용어로서 '성장' '경쟁력' '성공' 등을 사용했다면 말이다. 다른 용어를 설명하기 위한 단어로서의 활용이다.


혹여나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나 싶어 다시 위키백과 사전의 검색을 시도해 보았다. 맞았다. 


메타언어는 대상을 직접 서술하는 언어 그 자체를 다시 언급하는 한 차원 높은 언어로서 고차언어(高次言語)라고도 한다.


조금 길지만 위기백과사전의 설명을 그대로 카피했다.


가령 ‘4+4=8’이라는 등식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 것 자체는 수(數)라는 대상에 관해 말한 대상언어이나 ‘4+4=8은 산수의 명제이다’는 메타언어이다. 이처럼 차원이 낮은 제1의 언어를 대상언어(對象言語)라고 하며 여기서 대상 언어의 진위여부에 대해 다시 한 번 언급 하는 언어가 메타언어가 된다. 대상언어는 ‘눈은 하얗다’ 또는 ‘1: 2번 문장은 참이다’와 같이 참, 거짓의 판별을 포함하는 문장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러한 대상언어의 참, 거짓을 판별하는 메타언어는 ‘눈이 하얗다는 것은 참이다’, ‘2: 1번 문장은 참이다’와 같이 대상언어 전체를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대상언어보다 훨씬 길고 상세하게 서술된다. 또한 메타언어와 대상언어 양자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메타언어라 할지라도 보다 높은 메타언어에 대해서는 대상언어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A: 서로 평행인 두 직선은 영원히 서로 만나지 않는다. B: A 문장은 참이다. C: B 문장은 참이다와 같은 세 개의 문장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A문장은 단순히 기하학적 대상에 관한 정리를 나타낸 것으로서 이것의 진위여부를 서술하는 B문장에 대해서 대상언어이자 목표언어가 되고 따라서 B문장은 A문장에 대한 메타언어가 된다. 마찬가지로 B문장의 진위여부를 나타내는 C문장은 B문장에 대한 메타언어가 되고 B문장은 C문장에 대한 대상언어가 된다. 이러한 언어의 계층성은 사다리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는데 사다리의 각 단은 위의 단에 대한 대상언어가 되며 사다리의 맨 첫째 단을 제외한 모든 단은 밑의 단에 대한 메타언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메타언어와 대상언어의 계층 고리는 무한대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메타언어란 더 대상을 더 풍부하고 깊게 설명하고 해석하기 위한 보조적 기술이다. 메타언에 관련된 서적을 검색해보니 없다. 그러나 메타언어를 통해 해석하고 분석한 책들은 종종 있다. 한 단어에 따라오는 많은 단어의 세계가 즐겁다. 공부는 하면 할 수록 할게 많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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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e30 2014-11-0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타언어란 말은 기호학에서 오랫동안 쓰여온 용어입니다.

안드로인 2015-01-14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도 이해가 안되네요.. 어렵다~ 이해 안드로메다..

dddd 2021-06-13 16:1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ㅋㅋㅋㅋㅋㅋ
 
묵상의 여정
박대영 지음 / 성서유니온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삶의 여정에서 만난 하나님

 

참 맘에 드는 책이 한 권 출간 되었다. 오랫동안 성서유니온 선교회에서 몸 담아왔고, 영국 바이블 칼리지에서 유학한 성서주의자다. 굳이 목회자가 아닌 성서주의자로 명명하고픈 이유는 박대영목사가 기록된 말씀인 성서를 지극히 사랑하고 성서한국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소명을 잇는 자'(translator)로 생각하고 언어를 옮겨주는 역할을 자처한 때문이다. 광주 참누리교회를 개척한바 있으며, 2012년부터 현재까지 광주 소명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하고 있다.

 

이 책에 눈길이 가는 건 순전히 묵상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넓혀주고 진지한 성찰과 인문학적 사유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냥 묵상집이 아니다. 일종의 묵상 소개집 이면서도 단순한 묵상의 원리를 가르쳐주는 교과서가 아니다. 마치 친구처럼 나의 곁에 다가와 이야기하고 연인처럼 함께 애틋한 눈길을 보내주고, 아버지처럼 우둔함을 깨우친다. 여행자의 후기 같다. 그래서인지 실존적 삶에 더 깊이 유비적으로 투영된다.

 

 

친구가 돌아왔다. 먼 길을 둘러서 돌아왔다. 취루가스 잔뜩 묻히고 술 한 찬 걸친 채 "교회가 그럴 수 없다"며 떠났던 그 선량한 친구가 다시 돌아왔다.

 

1장을 시작하면서 여는 문장이다. 소설은 분명 아니다. 문장력을 과시하기 위한 글쓰기 교재도 아니다. 그럼에도 존재로서의 성찰을 묻는 삶의 여정과 갈등이 보인다. 작가로서의 탄탄한 문장력도 읽는 데 맛을 더해준다. 다음 문장은 어떤가?

 

편해지고 익숙해지면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불편하지 않은 이상 모든 것에 순응하고 감각이 전하는 대로 군말 없이 받아들인다.(55쪽)

 

낯섦을 회복하는 여정이란 제목으로 시작되는 3장의 두 번째 페이지의 한 문장이다. 익숙함은 배교다. 오랫동안 익숙해져버려 더 이상 설렘도 기대도 없는 신앙은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다. 그러지 저자는 성경을 낯설음으로 대하라고 충고한다. 철학적으로 이것을 타자성이라 부른다.

 

"신앙에 있어서 타자성의 상실은 자아 통제력의 상실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신앙에 있어서 타자는 하나님이요 그분의 계시인 성경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받은 사람이요 그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이런 것들에 익숙해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대상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59쪽)

 

분명 철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으리라. 내지 저자 소개란엔 없다. 인터넷 서점을 들어가 저자를 검색해 봐도 더 이상 알아낼 길이 없다. 놀라운 건 무려 19권이 박대영이란 검색어 결과물을 보여준다. 작년 초 SU LTC 훈련에서 산 존 베일리의 [매일기도] 역시 저자의 번역물이다. 매일기도를 읽으면서 번역이 참 잘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일 예배를 인도하면서 종종 베일리의 기도를 참고한 기억이 생생하다. 군더더기 없는 번역과 본 저자의 의도를 명확하게 우리의 언어로 번역했다. 참으로 그는 언어 옮김이다.

 

낯설게 만났다. 그래서 더욱 긴장되고 기대된다. 앞으로 멋진 저자와의 조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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