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유라 옮김 / 한경arte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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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는 1438년부터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지켰으며 유럽의 명문가로 불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경 현재의 프랑스 북동부 지역인 알자스에서 스위스에 걸쳐져 있는 작은 영주 군트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1세기 스위스에 성 합스부르크를 쌓은 후로 합스부르크 백작이라고 불렸는데, 아마 백작 스스로 명명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현재 독일 지역인 신성로마제국에 20년가량 황제가 없었던 대공위시대 이후 실력 있는 황제의 출현을 꺼린 독일 귀족 여럿이 일부러 보잘것없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합스부르크 집안의 루돌프 1세를 1273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때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일은 물론 프랑스와 스페인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서는 세계 1차 대전 발발의 원이 중 하나가 될 것임을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던 루돌프 1세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 내 여러 귀족과 결혼으로 협약을 맺어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영국까지 자신의 영토를 넓히려고 한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온 유럽이 합스부르크 가문 아래에 놓이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테지만 원래 역사는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은 진리라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핏줄은 역사에만 남아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먼저 스페인에서는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가 스페인의 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2세 왕의 딸 후아나과 결혼을 하여서 160년 정도의 기간 동안 스페인을 통치한다. 왕이 고용한 궁정화가에 의하여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의 그림이 남아있으며 이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내가 눈으로 직접 본 그림에 대하여 미술사적으로 꽤 재미있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펠리페 2세가 영국의 메리 여왕이나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외교 결혼을 성공적으로 이어나갔다면 우리는 프라도 미술관에 걸려있는 메리 여왕이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그림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경우 미술보다는 뮤지컬로 익숙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뮤지컬 엘리자벳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내이자 왕비였던 엘리자벳의 이야기이며, 황태자 루돌프의 경우 엘리자벳의 첫째 아들 루돌프에 대한 내용이다. 각종 영화와 예술작품으로 유명하고 뮤지컬 마리 앙투아넷으로도 한국에 알려져있는 프랑스의 비참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경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필멸은 순수 혈통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보다 먼저 대가 끊긴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가는 역사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4촌 이내의 근친결혼으로 인하여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고 에스파냐 왕가의 마지막 계승자였던 카를로스 2세의 경우 심한 주걱턱에 부정교합 때문에 음식물을 제대로 씹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후대를 남기지 못하였으며, 이후 스페인의 왕족은 프랑스 부르봉 가문이 차지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경우 스페인보다 상황이 나았으나 역시 정략혼과 순혈주의, 카톨릭 국가와의 결혼을 추구하다 보니 결혼을 할 상대는 거의 정해져 있었고 내부에서의 권력 다툼도 심한 편이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 3세에게 속아 멕시코 황제가 되기 위해 바다를 건넜으나 결국 그곳에서 시민에게 총살되는 운명을 맞았으며, 프란츠 요제프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모두 알다시피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고 이는 세계 1차 대전의 발발의 원인이 된다. 합스부르크가는 650년이라는 시간 동안 온 유럽에 중요한 역사적 내용은 다 뿌려두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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