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조커를 봤다. 스페인에서 본 몇 번째 영화였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세는 타입은 아니니까.
영어로 말을 하고 스페인어 자막이 지나가는 영화 조커는 이따금씩 너무 어려운 단어가 나타났다. 영어로도 스페인어로도 알 수 없는 단어 때문에 영화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아니 사실 모국어로 들을 수도 읽을 수도 없었기때문에 영화 조커를 보는 것이 힘든게 아니었다. 흡사 호아킨 피닉스의 1인극 같았던 영화 조커에서 주인공 아서 플렉이 처해진 상황이 너무 힘들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길거리의 개념없는 청소년 무리가 그가 일을 못 하게 하고 집단 폭행을 하는 상황에서부터 그의 삶이 꼬였다는게 여실히 느껴졌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고, 그는 힘들게 살았다.
아서 플렉의 살인과 조커로 대변되는 광기에 대해 동의하고 싶지 않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폭력은 그리고 살인은 해서는 안 될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상황에 공감했고 그가 악에 바친 감정에 동의했다. 어디에서든 늘상 자주 겪는 일이니까. 한국에서는 비건이라는 이유로 스페인에서는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받고 많은 사람이 차별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나를 대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커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 아니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깔보는 사람은 폭력으로 응징하지 않는 이상 개념이라는 것을 챙기고 다니지 않거든. 대화로서 공감하자는 말은 개념이라는 것을 챙길 때 할 수 있는 소리이다.
스페인어 더빙판으로 한 번 더 보려고 했지만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아 그만뒀다. 조커를 2번 본다면 내 마음이 너무 어두워질 것 같았다.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제발 개념을 챙기고 다니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그러다 너 죽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