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자의 가슴골과 허리까지 살펴보는 것으로 99%의 평가를 끝냈고, 여자는 3초도 되지 않아 그 남자의 전신과 양말 색깔까지 살핀다. 참고로 여자는 잘난 남자의 가능성을 0.1초 만에 파악한다. 지금의 모든 평가는 모두 무의식적인 계산이다. - P-1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고통받는 이유, 모든 인간관계를 파멸로 이끄는 제1원인은 바로 ‘타인에 대한 그릇된 나의 기대’라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그릇된 기대 또한 전형적인 투사 현상이다. - P-1

그릇된 기대란, 자기 결정권을 가진 성인이 1) 이기적인 마음으로 2) 관계에서 오는 위안과 혜택을 누리기 위해 3) 상대에게 추가의 능력을 바라는 행위다. - P-1

어떤 대상에 대해 과한 기대와 환상을 품는 행위는 미숙함의 상징이다. 역으로 어떤 것에 전문적이고 능숙할수록 대상에 대한 기대가 없어지는 법이다. - P-1

같은 맥락으로 인간관계에 미숙한 사람들은 시작부터 상대에 대해 과한 기대를 품고, 상대가 자신의 기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보이면 크나큰 실망을 한다. 인간관계, 우정, 연애, 결혼을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인생을 구원해 줄 황금 동아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가 황금 동아줄이 아니라 썩은 동아줄이라 여겨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빠진다. 멋대로 기대한 본인의 탓이 아니라 기대를 채워주지 못한 상대에게 모든 감정의 칼날이 향한다. 기대를 충족하지 못해 생긴 분노는 집착, 상대에 대한 핀잔, 과도한 요구 등 정서적 폭력으로 이어지며 결국 둘의 관계는 파멸에 이른다. - P-1

대상에 대한 그릇된 기대와 환상은 특히 연인 관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 P-1

그래서 ‘이상화’는 많은 사람이 사랑이라 굳게 믿지만, 사실 사랑이 아니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며, 사랑을 지속하기에는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 P-1

지극히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상적인 이미지와 추상만을 훑어보고 사랑에 빠진 뒤 그 모습을 상대에게 기대한다. 그리고 기대했던 모습과 다른 상대의 모습을 보며 실망하고 기대를 채워주지 못한 상대를 탓한다. - P-1

진화학적으로 여성들은 ‘헌신 회의 편향(남성의 호감 표시를 의심하며 평가하는 심리, 상대가 친절을 베푼다고 본인에게 호감이 있음을 확신하지 않는다)’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민지는 더욱더 긴가민가한 상태로 집에 돌아갈 것이다. 물론 보통의 여성들은 이런 상황에서의 불안감을 동성 친구와의 대화로 푼다. 민지는 집으로 돌아가는 60분 동안 친한 동성 친구와 오늘 느낀 세부적인 감정과, 데이트한 남자가 본인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열렬히 토론할 것이다. - P-1

남성의 태도 변화 앞에서 여자가 느끼는 좌절감은 "오빠, 변했어"라는 다섯 단어로 일축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남자의 태도가 빨리 변할수록 그는 ‘건전한 오빠’일 가능성이 높다. 이성에 대한 지나친 친절과 몰두는 관계의 장기적인 안정성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P-1

우리가 관계에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점은 상대가 로맨틱하지 않음이 아니라 ‘개인적 일상의 무너짐’이다. 각자의 일상이 무너진다는 의미는 관계 당사자가 개인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뜻이며, 개인적인 성장이 없다면 두 사람의 관계도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고 귀결된다. - P-1

하지만 인류 생태학자 칼 필레머Karl Pillemer와 코넬대학교 연구팀에 따르면 결혼 생활의 온전한 유지에 가장 중요한 변수는 첫 만남 장소가 아니라 핵심 가치관의 공유다. - P-1

물론 애착 유형은 절대 바꿀 수 없는 낙인이 아니다. 노력으로 충분히 바뀔 수 있다. 한 가지 반가운 사실은 안정 애착 유형을 가진 사람은 ‘완충 효과’가 있다. 연애 상대방 중 한 명만 안정 애착 유형이 되어도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 P-1

문제는 우리가 사람마저 소유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물질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개념 또한 소유의 범주로 이동했다. 보통 상대방의 연애 여부를 물어볼 때 "너 애인 있어(Do you have a lover)?"라는 질문을 한다. 파고들면 굉장히 어색한 표현이다. 인간은 사랑을 가지는(Have)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도록(Do)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할 수 있을 뿐 사람을 가질 수는 없다. - P-1

그들에게는 자연도, 사람도 소유하지 않고 일부분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자연스러운 존재 방식이며, 우리가 아무리 천문학적인 자산을 가져도 사람의 따뜻한 손길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고, 상대를 나에게 귀속시키기 위해 집착할수록 불행해지는 이유다. 인간은 어떤 대상도 소유할 수 없으며, 이룰 수 없는 존재에 욕심낼수록 불행해지는 결과는 당연한 이치다. - P-1

시장 교환 시스템이 거대 사회를 순환시키는 불변의 시스템으로 정착하면서 ‘인간관계’에서도 같은 시스템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많은 현대인이 비생산적인 성격의 사랑을 한다. 바로 시장교환형 사랑이다. 시장교환형 사랑은 철저히 자본주의의 교환 원리에 기반한 관계를 지향하는 사랑이다. 상대가 제공하는 만큼만 주고, 손해를 보거나 상처를 받게 될 경우 바로 관계를 정리하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 P-1

사실 인간관계는 ‘나랑 한 번 친해지면 백색이고, 멀어지면 영원히 흑색이다’ 같은 단순한 흑백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손 하나 까딱 안 하면서, 어떤 고통이나 상처 없이 좋은 관계를 꾸준히 유지할 방법은 없다. - P-1

물론 공동체 지향적인 사람들이 보상을 아예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준 만큼 받기를 기대한다. 이 둘의 차이는 원하는 보상을 받지 못했을 때의 차이다. 공동체 지향적인 사람들은 원하는 보상을 받지 못했어도 크게 실망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목적 자체가 주는 것이었고, 지금 당장 보상받지 못했어도 상대에게 신뢰를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 기뻐한다. 또한 신뢰 있는 관계를 얻는 일이 매우 어렵고 그만큼 가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반면에 교환 지향적인 사람은 원하는 보상이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을 때 분노하고, 상대를 악마화한다. 교환 지향적인 사람들의 속내는 대개 음침하고 자기기만적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즉 원하는 보상과 선물을 기대하고 줬으면서 원하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을 때 자신의 이기심을 선의로 포장하는 동시에 상대를 악마화하는데 능하다. - P-1

즉 모든 인간관계의 목적은 ‘하나됨’이 아니라 더 나은 개인, 더 성숙한 독립 개체로서의 성장이다. - P-1

강렬한 끌림으로 시작해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라고 여기는 커플일수록 아주 사소한 갈등으로 쉽게 갈라진다는 사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모두 동의할 테다. - P-1

상대를 멋대로 ‘이상화’하고, 일상생활이 흔들릴 정도로 욕망이 ‘침습’한다. 상대를 ‘독점’하려 하고, 그와 모든 것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집착에 휘둘린다. - P-1

30년을 넘게 사랑하며 오랜 세월을 함께한 노부부는 성숙한 사랑의 진실을 구체적으로 안다. 그들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습까지 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노부부의 아내는 30여 년 전 남편의 주도적이고 강단 있는 모습에 반했지만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나니 이면에 숨겨진 가시인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독단적인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노부부의 남편 또한 아내의 수용적이고 부드러운 표현력에 매력을 느꼈지만, 그녀의 장점에는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지 않아 소통이 어렵다는 단점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노부부는 그렇게 서로의 진짜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하기 시작했다. - P-1

사랑에 빠진 우리들은 해수면 위에 노출된 빙산의 아주 작은 부분만 보고 그것이 빙산의 전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람의 매력과 인격은 지극히 입체적이다. 책임감 있는 사람의 해수면 밑에는 ‘거만함’이라는 숨겨진 빙하의 본질이 숨겨져 있으며, 수용적이고 부드러운 인격을 가진 사람의 이면에는 ‘겁이 많음’이라는 인격적 특징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 - P-1

가 ‘그런 남자가 원하는 걸 내가 줄 수 있을까? 그런 능력이 있는가?’라는 물음이 가장 중요하다. 인간은 받는 행위만으로 지속적인 행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이 무엇을 받을지 생각하기 전에, 내가 바라는 그 사람을 위해 내가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지부터 정의해야 한다. 상호작용이 없는 관계는 곧 취소될 관계다. 추상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사랑의 정밀화를 그리려면 구체성이 필요하며, 구체성에는 언제나 ‘우리’가 포함된다. 진실된 관계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우리’가 하는 것이다. - P-1

본능적 사랑에 휘둘리는 사람일수록 그런 환상 속의 존재가 내 지루한 일상을 구원해 주리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타인이 나의 삶을 구원해 줄 거라 믿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타인은 우리의 삶을 구원해 줄 수 없으며, 나는 오직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 - P-1

많은 커플이 초기의 열정적인 마음이 희미해지고 지루한 일상적 관계가 지속될 때 지금 느끼는 감정이 ‘권태기’인지, ‘헤어져야 하는 신호’인지 헷갈리곤 하는데 이를 구분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감사함이 있는가’이다. 연애 초의 뜨거운 마음이 없어도 서로에게 감사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관계다. - P-1

인간관계 또한 돈처럼 주체들이 자유의지에 따라 알아서 움직이고 자연스레 흐르는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메신저로 백 번 집착한다고, 방에 가두어 소유한다고 상대방의 마음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은 그냥 본인의 의지에 따라 알아서 움직인다. 초조한 마음에 매매 횟수, 행동을 늘릴수록 상대의 마음은 더 멀어진다.

돈과 관계는 흐르는 물과 같다. 흐르는 강물과 시냇물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곳곳에 앉아 관조하는 태도이다. 물을 원한다고 아무리 잡으려 노력해도 절대 잡히지 않는다. - P-1

타인과 내가 맺는 관계의 수준은 내가 나와 맺는 관계의 수준과 동일하다. - P-1

사랑하는 사이라면, 아무리 끈끈한 관계여도 상대의 성장과 더 나은 독립적 인간으로서의 발걸음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이기 전에 너이고, 나이며, 개인이다. 더 나은 우리는 더 나은 너와 나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 P-1

부모님도, 성장 배경도, 성격도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형성하고 공동체 감각을 기르는 일에는 필연적으로 불편함과 감정적 상처가 수반된다. 이는 가스라이팅이 아니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엇보다 깊은 관계, 사랑을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개인이 직면해야 하는 부정적인 감정과 고통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다면 회복탄력성이라는 내면의 근력을 기르지 못한다. 내면의 근력이 부족하면 어떤 사람과도 깊고 장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 기회의 부재는 능력의 상실을 낳고 악순환으로 무한하게 이어진다. - P-1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삶을 잘 살아내려면 공동체 감각을 길러야 한다. 진정한 공동체 감각이란 타인이 나와 다른 사람임을 항상 명심하며 살아갈 때 길러진다. 더 나아가 ‘타인은 내가 절대 변화시킬 수 없다’는 마음을 견지해야 한다. - P-1

타인, 파트너, 배우자는 내가 절대 변화시킬 수 없다. - P-1

어떤 상황이 와도 남 탓을 할 수 있는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자기기만은 참 영리한 전략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런 여자를 정말 가볍고 천박한 여자라고 말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 P-1

자기기만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포용적인 성향’과는 다르다. 상대의 의견에 잘 따라주는 성격은 아무 문제가 없다. 수동과 수용은 다르다. 수용적이지만 자기기만을 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에게 따르기로 한 결정도 내 선택이기에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상대 탓을 하지 않는다. - P-1

수많은 실존주의 철학자가 ‘자기기만’에 대해 수십 년 넘게 연구한 이유가 있다. 자기기만하지 않는 것, 내가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지는 태도, 이것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인간다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자기기만이 일상인 사람은 짐승에 가깝다. 짐승과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P-1

모든 걸 이해하는 것은 신의 능력이다. 반면에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상위의 가치이자 능력은 ‘사랑하는 능력’이다. 사랑하고 싶은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배움의 목적은 그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함이나, 신의 권능을 갖기 위함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함’이어야 한다는 것을.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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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이라는 이름의 오멜라스에도 지하실에 쌓인 묵은 쓰레기를 직면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한국 사회의 지하실에 묶여 고통받는 이들을 직면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살을 통해 한국을 떠난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1위권이다. 그들은 출산 거부를 통해 한국을 떠난다. 한국은 인구가 늘지 않아 OECD 국가 중에서 인구 감소 속도가 가장 빠르다. 자신이 속한 곳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 마치 이직을 결심하듯이 사람들은 떠난다. 이민을 하거나 자살을 하거나 아이를 낳지 않거나. - P-1

중년이 되고서야 깨닫는다. 중년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인생은 늘 위기였는데 그저 중년이 찾아왔을 뿐이라는 걸.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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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생각은 침잠이 아니라 모험이며, 그것이야말로 저열함에서 도약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이다.
타인의 수단으로 동원되기를 거부하고,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는 일을 넘어, 타성에 젖지 않은 채, 생각의 모험에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만드는 터전이 바로 생각의 공화국이다. - P-1

그렇다면 가혹행위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남자들이 가지는 폭력성? 일제 식민지 잔재? 그냥 군대문화? 어서 원인을 알려줘! 그것만 도려내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것 같은데! 단일 원인을 찾아내어 단죄하려는 유혹은 강렬하다. 그러나 분명하고 단순한 원인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아니, 그런 것은 없다. 어떤 문제가 오래 잔존해왔다는 것은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많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원인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월호 비극의 뿌리가 한국 사회 전체에 산포되어 있는 것처럼, 많은 문제의 원인은 대개 해당 사회 전체에 퍼져 있다. - P-1

방관이나 총격이나 자살이 대안이 아니라면 무엇이 대안인가? 여기에 쉽고 확실한 답은 없다. 오히려 쉬운 답이 있는 것처럼, 자기는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문제 뒤에 어떤 거대한 음모가가 존재하고 그 음모가만 없애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 문제의 원인만 쉽게 도려낼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 다른 사람은 무관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막연하게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퉁치는 사람, 자기는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약을 파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모든 대안은 그 나름의 부작용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사람, 일에는 비용이 따른다는 것을 감안하고 있는 사람, 기회비용까지 고려하고 있는 사람, 일시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 그러기에 다음 세대만큼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끔 양질의 선택지를 마련해주려는 사람 말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좋은 선택지는 아마 이미 소진되어버렸음을 인정하면서. - P-1

한국이 고담시일지는 모르나 이곳에 배트맨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이라는 고담시를 위해서 한국의 하비 덴트는 자신의 신화를 스스로 재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 역시 예술처럼 픽션을 만들고 유지하는 체제일진대, 소위 진보적 민족주의 서사나 보수 우파적 서사가 미래를 위해 유용한 픽션을 제공할 수 있을까? 한국 고대사를 둘러싼 논란이나 자본주의 맹아 논쟁이나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모두 미래의 픽션을 제공하기 위해 한국의 과거를 경쟁적으로 해석해왔다. 그들의 주장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고 또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일들, 어쩔 수 없었고 동시에 어쩔 수 있었던 일들, 성실했지만 꾸준하지는 못했던 일들,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그러나 때로는 과감했던 일들, 결핍이 있었으나 그 결핍을 메우고자 시도했던 시간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모를 참은 시간들, 저력과 무기력을 동시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이루지 못한 꿈과 대답을 듣지 못한 애착 때문에 미쳐간 시간들이 모두 이 땅의 역사 속에 있다. 문제를 느끼면서도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밤이 왔고,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일들은 벌어지고 있으며, 제대로 갈무리되지 못한 기억들은 베개 밑에 놓여 있다. 고이 접히지 못한 채 놓여 있다. 정치 공동체는 곧 기억의 공동체라는데,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어떤 서사 속에서 살아갈 것인가. - P-1

인간은 변하는가?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타인의 삶>에 나오는 구 동독의 고위 관료는 말한다. "인간은 변하지 않아." 인간을 자기 예측대로 통제하고 싶은 사람은 인간이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이 변하지 않아야 예측하기 쉽고, 예측하기 쉬워야 통제하기 쉬울 테니까. 두고두고 상대를 미워하고 싶은 사람도 상대가 좋게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상대가 변하지 않아야, 자신의 증오가 계속 정당화될 테니까. - P-1

비즐러라는 인간은 어떻게 변할 수 있었나? 외로운 관료적 기계 비즐러는 도청을 통해 그간 자신이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던 예술가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자신이 상상한 예술가들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예술가들의 세계를. 이제 비즐러의 마음에 무엇인가 온다. 이 변화의 순간이란 언제 어떻게 도래하는 것일까. 그 순간이야말로 인간의 통제 영역 밖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변화는 학교에서 수업을 통해 가르친다고 냉큼 오는 것도 아니고, 정부의 계몽 프로그램에 참석한다고 후다닥 오는 것도 아니고, 예술가들의 공연을 감상한다고 반드시 오는 것도 아니다. 어느 의외의 순간, 변화는 일어난다. 비즐러의 경우 가면을 벗은 예술가들의 모습에 직면했을 때 그 순간이 왔다. - P-1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소극적으로 사귀었고 말없이 헤어졌지만, 나는 이것이 우정이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 P-1

"저자의 목을 쳐라!" 세상에 여러 악연이 있겠지만, 목을 베는 사람과 목이 베이는 사람 간의 악연만 한 것도 드물다. 저 사람을 딱히 미워할 것도 없는데, 망나니는 이제 눈앞에 있는 사람의 목을 쳐야 한다. 죽을 사람은 망나니가 직업상 할 수 없이 자기 목을 베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망나니를 좋아하기는 어렵다. 목 베인 이의 자식이 그 망나니를 길에서 마주치면 어떨까. 과연 아무 감정 없이 지나칠 수 있을까. 이 원한은 대를 이어 지속된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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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 법. 그것이 삶의 아이러니다.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자 쓰레기를 모아 태우다가 그만 할머니는 그해의 결실이 모여 있는 창고에 불을 내고 만다. 뇌졸중으로 몸을 빨리 움직일 수 없어서 불타는 창고를 망연히 보고 있어야만 한다. - P-1

삶에 아이러니가 존재한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행동의 결과를 다 통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기피하고, 쉽게 단정하는 이들을 의심하며, 만병통치약을 파는 이들을 경계하고, 쉽게 확신하는 이들을 불신한다.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 삶을 통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영화 <미나리>는 "버티라"고 말한다. 미나리는 버티는 식물의 대명사다. 실로, 삶에 아이러니가 있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아이러니가 있기에 희망도 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불행이 있는 만큼 예상치 못했던 선물도 있다. 아칸소주 시골로 이사 왔을 때, 그 환경 변화가 손자의 심장 상태를 개선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쁜 일만 있는 게 삶이라면 삶은 예측 가능하리라. 삶은 예측 가능하지 않기에, 좋은 일도 있다. 삶의 아이러니는 좌절할 이유도 되지만 버틸 이유도 된다. - P-1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한 모리스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자산과 사회적 지위를 거는 사랑의 모험에 나선다. "영혼을 잃고서 작고 갑갑한 상자들만을 소유한 수백만 겁쟁이들"의 사회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오랜만에 맛보는 정직의 맛이었다." 환희에 찬 모리스를 보며, 클라이브는 사회적 지위는 유지했지만 뭔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열패감에 휩싸인다. - P-1

어떤 점에서 2021년은 한국 역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이다. 연간 기준 주민등록인구가 역사상 최초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발표한 인구통계에 따르면, 2020년 12월 31일 기준 우리나라 등록 인구는 5182만 9023명이다. 이는 일 년 전보다 2만 838명(0.04퍼센트) 감소한 숫자다. 대규모 재해나 전쟁 없이 인구가 이토록 급격하게 줄어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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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허구를 믿을 수 있다. 미천한 인간 세계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할 수 있는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이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길을 가다가 어떤 압도적인 귀여움과 마주치면 가끔 인간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잊기도 하는데,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오늘도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다. - P-1

저항 세력이 권력자가 되어 개혁의 예리함을 잃어갈 때는 곧 정치적 냉소가 자라나기 쉬운 시기이기도 하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으나 약속했던 새 시대가 금방 도래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가 특정 정권의 행태로 환원되지 않을 정도로 뿌리 깊은 것임이 드러난다, 부패한 기득권을 질타하며 집권한 세력 역시 적지 않게 부패했음이 드러난다, 이리하여 정치적 유토피아는 다시 한번 유예된다. 그 유예된 공터에서 예술가들은 도래할 정치적 유토피아에 집착하는 대신 허무와 심연을 보곤 한다. - P-1

이 비극을 끝내는 것이 바로 재앙신으로부터 상처 입은 아시타카,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아 인간을 저주하게 된 모노노케 히메라는 점은 상처 입은 이들에게 용기를 줄지도 모른다. 그것은 상처받은 인간만이, 자신을 넘어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치유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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