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평지에, 편편한 면 위에 발을 딛고 산다. 그렇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열망한다. 땅의 자식인 우리는 때로 신 못지않게 멀리 가 닿을 수 있다. 누군가는 예술로, 누군가는 종교로 날아오른다. 대개의 경우는 사랑으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날아오를 때, 우리는 추락할 수 있다. 푹신한 착륙지는 결코 많지 않다. 우리는 다리를 부러뜨리기에 충분한 힘에 의해 바닥에서 이리저리 튕기다가 외국의 어느 철로를 향해 질질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아니었대도, 결국 그렇게 된다. 누군가는 예외였다 해도, 다른 사람에겐 어김없다. 때로는 둘 모두에게 해당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망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랑이 진실과 마법의 접점이기 때문이다. 사진에서의 진실, 기구 비행에서의 마법처럼. - P-1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적어도 우리가 운이 좋다면(혹은 반대로 운이 나쁘다 해도)—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 P-1

‘중요한 건, 자연은 너무나 정확해서 정확히 그럴 가치가 있을 만큼의 고통을 안겨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 고통을 즐기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런 점이 지금까지 문제가 안 되었다면,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 P-1

나는 비탄에 빠진 사람들이 그 아픔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재편성하는지, 어떻게 친구들을 시험하는지, 어떤 친구가 합격하고, 어떤 친구가 낙제하는지를 빨리 깨닫게 되었다. 오랜 우정은 슬픔을 함께 나눔으로써 더 깊어질 수도 있지만, 갑자기 하찮아 보이기도 한다. 젊은 사람들이 중년보다 낫고, 여자가 남자보다 더 낫다. 이런 사실에 놀라선 안 되겠지만 놀라운 건 어쩔 수 없다. 어쨌거나 우리는 나이와 성별과 결혼 여부에서 우리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잘 이해해주기를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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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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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한 여자를 좋아하면 할수록, 또 잘 맞으면 잘 맞을수록 정작 섹스의 기회는 줄어드는 듯하다는 것. - P-1

감정 문제에서 여자들은 전문가였고, 남자들이 거친 초보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라는 말은 교리나 어머니의 권고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반박 불가능했다. - P-1

마거릿은 여자는 두 종류라고 말하곤 했다. 매사에 분명한 여자와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여자. 그리고 이는 남자가 여자를 볼 때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이자, 가장 먼저 그를 매료시키거나 그렇지 않게 하는 요소였다. 남자들마다 끌리는 유형은 각기 다르다. - P-1

그러나 우리가 지금도 가장 중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눈이다. 안 그런가? 우리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가고, 공동담보를 잡히고, 쇼핑을 하고, 요리를 하고, 휴일을 함께 보내고, 서로를 사랑하며 함께 아이를 낳았을 때의 그 사람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그 눈 말이다. 갈라서게 됐을 때도 여전히 똑같았던. - P-1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 학문의 의미가 아니라, 인생을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맥락에서 ‘배우는’ 것이다. - P-1

장담하는데 심리학자들은 어딘가에 연령별 지적수준을 측정한 도표를 꿍쳐놓고 있을 것이다. 분별력, 실용주의, 조직화 기술, 전략적 상식 같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반 사안에 대한 이해력을 떨어뜨리는 것들이 아니라 순수지성의 도표를. 그리고 추측이지만, 그 도표를 보면 우리들 대부분이 십육 세에서 이십오 세 사이에 정점을 찍을 것이다. 에이드리언의 일기 일부를 보고 나는 그 연령대에서 그의 면모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논쟁을 했을 때, 그에겐 사고思考를 정연히 정리하는 것이 마치 태어난 이유인 것처럼, 두뇌를 활용하는 것이 운동선수가 근육을 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 P-1

"사람들이 왜 널 알코올중독자라고 생각하는 건데?"
"그런 사람 없는데."
"그런데 아까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내가 그런 게 아니지. 네가 내 머리숱이 줄었다고 했지. 그리고 술을 아주 많이 마시는 사람들은 술의 특정성분 덕에 머리가 빠지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고."
"정말이야?"
"대머리 알코올중독자 본 적 있어?"
"그런 걸 상상할 시간이 있으면 딴 걸 하겠다." - P-1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 P-1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 P-1

행여 하소연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편지를 쓴 당시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나의 어떤 성정이 나를 부추겨 그런 편지를 쓰게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고도의 자기기만인지도 모른다. - P-1

예를 들면 이렇다. 사람은 가장 젊고 민감한 시절에 상처도 가장 많이 받는다. 반면 끓어오르던 피가 서서히 잦아들고, 감정이 전보다 무뎌지면서 더 든든히 무장을 하고 상처를 견딜 줄 알게 되면, 예전보다 더 신중하게 운신하게 된다. - P-1

인성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가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벽이 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 폼 잡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 우리의 비극까지도. - P-1

내 판단이지만, 요절하는 것보다는 늙는 것이 언제나 나은 법이다. 아니, 내 말뜻은 이렇다. 이십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후로······ 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달리 설명해볼까. 혹자는 역사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기가 모든 것이 붕괴할 때로, 이는 곧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할 때 과연 타당한 데가 있을까?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 동안 죽는다는 것. 설사 그 새로운 것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 해도. 모든 정치적, 역사적 변화가 얼마 안 가 반드시 실망을 안겨주는 것처럼, 성년기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 P-1

생을 접기 전에 그보다 좀 더 광범위한 과정을 밟아선 안 될 이유가 있을까? 날 원망하지 말기를, 날 좋게 기억해주기를. 세상 사람들이 날 좋아했다고, 날 사랑했다고, 내가 나쁜 놈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기를. 이중 해당되는 경우가 단 하나도 없다 한들, 부디.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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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가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옳았음을 보여줄 거라는 것도.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데,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기억은 하고 있다가, 세월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무슨 뜻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경우. - P-1

그러다 좀 더 생각해 보았다. 나는 EF를 믿는 쪽을 더 좋아한다. 사실, 그녀는 늘 진실을 말했다. 그러지 않을 때만 빼고. 예를 들어 크리스가 두 줄 단추가 달린 외투를 입은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다. "아 저기? 아무도 아니야." 분명히 진실이 아니다. 하지만 사랑과 섹스 문제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는 핵심은 늘 무엇을 또 누구를 믿느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죽으면 다 바뀐다. 사후에 남는 믿음은 이럭저럭 진실로 굳어진다. - P-1

사랑하는 사람을 깊이 또 잘 알고 있다 해도 그 사람에게 놀라게 되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그게 사랑이 살아 있다는 표시다. 타성은 사랑을 죽인다. 성적인 사랑만이 아니다. 모든 사랑이 마찬가지다. - P-1

삶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사람과 맺는 더 깊고, 더 불온한 관련을 경계한다. - P-1

어쨌든, 중요한 건 다 네 기억에 남을 거야. - P-1

"지나고 나니까 사랑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얘기." - P-1

나는 여전히 안나를 아주 좋아했다, 겉으로는 어떻게 보일지라도. - P-1

그 사람의 부모, 친구, 연인, 적, 자식이 각각 보는 방식.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그의 진실을 눈치채기도 하고, 오랜 친구가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고. 사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본다. 뭐,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 - P-1

뒤늦게 나는 제프처럼 EF를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그녀에게서 다른 것을 원했던 사람들도 있다고 인정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를 완전히 잊었거나, 그녀를 하나의 희극적인 일화로 줄여버린 사람도 동기 가운데 있을 것 ― 어쩌면 많을 것 ― 이라는 점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보다시피, 그게 그녀를 좀 더 나만의 존재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 P-1

"모든 만남과 대화, 그리고 그것에 대한 나의 기억……은 수사학의 비유와 같다."

이것은 이 소설의 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구절이다. 여기서 비유라는 말은 그 인간 자체에 대한 비유라는 뜻으로,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을 어떤 상황에서 만났다면 그 만남이 그 사람을 표현하는, 뒤집어 말하면 그 사람을 읽어낼 수 있는 하나의 비유가 된다는 뜻인 듯하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이 만남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열쇠가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앎이란 어디까지나 비유를 통한 간접적·부분적 앎일 뿐 그 사람의 실체 자체나 전모를 알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만남의 횟수를 늘린다고 해서, 누구보다 친밀해진다고 해서 그 앎이 절대적인 수준에 이를 거라고 기대하기 힘들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인간의 외피 안에 있는 한 물자체物自體를 인식하는 게 난망한 일이듯이 사람 자체를 온전히 인식하는 것도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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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샤르메트 씨가 불쌍했다. 사회보장제도에서 나오는 연금이 있다 해도 그 역시 돈 없고 찾아오는 사람 없는 노인이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인데 말이다. - P-1

신 얘기는 이제 지겨웠다. 신은 언제나 남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니까. - P-1

그들에게 얘기를 하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끔찍했던 일들도, 일단 입 밖에 내고 나면 별게 아닌 것이 되는 법이다. - P-1

"……로자 아줌마는요, 세상에서 제일 못생겼구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에요. 다행히 내가 같이 지내면서 돌봐주고 있어요.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으니까요. 왜 세상에는 못생기고 가난하고 늙은데다가 병까지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 P-1

어차피 나와는 속한 세계가 다른 사람들이었다. - P-1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더이상 기웃거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내게는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로자 아줌마 곁에 앉아 있고 싶다는 것. 적어도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의, 똥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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