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각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어둡게 보는 것이지만 동시에 유용한 인간관이기도 하다. 누구나 알고 보면 깊숙한 문제가 있고 함께 살기가 힘든 사람이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직 잘 모르는 사람‘뿐이다. - P7

우리는 타인이나 주어진 상황을 끔찍이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고, 타인과 가까워지는 어려운 과제에 자주 실패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이 그저 좇아가야 할 ‘충동‘이 아니라 배워야 할 ‘기술‘이라고 본다. - P7

우리는 섹스와 관련된 수치심을 제거하고, 많은 욕구가 실제로는 친밀함을 찾는 복잡한 과정의 산물임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 P8

물질적 대상은 우리 삶에서 심리적 또는 영적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의 가장 고매한 이상은 물리적 대상으로 ‘물질화‘될 수 있고, 그런 것을 구매하거나 사용한다면 더 훌륭한 자아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소유물은 심리적으로 중요한 건설적인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할 대상을 찾는 데 정말로 집중한다면 훌륭한 소비지상주의가 생겨날 것이다. - P18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 매우 선량한 한두 사람을 만났을 때다. 우리가 선량함을 제대로 이해할 때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인생의 의미가 된다. - P21

선량함은 실제로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많은 가치를 지켜주고 있으며, 이 가치들은 선량함과 상충하지 않는다. 착하면서도 성공한 사람, 착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사람, 착하면서도 부유한 사람, 착하면서도 관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선량함은 자신에게 덧씌운 혐의를 벗을 날을 기다린다. 우리는 선량함이 다른 자질과 상생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가치를 새롭게 재발견해야 한다. - P33

우리가 관계 맺는 가족, 친구, 동료와의 사이에서 자선이 더욱 필요하다. 우리는 이들과의 관계에서 상대방의 행위를 ‘해석하는 자선‘을 베푸는 데 인색한 편이다. - P37

자비심이 있는 사람은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마음을 쓴다. 그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 행동하는지 그 이유를 해석한다. 그 사람이 보이는 조급함이나 지나친 야심, 무모함이나 수줍음이 어디서 연유하는지 그가 살아온 궤적을 알아차린다. - P38

자비심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옳다고 믿는 자의 기억이 잘못되었음을 안다. - P38

자비심은 사람이 몹시 지치고 압박감에 시달릴 때면 형편없는 짓을 저지르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마음이다. 자비심은 어떤 이가 욕설을 내뱉을 때 그것이 본심이 아님을 이해하는 마음이다. 대개는 자신이 쉽게 반격하지 못하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애꿎은 이에게 화풀이하고 상처를 주려는 것임을 이해하는 마음이다. - P39

일장일단 이론에 따르면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누군가의 장점 이면에는 반드시 그만한 단점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그리고 당장은 그 단점으로 어떤 손실을 보게 될지 몰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바로 그 단점 덕분에 혜택을 볼 일이 생긴다. 나의 눈에 거슬리는 상대방의 결점은 나쁘기만 한 결점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뛰어난 장점의 어두운 이면일 뿐이다. 장점에서 비롯한 단점을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장점을 차례로 열거하고 나서 단점을 열거해보면 좋은 점에는 대체로 그에 상응하는 나쁜 점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P41

한 개인의 모든 장점 이면에는 단점이 존재한다. 단점 없이 장점만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장점에는 약점이 따라온다.‘ 한 사람이 모든 장점을 갖추기는 불가능하다. - P42

그리스인은 개인이 유능하고 선한 사람이라도 실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P45

우리가 그토록 쉽사리 암담한 결론을 내고 상대방이 나를 모욕하고 상처 주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가슴 아프지만 자기혐오라는 심리 현상과 관련이 있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남에게 조롱받거나 상처받기 쉬운 먹잇감으로 바라본다.
일하려고 방금 자리에 앉았는데 왜 하필 밖에서는 훈련이 시작된 걸까? 곧 회의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째서 룸서비스는 아침을 가져오지 않는 걸까? 전화 교환원이 어째서 빨리 번호를 알랴주지 않고 꾸물거리는 걸까? - P49

"사람들이 사악하다고 절대로 말하지 말라. 바늘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만 하면 된다." - P52

기분 나쁘게 툭 던지는 한마디, 나를 놀리는 오랜 친구의 농담 한자락, 비아냥거림, 비웃음, 공격적인 댓글 한 줄을 우리는 꽤 자주 마주친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리는 이런 언행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그럴듯한 설명을 찾아보지만, 만족스러운 해명도, 나를 진정시키는 설명도 찾기 어렵다. 우리는 일상에서 접하는 남들의 불량한 언행에 당황한 채 그런 짓을 당하는 것이 혹시 내 책임은 아닌지 의문을 품는다.
사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맞다. 여기에는 아주 단순하고 냉엄한 진실이 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못되게 구는 것은 그들이 괴롭기 때문이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내면 어딘가에서) 스스로 상처를 나고 있디 때문이다. 나를 헐뜯고 멸시하고 몹쓸 짓을 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당당하고 씩씩하고 말짱해 보여도 그들이 보여주는 언행은 곧 그들이 병들었다는 증거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은 못되게 굴 필요가 없다. - P54

그들이 타인을 괴롭히고 싶어 한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그들이 벌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 P56

마음이 평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 마음이 괴로움으로 들끓지 않는다면 남을 못살게 굴고 싶은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 P56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에는 공손함을 중시하는 사람의 특별한 지혜를 재조명하고 전파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본다. 공손함의 지혜에는 솔직함을 칭송하는 문화가 일으킨 역효과와 현대 사회의 무도함을 가장 효과적으로 완화하는 힘이 담겼다. - P68

인간의 삶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언제라도 수치와 좌절을 당하거나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또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여기서 미친 사람은 나뿐인가‘라는 물음표를 영원히 달고 살아야 하는 위험에 놓여 있다. 예의범절을 따지는 사회에서 타인을 속속들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친구들이 몹시 필요하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에게는 내 안에사 일어나는 성적 충동이나 후회, 분노와 소란을 털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은 그들도 살짝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 앞에서 인정하지 않는다. 내게 필요하고 위안이 되는 친구는 그가 저지른 수치스럽고 어리석은 행동을 똑바로 인정하고 그 모습을 내보인다. 이런 친구를 통해 나 자신을 올바로 평가하고 내면의 충동과 저열함을 좀 더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통찰을 얻는다. - P75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이들의 능력은 상대방이 다소 위협적이고 외계에서 온 것처럼 낯설어도 그 사람이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때까지 만남을 지속하고 인내하는 데서 나온다. 이들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파악한다. - P81

과잉 친절을 보이는 이유는, 자신감을 상실한 이들이 타인의 기분과 필요를 파악하는 데 자신의 경험을 지침으로 삼지 않고 섣부르게 자세를 낮추기 때문이다. - P82

과잉 친절을 보이는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의 근원에는 지나친 겸손함이 자리한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남이 무엇을 좋아할지 파악하는 데 쓸모 있는 자신의 경험을 무시할 정도로 자신감을 잃은 죄밖에 없다.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이 겪는 실패를 보면서 우리가 기억할 교훈이 있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되려면 나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고, 먼저 그 솔직함이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이들은 설령 관계에 실패하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안정감이 있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려다 일을 망쳐도 아무 문제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그리고 당당하게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선의 길이다. 친구를 사귀는 데 실패할 위험을 감수해야만 실제로 친구를 사귈 기회를 얻는다. - P83

수줍음의 뿌리는 타인을 해석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숫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 앞에서 쑥스러워하지는 않는다. 나이, 계층, 기호, 습관, 신념, 성장 배경, 종교 등의 다양한 지표를 기준으로 자기와 매우 다른 사람들 앞에 있을 때 입이 얼어붙는다. 다소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수줍음은 마음에서 형성되는 일종의 ‘지역감정‘이라고 보아도 좋다. 이들은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발생하는 부속물에 집착한 나머지 자기와 부속물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들에게 상대방을 위협하는 이방인, 해독이 불가능한 이방인이라고 크게 딱지를 붙인다. - P84

함께 웃거나 장난스러운 농담을 던지거나 편안하게 있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공통분모가 없기 때문이다. 숫기 없는 이들이 일부러 불쾌하게 굴거나 심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인식하는 모든 차이점을 넘기 힘든 장애물로 바라보기 때문에 호의를 표현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개성을 보이지 못하는 것이다. - P85

유난히 활발한 성정도 아니고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지 않아도 인간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기반으로 세계시민이 되는 사람이 있다. 겉모습과 상관없이 인간은 모두 같은 종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기에 모임에서 굳게 입을 다무는 사람이나 레스토랑에서 분위기를 서먹하게 만드는 사람은 상대방을 암암리에 배척하는 죄를 짓는 셈이다. - P87

세계시민은 사람들 간에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다만 그런 차이에 압도당하거나 겁을 집어먹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차이점 너머에서 우리가 모두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감지한다(좀 더 현실성 있는 표현을 쓰자면, 그러리라고 짐작한다). (...) 초반 만남에서 실패하더라도 머지않아 공통점을 찾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겉모습이 달라도) 몇 가지 기본 관심사에서 틀림없이 마음이 통한다는 사실을 이들은 알고 있다. 서로 다른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 공통의 기호와 미움, 희망과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설령 그 공통점이 공굴리기라거나 일광욕처럼 사소한 취향일지라도. - P87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비관적이다. 이들이 보는 세상에서는 근대주의자와 전통주의자가 서로 전혀 대화가 안 되고, 열렬한 좌파 활동가는 우파에게 전혀 곁을 내주지 않으며, 무신론자는 성직자와 어울릴 수 없고, 기업주는 사회주의자 사이에서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 뿐이라고 확신한다. - P88

숫기가 없는 사람은 온통 상대방과의 격차에만 시선이 쏠려 있다. - P89

직관이 뛰어나서 수줍음을 타는 사람도 있다. 이들에게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불편을 끼칠 수 있다는 인식이 배어 있다. 타인이 자기 때문에 언짢아하거나 당황스러울 수 있음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은 자신이 성가신 존재로 전락할 위험성을 감지하는 촉각이 무섭게 발달되어 있다. - P89

내 안에 있는 박애심을 표현할 줄을 모르고 자기 감정을 억압한 까닭에 나에게 마음을 열었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불필요하게 비싼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계를 긋고 자기 안의 지역감정에 지나치게 몰두한다. 여드름투성이 소년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예쁜 소녀가 자기와 유머 코드가 비슥하고 자기처럼 아버지와 사이가 몹시 나쁘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 중년의 변호사는 이웃집 여덟 살짜리 소년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로켓에 대한 꿈아 있음을 찾아내지 못한다. 인종과 나이는 장벽이 되어 우리 사회에 엄청난 손해를 초래한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을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지만, 결국 수줍음이란 자신을 너무 특별하게 보기 때문에 생겨나는 부당한 감정이다. - P89

유혹하는 행위가 이상적으로 기능을 한다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나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자신감과 자존감을 무료로 재분배하는 중요한 사회화 과정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유혹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가장 떳떳한 방식으로 유혹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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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마치 기본적으로 거대한 물질적 요소들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유전, 통신위성, 대규모 쇼핑 단지, 화려한 유흥가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인상 깊은 요소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경제는 상당 부분 우리의 집합적인 취향과 상상, 갈망에 의해 추진되는 심리적 현상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어디에 기꺼이 돈을 쓰려고 하느냐‘가 이윤을 창출하고 투자 시스템 전체를 조직화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소비자 교육이 핵심적인 경제 운동의 하나가 되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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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속 얘기를 듣고 그것을 갚자면 자기 속을 털어놓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지 않다. - P28

명준은, 대들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숨을 죽였다. 그를 향하고 있는 네 개의 얼굴. 그것은 네 개의 증오였다. 잘잘못간에 한번 윗사람이 말을 냈으면, 무릎 꿇고 머리 숙이기를 윽박 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짜증 끝에 성 낸, 미움에 일그러진 사디스트의 얼굴이었다. 빌자, 덮어놓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그의 생각은 옳았다. 모임은 거기서 10분 만에 끝났다. 명준은 사무친 낯빛을 하고, 장황한 인용을 해가며, 허물을 씻고 당과 정부가 바라는 일꾼이 될 것을 다짐했다. 지친 안도감과 승리의 빛으로 바뀌어가는 네 사람 선배 당원의 낯빛이 나타내는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명준은, 어떤 그럴 수 없이 값진 ‘요령‘을 깨달은 것을 알았다. 슬픈 깨달음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슬기였다. 그는 가슴에서 울리는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 P127

싸움이 멎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명준은 깊은 구렁에 빠졌다. 북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예 없었다. 아버지가 전쟁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 수는 없었으나, 설령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 한 가지만으로 북을 택하기에는 너무 약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살 테지. 효도 같은 걸 하기엔, 현실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리고 북녘 같은 데서 살붙이란 무엇이던가. 그러고 보면, 이제 그가 북으로 가야 할 아무 까닭도 없었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은혜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에 들어 있다는 것은 풀어서 말하면, 그 사회 속의 어떤 사람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라면,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의, 어디다 뿌리를 박을 것인가. 더구나 그 사회 자체에 대한 믿음조차 잃어버린 지금에, 믿음 없이 절하는 것이 괴롭듯이, 믿음 없이 정치의 광장에 서는 것도 두렵다. 코뮤니스트란, 월북할 때 그러려니 그려본, 그런 인종들이 아니었다. 한때 그들의 존재를, 믿음이 없어진 현대에서, 한 가지 기적으로 생각했다. 이상주의의 마지막 지킴꾼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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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각에 지상낙원이란 결코 있을 수 없어. 인간은 언제나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니까."
"맞아요."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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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에게



한국의 독자 여러분,

한국은 조상을 공경하는 나라겠지요. 극동 아시아에는 가족 전통이 소중하게 남아 있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 전통이 조금 무너졌고, 나는 그 점을 늘 아쉽게 생각해 왔습니다.

나의 책 『할머니의 비밀』은 남다른 시련을 이겨 내면서 꿋꿋하고 나름으로 아름답게 살아 온 한 노인의 삶을 보여 줍니다.

이 책은 서양의 청소년들에게는 노인의 삶에 귀를 기울여 보는 체험이 되겠지만, 여러분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지요.

혹시 여러분이 모험을 좋아한다면, 여러분은 이 책에서 갱들이 주름잡던 시절의 미국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나는 열세 살 때 이곳 프랑스에서 한국인 사범에게서 태권도를 배웠고, 그때부터 한국을 사랑했습니다. 동양도 내게는 낯선 세계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숙부가 베트남에서 태어나셨거든요.

한국의 독자 여러분, 멀리 프랑스에서 우정의 인사를 전합니다.



2003년 9월

장 프랑수아 샤바스

페이스 할머니는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모든 것은 자연에 있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 말이다. 동네 작은 공원의 잔디밭이 아니라 대자연 말이다. 네가 커다란 사슴이나 회색곰과 마주치는 날, 밤이 되고 눈이 허리까지 차 오르는 캄캄한 나무숲을 여러 시간 동안 혼자 걷게 되는 날, 바로 그때 너는 네 자신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될 거다." - P65

"이유를 알면 좋으련만."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할머니가 고약하고 심술궂은 미친 노파이기 때문이죠. 할머니가 그러니까 오히려 제가 평소 우리 집안 분위기대로 착하게 변한 거죠. 그게 이유예요. 이제 할머니 마음대로 하세요. 전 상관없어요."

나는 제기랄을 연발하며 복도로 나왔다. - P96

눈이 완전히 녹았다.

흔적도 없이 녹았다. 숲은 이제 긴 겨울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주변의 자연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두려움조차 이따금 받아들일 정도로 이곳의 자연이 좋다. - P99

하지만 일기를 읽지 않은 두 분에게도 할머니는 처음과는 좀 달라졌다. 신랄하게 비꼬는 태도도 누그러졌고 식탁에서 식구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훑어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은 집에 꽃다발을 가져오기도 했다. 할머니는 이 음산한 도시에서 자연이 그리워 가져왔다고 둘러댔지만 아무도 곧이듣지 않았다. 우리는 할머니가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 P120

사람들은 부모님이나 경찰에 알리는 편이 더 간단하고 현명하다고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의견을 내세울 것이다. 그러면 나는 우리 동네 방식은 좀 다르다고 대답할 것이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우리 동네에서는 자기 일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처리한다고만 말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다. 어리석고 위험하며 불법인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그렇게 한다. - P126

도너번이 이를 부딪치며 덜덜 떠는 소리가 들려서 내가 한 마디 했다.

"제기랄, 품위 좀 지켜라!"

그러면서 제발 도너번이 내 다리가 푸딩처럼 후들거리는 것을 보지 않기를 바랐다. - P127

"네가 나처럼 숲속에서 팔십 년 가까이 살았다면, 자연이 가장 큰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거다. 대자연의 광활한 숲속을 걷다 보면 고통이 사라지지. 여기서는 밤이 돼도 하늘을 볼 수가 없어. 블랙버리에서는 스완 호수 언덕에 오르면 마치 별 아래 앉아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 P135

나는 두 분을 탓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바보 천치 같은 도덕주의자들을 원망했어. 그 멍청이들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면 사람들의 정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믿은 거야. 하지만 정신을 정화하겠다고 나선 그들이 얻어 낸 것이라고는 온 나라를 총격전으로 몰아넣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뿐이었지. - P164

"나도 잘 모르겠구나. 아니, 너희 집에 무얼 찾으러 간 건 아니었어. 이 숲에 떠도는 기억에서 달아나려고 해본 거랄까. 하지만 그 기억은 너무 강했지. 그래서 곧 나를 붙잡아 다시 여기로 데려오고 만 거야." - P172

"시카고에서 아버지는 하얀 셔츠를 입고 에나멜 구두를 신고 다녔지만 그때 이미 도둑이었어."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자기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페이스 할머니가 앙심을 품고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밝혀진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 P176

"지금부터 얘기하는 사실은 내 마음의 짐을 덜거나, 과거 일에 대한 책임을 네 아버지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너한테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야. 모두 얘기하마. 열다섯 살 때부터 나는 도둑질을 했고 사람도 죽였어. 네가 본 대로 난 꼬마 예수와 그 일당을 죽였고 다른 사람도 죽였어. 운명이란 어쩔 수 없더라. 내가 자신을 바로잡고 정직하게 살아 보려고 할 때마다 일이 터져 그럴 수가 없었단다. 내 가족은 화재로 죽었어. 다른 일들도 많이 있었지만, 얘기할 마음도 시간도 없기 때문에 네게 다 들려줄 수가 없구나. … - P176

나는 잠자코 아저씨가 하는 말을 들었고 아저씨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독이 되어 내 귀에 박혔단다.

"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어. 그런데 이상도 하지, 나는 그 날 네 아버지가 앉은 탁자로 이끌리듯 가서 앉았단다. … - P178

"왜 아멜리 할머니는 한번도 돌아오지 않으셨나요?"

"그것도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아멜리는 아마 돌아올 수 없었을 거다. 악몽 속으로 다시 빠져 들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할머니는 왜 남으셨어요?"

"그건 나도 잘 몰라. 어쩌면 우리 부모님의 기억을 돌볼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어쨌든 두 분은 여기 잠들어 계시니까. 그리고 이 숲에 추억이 어려 있기 때문이겠지. 그 추억은 약간 무겁고 역겨운 향기가 나는 꽃과 같다고 할까? 하지만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몸을 굽히고 바라보게 되는 그런 꽃 말이야." - P185

할머니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는 1940년, 서른의 나이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떠나 버렸고…… 아들은 열여섯 번째 생일에 집을 나가 장터를 떠돌아다니는 권투 선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 아들이 오 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아버지였다. - P187

(옮긴이의 말)

페이스 할머니의 일기에는 이 혼란한 시대가 어떻게 그려져 있을까? 할머니의 부모나 앙리 르구외 씨는 범법자이지만 결코 흉악한 사람들은 아니다. 정직한 신사이든 잔인한 갱이든 누구도 전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술을 사먹으면 누구나 범죄자가 되는 시대이지만 술에 취한 사람들이 버젓이 블랙버리 거리를 나다닌다. 음주를 금지함으로써 오히려 범죄를 일상의 친근한 일로 느끼게 만들고 결국 더 많은 범죄와 폭력을 낳게 된 것이다.

이 책의 작가는 세상을 선과 악이라는 단순 논리로 보지 않는다. 아이들이 선과 악이라는 도식을 넘어 이 세상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의 복합성 속에서 보도록 한다. 작가는 이런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너무 어려울 거라며 지레 아이들을 무시하지 않는데, 그건 아이들이 세상을 진지하게 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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