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연구 동서문화사 월드북 46
아놀드 조셉 토인비 지음, 홍사중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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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2009년에 나온 2판 3쇄본을 빌려 읽었다. 내용은 훌륭했지만, 무수한 오탈자가 몰입을 지나치게 방해해 매우 속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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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란 무엇인가
한병철 지음, 김남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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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강제로서의 권력이라는 모델은 권력의 복합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강제로서의 권력은 타자의 의지에 대항해 자신의 결정을 관철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의 매개 수준은 매우 낮다. 여기서 에고와 타자는 서로에 대해 적대적 관계에 놓이며, 에고는 타자의 영혼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에 반해 매개 수준이 높은 권력은 타자가 하려는 행동에 맞서는 권력이 아니라 그 타자로부터 솟아나 작용하는 권력이다. 더 강한 권력은 타자의 미래를 봉쇄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형성해준다. 그러한 권력은 타자의 특정 행동에 맞서려는 대신, 타자의 행동반경에 영향을 주거나 그것을 변화시킴으로써 부정적인 제재 없이도 타자가 자발적으로 에고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게 한다. 이를 통해 아무런 폭력 행사 없이 에고는 타자의 영혼 안에 자리를 잡는다. - P18

21 권력이 자유를 배제한다는 견해가 고집스럽게 이어지지만,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에고의 권력은 타자가 자발적으로 에고의 의지를 따르는 관계에서 최고에 도달한다. 에고는 타자를 강제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권력이란 모순어법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가 자유로이 에고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적인 권력을 얻으려는 자는 폭력이 아니라 타자의 자유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절대적 권력은 자유와 복종이 서로 완전히 합일되는 순간에야 얻을 수 있다. - P21

73-4 푸코가 감옥, 군대 또는 병원에서 찾아내는 정형외과적 권력은 무엇보다 신체에 집중되어 있다. 푸코는 신체에 시선을 고정시킨 나머지 상징적 차원에서 관습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권력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아비투스는 한 사회 집단의 경향이나 관습을 지칭한다. 그것은 특정한 지배 질서를 관철시키는 데 기여하는 가치나 지각 형태를 내면화함으로써 생겨난다. 반성 이전에 작동하면서 신체적으로 작용하는 아비투스는 현존하는 지배 질서로의 편입을 가능하게 하는 습관의 자동주의를 산출해낸다. 그로 인해 사회적 소수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을 배제했던 지배 질서를 공고화하는 태도 전범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아비투스는 신체적인 것에서도 작동하는 지배 질서를, 의식하기도 전에 긍정하고 승인하게 해준다. 우리가 사회적 위치 때문에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도 이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취향이라고 양식화된다." 이를 통해 "희생자들이 사회적으로 부여된 운명에 스스로를 봉헌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아모르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 생겨난다. 운명이 자유로운 선택인 양 체험되는 것이다. 피지배자들이 그 자체로 부정적인 자신의 상태를 자기 취향으로 삼게 된다. 빈곤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 되고, 강제나 억압이 자유로 여겨지는 것이다. 아비투스는 지배전 권력관계가 합리적인 근거들과 무관하게 거의 마법적 방식으로 재생산되도록 만든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권력은 강제라는 모습으로 등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권력은 자유의 감정을 불러내는 곳에서, 어떠한 폭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막강하고 가장 안정적이다. 이때의 자유는 사실일 수도 있고 가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권력을 안정시키고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 P73

101-2 유한한 존재는 타자에 둘러싸여 있다. 자기주장이란 이 존재자가 타자와 접촉하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머문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러한 자아의 연속성이 없다면 존재자는 타자가 불러낸 부정성과 부정적 긴장감에 의해 몰락할 수밖에 없다. 자신 안에서 이 부정성을 견뎌낼 수 없고, 타자를 자신 안에 통합할 능력이 없는 존재자에게는 존재할 수 있는 권력/힘이 없는 것이다. 틸리히 또한 존재의 권력/힘을, 부정성 혹은 그가 말하는 "비존재"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비존재를] 자기주장에 편입시킬 수 있는 능력에서 찾는다. "더 많은 비존재를 극복했거나 극복할 수 있다면 존재의 권력/힘은 더 커진다. 더 이상 이를 견디거나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은 전적인 무력, 모든 존재의 권력/힘의 종말, 패배이다. 이것이 모든 생명체가 갖는 위험이다. 더 많은 비존재를 자신 안에 지니게 되면 그 생명체는 더 큰 위험에 빠지는데, 이 위험에 맞설 수 있다면 그 생명체는 더 큰 권력/힘을 갖게 된다. [……] 스스로 파괴되지 않고서도 더 많은 비존재를 자신의 자기주장에 편입시킬 수 있다면 생명체는 그만큼 더 강해진다." - P101

177-8 각주47) 이러한 경계 없는 친절함은 교환 원리에 근거한 소통적 친절함과도 대립된다. 소통적 "기술"로서의 친절함은 "자신의 견해나 기대의 표현을 적절한 순간이 올 때까지 미룰 수 있는" "능력"이다. 그 순간까지의 시간은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채워진다." 소통적 친절함은 "타자의 자기묘사를 보장하면서 적절한 시기에 자신의 기대를 배치하는 원리"에 의해 이끌어진다. 체계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소통적 친절함은 "형식적 체계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데 기여한다. 타자가 좋은 모습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는 한, 다시 말해 그 타자의 자기묘사가 성공하도록 해주는 체계는 ‘친절하다.‘ ‘친절한 자‘는 "타자가 드러내고 싶어 하는 모습대로 그를 대해주는" 사람이다. 전략으로서의 친절함이란 "A가 파트너인 B가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B 또한 A에게 그런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태도이다". 따라서 기술로서의 소통적 친절함이란 비대칭적 구조가 아니다. 친절한 자는 자기 자신의 기대나 견해,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소통적 교환의 장에 내놓을 적절한 순간을 엿보고 있는 것이다. 타자로 하여금 성공적인 자기묘사를 하도록 도와주는 수동적 혹은 능동적인 듣기는 자신의 묘사를 위한 우회로인 것이다. 따라서 소통적 친절함이란 결국 자기배려로 담지되는 교환 행위이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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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현상 - 신뢰받는 언론인이란 무엇인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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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이유는 이른바 ‘자아갈등ego conflict‘이 아닐까 한다. 명백한 사실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서로 다르게 알고 있다든가, 서로 간의 가치관이 달라서 오는 갈등은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든가, 서로 간에 일정한 양보와 타협을 통해 해결할 수 있지만, 그조차도 해결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아갈등, 즉 자존심의 싸움이 아니던가. 나는 그것이 결국엔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내가 많이 쓰긴 하지만 학문적으로 정립된 용어는 아니다)‘에 머물고 만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과 자신의 진영만을 만족시키는 거꾸로의 일방적 소통일 뿐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상대에 대한 적대감으로까지 연결된다면 토론의 정당성은 사라지고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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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애를 말하다 -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그리고 사랑이 없는 무성애, 다시 쓰는 성의 심리학
앤서니 보개트 지음, 임옥희 옮김 / 레디셋고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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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71 그런데 도대체 이 연구자들이 양의 성적 취향을 연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양치기 농부들에게 양의 생산성을 이해시키고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양치기 농부들이 원하는 것은 종자 숫양이 새끼를 많이 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들은 암양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숫양을 ‘포‘(FOR, Female Oriented Rams : 암컷 취향의 숫양)라고 이름 붙였고, 숫양에게 매력을 느끼는 숫양은 ‘모‘(MOR)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 쪽에도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숫양은 ‘노‘(NOR)라고 불렀다.
놀랍게도 ‘모‘의 비율이 상당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노‘의 비율도 매우 높았다는 사실이었다. 찰스 로젤리와 그의 연구자들은 ‘지난 2년 동안 584마리의 양을 실험했다. 이 중 12.5%는 무성애였고 55.6%는 암컷에 올라타서 사정을 했으며 9.5%는 다른 수컷과, 그리고 22%는 수컷과 암컷 모두와 성행위를 했다.‘라고 논문에 실험 결과를 요약했다.
설치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양들의 이런 성적 다양성이 테스토스테론의 순환과 관계가 있다는 강력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무성애 양들, ‘노‘는 ‘포‘나 ‘모‘에 비해 테스토스테론의 수준이 낮지 않았다. 이것은 뇌를 특정한 방향으로 구성하는 부모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무성애적인 양들의 성적 취향이 발달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양들은 인간의 성을 이해하는 것과 특별한 연관이 있다. 사실상 인간의 성적 취향을 동물과 비교하는 데는 설치류보다는 양이 더 낫다. 인간의 경우 남성이 다른 남성에게 성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것과 유사하게, ‘모‘는 활발하게 다른 수컷들과 성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따라서 사람과 양의, 무성애를 포함한 성적 취향은 뇌의 특정 부위가 부모의 호르몬에 영향을 받아 구성되는 것과 서로 유사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 연구 결과가 암시하는 것은 뇌 시상 하부의 성 결정핵이라고 불리는 SDN-POA(Sexually Dimorphic Nucleus of Preoptic Area, 성적으로 동종 이형인 시색전핵야)의 구조적 차이가 양의 성적 취향과 관계가 있으며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아직도 ‘노‘의 뇌가 양의 성적 취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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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힘 - 2012 시대정신은 '증오의 종언'이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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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53년 전 영국의 작가이자 과학자였던 C. P. 스노우는 인문 ·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과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의사소통하지 못하는 문제가 현대 서구 문명의 중대한 장애물이자 심각한 위협이라고 우려했다. 그런 ‘두 문화‘의 폐해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이과‘ 편 가르기를 하는 한국에서 양상을 달리해 나타나고 있다.
아는 분은 잘 알겠지만, 지금 한국 고등학교에서 ‘문과-이과‘ 구분이 낳는 폐해는 매우 심각해 구분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 문제를 극복해보겠다고 ‘융합‘을 외치곤 있지만, 그 수준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과 출신과 이과 출신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지만, 이야기를 깊이 들어가보라. 정말 소통이 잘 안된다. 정치나 이념 문제일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더욱 큰 문제는 문과 · 이과 모두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시각에 길들어 각각 그 내부에서도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문과 출신들이 훨씬 더 심각하다.
그동안 한국 정치는 사실상 문과 출신들이 지배해왔는데, 이게 불필요한 이념 투쟁을 격렬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게 내 판단이다. 야권에서 누군가가 ‘실용주의‘좀 하자고 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변절‘이라고 공격하는 것도 그 벌떼 속에 문과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중국이 이론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경제향우 정치향좌經濟向右 政治向左‘ 실용주의 노선을 관철시켜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 대국으로 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도 거의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이과 출신이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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