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는 말수가 적지만 수줍어하면서도 꼭 필요한 말은 하는 애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고, 그러자 그런 한수가 갑자기 귀엽게 느껴졌다. - P-1

"엄마, 만약에 사람들이 꼭 한번 다시 만나고픈 사람을 누구든 딱 한 명만 만날 수 있게 된다면 보통은 첫사랑을 가장 보고 싶어할까?" - P-1

"글쎄,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엄마가 꼭 한번 다시 보고픈 건 첫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것 같은데?" - P-1

"눈…… 눈이 아침부터 쏟아졌다. 지난밤 꿈에 K.H.를 본 탓일까? 오늘은 환자의 몸을 씻기거나 소변통을 비우는 중에도 계속 K.H. 생각이 났다. 꿈속에서 K.H.는 건강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 P-1

1974년 3월 24일의 일기엔 "보드라운 햇빛. 파란 하늘. 어제는 부모님께 송금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네모네 두 송이를 샀다. 오늘은 K.H.에게서 편지가 왔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너무나 그리운 K.H. 편지엔 나의 건강을 걱정하는 말이 들어 있다. 나의 단 하나, 나의 자랑, 나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 P-1

마리아는 조금 이따가 왔는데 잔뜩 멋을 부렸더라고. 배우처럼 예쁜 얼굴인데 멋까지 부렸으니, 처음엔 콧대 높은 아가씨인 거 아닌가 싶어 경계했지. 한 시간 만에 그런 성격이 전혀 아니란 게 드러났지만. - P-1

가정 형편이 나와 조금 더 비슷한 것 같은 행자 언니는 조용한 성격인지 말숙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따금씩 웃기만 했다. 하지만 기차에서 내릴 즈음이 되자 나와 말숙 언니의 손을 덥석 잡더니, "앞으론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로 해요"라고 수줍은 얼굴로 속삭였다. 행자 언니의 순박함 때문인지, 웃을 때 살짝 드러나는 덧니로 인해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귀여웠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긴장이 풀리면서 안심이 됐다. - P-1

그가 아까부터 나에게 황홀한 눈길을 보내고 있던 걸 난 알았지. 그런 눈길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거든. - P-1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도 그 남자가 싫지 않았어. 그가 이끄는 대로 시내를 구경하고 맥주를 사 마셨지. 마리아, 너는 푸른 새벽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워. 둘째 날 만났을 땐 독어를 거의 할 줄 모르던 그 남자가 내가 독일에서 왔다는 걸 알고 연습이라도 해왔는지 엉망진창인 발음으로 그렇게 내게 말했단다. 여행 마지막날엔 관광객들은 모르는 아주 아름다운 해변에 나를 데려갔어. 별이 촘촘히 박힌 밤이었는데, 거기에서 그 남자가 나에게 입을 맞췄어.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그가 조심스럽게 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깨물었지. 가장 짧게 만난 남자지만 가장 낭만적인 남자였단다. - P-1

이십대의 마리아 이모가 클럽에서, 로마에서, 니스의 해변에서 영화와 같은—마리아 이모의 표현이다—연애를 할 수 있었던 데는 마리아 이모가 다른 파독간호사 이모들과 달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는 사실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P-1

"막상 간섭받기 시작하면 넌 지금 한 말을 후회할걸."
레나가 엄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때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레나는 그럴 일은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엄마는 내가 지금 임신을 했다고 말해도 내 자유를 존중한다며 신경쓰지 않을 사람이야. 그게 얼마나 외로운 건지 너는 몰라."
하지만 외로움에 대해서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었다. - P-1

선자 이모는 한수처럼 낯을 가리는 성격인지 다른 이모들에 비해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다른 이모들에 비해 내가 쓰려(고 한다고 되어 있)는 소설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응원해준 편이었는데, 그건 어떤 상황에서도 담담하던 선자 이모치고는 꽤 의외의 모습이었다. - P-1

하지만 선자 이모의 일기를 읽어나갈수록 나는 이모가 말을 거는 상대가 첫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같이 슬픈 연서였으니까. 그리고 그 행간에 잔잔히 흐르던 격정과 애달픔을 느낀 사람이라면 누구든, 선자 이모가 첫사랑의 이름을 듣는다면 동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거부하려 해도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무엇이든 움켜쥐고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떨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 P-1

한수는 내게 테이프를 돌려줄 때면 케이스 안에 짧은 메모를 끼워넣곤 했다. ‘가사는 못 알아듣겠지만, 이 노래가 나는 저번 것보다 더 가슴에 직접 꽂히는 것 같아’ 하는 식의 짤막한 감상이었다. 한수의 메모를 읽고 난 후엔 나 역시 한수가 느꼈던 감정을 맛보고 싶어져 테이프를 워크맨에 집어넣고 이어폰을 낀 채 침대에 누워 노래를 들었다. 이미 가사까지 다 외우는 노래들이었는데, 한수가 들었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마치 어둠 속에서 처음 발견한 노래처럼. 그러면 처음으로 울리는 새벽의 종소리 같은 새로운 감각들이 내 안에서 퍼져나갔는데, 동시에 그 한국어 노래들이 환기하는 기억은 너무나도 아득히 멀었다. 그건 참으로 모순적인 기분이었다. - P-1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 하거든."
"그건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이번엔 내가 물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니까." - P-1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 P-1

"우린 헤어지는 게 아니야. 우리는 영원히 이어져 있으니까 넌 그곳에서 너의 역할을 하면 돼." - P-1

"엄마는 한국에선 교회를 진짜 열심히 다녔나봐. 한국에 살던 시절 가장 좋았던 추억이 동네 교회 사람들이랑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냈을 때래."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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