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대의정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민주권이라는 허구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이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허구가 필요하다. 성욕을 매개로 번식을 거듭하던 존재가 기어이 사랑이라는 픽션을 만들어냈듯이, 비루함으로 가득 찬 세속에서 기어이 신성(神性)을 발명해냈듯이, 허구는 삶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하다. "바꿀 수 없다면 사랑하라,"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삶이 허구를 버릴 수 없다면 허구와 더불어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허구는 사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거짓말이나 궤변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허구는 삶의 필요가 요청한 믿음의 대상이다. 허구를 즐기기 위해서는 허구를 믿어야 한다.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픽션도 그렇지 않던가. 보고 읽으며 울고 웃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의 진위를 따져 묻기를 그만두고 일단 이야기의 전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이야기의 세계를 ‘마치 그러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그 속을 유영(遊泳)해야 그 허구를 즐길 수 있다. 허구를 믿고 즐기는 것이야말로 허구와 더불어 살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이다. - 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