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그가 원래 겁이 많고 주눅이 잘 드는 성격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울증과도 비슷한 신경질적이고 긴장된 상태가 되었다. 자신의 내면으로만 침잠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었기 때문에 주인아주머니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도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 P11

청년이 그녀를 어딘가 독특한 시선으로 쳐다본 탓인지, 그녀의 눈에도 갑자기 또 아까처럼 수상쩍어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 P17

라스콜니코프는 원래 사람들과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고, 이미 말했듯, 최근 들어서는 특히 더 모임을 다 피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사람이 아쉬워졌다. 내부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생겨나면서 사람을 향한 어떤 갈증도 함께 감지되었다. - P24

아까만 해도 어떻게든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정작 상대방이 말을 걸어오자마자 갑자기 불쾌하고 짜증스러운 감정을 느꼈는데, 자신의 개인적인 부분을 건드리거나 혹은 그냥 그러려고 하는 낯선 사람에 대해 곧잘 맛보는 감정이었다. - P28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데, 이건 진리입니다. 술타령이 미덕이 아니라는 것도 내 잘 알고 있지만, 이건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진리지요. 하지만 극빈이라면, 형씨, 극빈은 죄랍니다. 그냥 가난한 정도라면 아직은 타고난 감정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극빈한 상태라면 아무도 절대 그럴 수 없지요. 극빈하면 지팡이로 쫓아내는 것도 아니고 숫제 사람들 무리에서 빗자루로 싹 쓸어 내지요, 괜히 더 모욕을 주려고요. 이것도 옳은 일이지요, 극빈한 상태에서는 그 스스로 자신을 모욕할 태세를 갖추니까요. - P29

마르멜라도프는 이 집의 단골손님인 것이 틀림없었다. 또 미사여구를 좋아하는 성향도 분명히 온갖 종류의 낯선 사람들과 수시로 얘기를 나누는 버릇 때문에 생긴 것이리라. 어떤 술꾼들, 특히 집에서 푸대접을 받고 찬밥 신세인 술꾼들이 이런 버릇이 들면 그것은 거의 욕구로 변해 버린다. 그 때문에 그들은 술자리에서 변명을 하지 못해 안달이고 잘하면 남들의 존경까지 얻어 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 P29

실례지만, 젊은 양반, 혹시…… 음…… 아무런 가망도 없이 남에게 돈을 꾸려고 애써 본 적이 있습니까?"
"있긴 있지만…… 가망도 없이, 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냐면, 그야말로 가망이 없다, 즉 그래 봤자 땡전 한 푼 안 나올 줄 미리부터 알고 있다는 뜻이지요. 자, 가령 이 사람이, 건전하고 유용하기 그지없는 이 시민이 세상이 두 동강이 나도 형씨한테 돈을 꾸어 줄 리 없다는 사실을 미리부터 확실히 알고 있다고 칩시다. - P30

괜찮다마다요! 저렇게들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서 당황할 나도 아니지만, 어차피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비밀이라는 것도 없는 세상이잖습니까. 그러니 이런 것을 경멸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아무렴 어때요! - P31

형씨, 형씨,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불쌍히 여겨 줄 곳이 한 군데라도 있어야 한답니다! - P32

아십니까, 형씨, 내가 집사람 양말까지 팔아 술을 퍼마신 놈이라는 걸 아시냐고요? 신발이라면 어느 정도는 있을 법한 일이지만 양말을, 집사람 양말까지 팔아 마셨다니까요! - P33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더 감정에 젖게 됩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이렇게 마심으로써 연민과 감정을 추구하는 겁니다. 즐거움이 아니라 단 하나, 비애를 추구하노라……. 술을 마시는 건 고통을 두 배로 늘이고 싶기 때문이지요! - P33

그러고서 꼬박 일 년 동안 나는 경건하고 신성하게 내 도리를 다하고 이놈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그는 보드카 병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나도 감정이 있는 놈이니까요. 하지만 그 정도로 마누라가 성이 찰 리가 있나요. 하필 그때 일자리도 잃었는데, 그 역시 내 잘못이 아니라 구조 조정 탓이었고 그때 그만 술에 손을 댔지 뭡니까……! - P35

집 안에서 짐승처럼 뒹굴 때는 욕바가지뿐이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걷고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더군요. ‘세묜 자하르이치께서 일하시느라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지금 쉬고 계시잖니, 쉿!’ 출근하기 전에는 커피를 대령하고 크림까지 끓여 주더군요! 진짜 크림을 구해다 바치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듣고 계십니까! 게다가 나를 말쑥한 제복으로 단장해 줄 11루블 50코페이카를 어디서 긁어모았는지 내가 모르겠습니까? - P41

이제야 모든 일을 사실대로 알려 주는 것은 이제 만사가 하느님의 뜻대로 느닷없이 호전되었기 때문이고, 또 두냐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의 마음씨가 얼마나 갸륵한지를 네가 알았으면 싶어서란다. - P63

글쎄, 이 미치광이 같은 양반이 벌써 오래전부터 두냐에게 흑심을 품고 있으면서 속마음을 숨기느라 줄곧 그 애를 거칠게 대하고 멸시하는 척했던 거란다. 하긴 벌써 나이도 지긋이 든 가장으로서 그렇게 경솔한 희망을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도 부끄럽고 또 소름 끼쳤던 나머지 저도 모르게 두냐에게 분을 퍼부었는지도 모르지. 괜히 거칠게 굴고 조롱을 일삼음으로써 자신의 속내를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고. 어쨌거나 결국엔 참지 못하고 감히 두냐에게 오만 것을 다 해 주겠다며 뻔뻔스럽고 추잡한 제안을 한 데다가, 그것도 모자라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애와 함께 다른 시골이나 뭣하면 외국에라도 가겠다고 했다지 뭐냐. 그 애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이 되니! 당장은 그 집을 뛰쳐나올 수도 없었던 것이 빚진 돈도 있거니와 마르파 페트로브나를 생각하니 부인 쪽에서 갑자기 의심을 품을 수도 있고 그리되면 가정불화를 야기하는 셈이잖니. 게다가 두네치카에게도 대단한 스캔들이 될 수 있으니, 아무래도 그래서 될 일은 아니었지. 여기에는 갖가지 이유가 많이 있어서 육 주 전만 해도 두냐는 그 소름 끼치는 집에서 도저히 벗어날 생각을 할 수 없었단다. - P63

물론, 너는 두냐를 잘 알고, 그 애가 얼마나 영리하고 성격은 또 얼마나 강단이 있는지를 알잖니. 두네치카는 웬만한 일은 거뜬히 견뎌 낼 수 있고 속도 넓어서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도 강단을 잃지 않을 아이가 아니냐. - P64

꼬박 한 달 동안 우리 소도시 곳곳에 이 사건에 대한 얄궂은 소문이 떠도는 바람에, 그 경멸에 찬 눈초리와 쑥덕대는 소리 때문에 결국 두냐와 나는 교회도 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 우리가 있는 데서도 버젓이 큰 소리로 말을 주고받기도 하더구나.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모조리 우리를 멀리하고 인사조차 하지 않았을뿐더러, 내 확실히 알아냈다마는, 상점 점원과 관청 직원 몇몇이 우리에게 천박한 모욕을 주려고 우리 집 대문에 타르를 칠하기도 했고 그 일로 집주인은 우리에게 집을 비우라고 요구하게 됐지 뭐냐. - P65

그 일로 나는 병이 났지만 그래도 두네치카는 나보다 강인한 애라서 모든 것을 꾹 참아 내고 열심히 나를 위로하고 달래 주었지, 그 모습을 네가 봤더라면! 그 애는 정말 천사야! - P66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우리의 고통은 끝이 났단다. - P66

대체로 다들 갑자기 그 애에게 각별한 존경을 표하기 시작했어. 이 모든 일로 인해 무엇보다도 뜻밖의 사건이 있었고 그 덕분에 지금은 말하자면 우리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뀔 것 같구나. - P68

비단 이 일만이 아니고 대체로 누구든 사람을 잘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대할 때 차근차근 신중을 기해야 하고 나중에 가서 바로잡고 씻어 내기가 극히 힘든 과오를 범하거나 편견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P69

허영심이 제법 강한 편이라 남이 자기 얘기를 들어 주는 것을 몹시 좋아하는 탓이지만, 사실 그런 게 큰 죄는 아니잖니. - P70

지금부터 걱정할 건 전혀 없다고, 앞으로 서로의 태도가 성실하고 올바르기만 하면 웬만한 일은 거뜬히 참아 낼 수 있다고 말이야.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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