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골드문트에겐 젊은이다운 단아함과 소년 같은 천진함이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근래 몇 해 사이에 그런 소년티는 점차 사라져 갔다. 그는 아름답고 강건한 사나이가 되었고, 여자들이 무척이나 그를 탐하는 한편 남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인기가 없어졌다. 나르치스가 수도원 시절의 단잠에서 그를 깨워 주고 세상과 방랑 생활이 그를 주물러 놓은 이래로 그의 정서와 내면도 상당히 변했다. 수도원 생도 시절의 그는 귀엽고 부드러웠으며,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독실하고 봉사심 강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완연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르치스는 그를 각성시켜 주었고, 여자들은 그에게 앎을 주었으며, 방랑 생활은 그에게서 앳된 티를 없애 주었다. 그에겐 친구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여자들한테 쏠려 있었다. - P255

여자들은 쉽사리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갈망의 눈빛 하나로 충분했다. 그는 여자의 유혹에 맞서기 힘들었고, 아무리 조용한 유혹에도 응답을 보냈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 남달리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고 또 늘 이제 막 청춘의 봄을 맞이한 꽃다운 나이의 처녀를 가장 좋아했지만, 그러면서도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여자들의 접촉과 유혹에도 응했다. 춤판 같은 데서 그는 나이가 차고 용기도 없어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런 처녀한테 매달리기도 했다. 그는 그런 여성에게 일단 동정심을 느끼면서 호감을 가졌지만, 그것은 단지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고 영원히 식을 줄 모르는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어떤 여자한테 빠져들기 시작하면 ─ 몇 주 동안 좋아하든 단 몇 시간 동안 좋아하든 간에 ─ 그 순간부터 그 여자는 그에게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리고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자는 누구나 아름다운 존재이며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능력이 있었다. 또 남자들한테 주목받지 못하고 눈에 띄지 않는 여자도 엄청난 정열을 불사르며 자신을 바칠 수 있고, 꽃다운 시절을 넘긴 여자도 단순히 모성애 이상의 슬프고도 달콤한 애틋함을 보여 줄 수 있었다. 여자는 누구나 나름의 비밀과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펼쳐지면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다. 젊음이나 아름다움이 모자라더라도 그 어떤 독특한 몸짓에 의해 상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물론 누구나 골드문트를 오랫동안 붙잡아 두지는 못했다. 그는 아주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여자를 대할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애정을 베푼다거나 더 고마워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결코 절반의 사랑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흘 또는 열흘 밤 동안 사랑을 나누고서야 제대로 결합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또 단번에 싫증이 나고 잊히는 여자도 있었다. - P255

골드문트에게 사랑의 쾌락은 진정으로 인생을 따뜻하게 해 주고 가치로 가득 채워 주는 유일한 계기였다. 명예욕을 몰랐기에 그에겐 주교(主敎)나 거지나 아무 차이가 없었다. 장사나 재산이 그의 마음을 끌지도 못했다. 그는 그런 것을 경멸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털끝만치도 돈벌이에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으며, 가끔 풍족하게 버는 돈을 아무 생각 없이 탕진했다. 여자들의 사랑, 이성(異姓) 간의 유희, 그것이 그에겐 가장 소중했다. - P256

그리고 그가 곧잘 슬픔과 권태에 빠져드는 성향이 생긴 것도 그 핵심을 따져 보면 쾌락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경험한 데서 비롯되었다. 사랑의 쾌감은 순식간에 피어올라 황홀경에 빠지게 하고는 짧게 갈망에 불탔다가 금방 꺼지고 말았다. 골드문트는 그러한 과정 속에 모든 체험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골드문트에겐 인생의 모든 환희와 고뇌를 말해 주는 상징이 되었다. 그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비애와 무상함에서 느끼는 전율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었다. 그러한 비애도 곧 사랑이요, 쾌감이었던 것이다. 더없이 행복한 절정의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에 사랑의 환희가 확실해졌다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사멸할 수밖에 없듯이, 너무나 내밀한 고독과 슬픔에 잠겨 있는 순간도 다시금 인생의 밝은 측면에 새로이 몰입하고픈 욕구에 의해 느닷없이 삼켜지고 마는 것이다. 죽음과 쾌락은 하나였다. - P257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다시 세상은 좋아질 것이고, 훌륭해 보일 것이다. - P270

그가 한때 좋아했던 여성들의 몽상 속에 빅토르라는 인간이 아직 남아 있을까? - P271

제가 원하는 것은 생생한 삶을 맛보고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 P274

적어도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 P288

뭔가를 소유하면서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방랑자를 미워하고 경멸하며 두려워한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존재가 덧없고 일체의 생명이 끊임없이 시들어 간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지 않고, 우리를 둘러싼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가차 없이 냉혹한 죽음을 상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P292

벌써 세상의 모든 현인과 성인들이 그런 문제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생각했었지. 오래 지속되는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아. - P317

자신의 영혼이 순진함을 잃어버린 것이 슬펐다. - P324

로베르트가 선량한 녀석이라 해도 이젠 싫증이 났다. 그는 너무 비겁하고 쩨쩨했으며, 운명이 엇갈리고 충격이 줄을 잇는 이 시기에는 도저히 어울리기 힘든 친구였던 것이다. - P326

사랑하는 주님, 어째서 저희 인간을 이렇게 만드셨나이까? - P342

그제야 울음이 복받쳤다. 그는 앉아서 울었다. 손등과 무릎 위로 따스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세상을 뜬 스승을 생각하며 울었고, 리즈베트의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울었다. - P351

이 절망감 또한 언젠가는 그렇게 시들까? 그렇다. 틀림없이 이 고통과 처참한 심경 역시 언젠가는 아득한 옛적의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지쳐서 이런 감정 역시 잊히고 말 것이다.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뇌조차도. - P353

이 도시에서 그래도 누군가가 아직 자기를 알아보고 좋아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 P354

그림 그리기를 통해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우울함과 정체감 그리고 복잡한 심사가 풀리고 누그러졌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잊을 수 있었고, 그의 세계는 제도판과 하얀 종이 그리고 밤중의 촛불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 P358

그렇다! 모든 사람의 삶은 그 두 가지가 서로 뒤섞일 때만, 이 무미건조한 양자택일로 인해 삶이 분열되지 않을 때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을 창작하면서도 인생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않아야 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숭고한 창조 정신을 단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진정 불가능한 것일까? - P373

아그네스와 간밤의 일을 생각하기도 했다. - P375

비밀 없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위험 없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P376

잠이 든 한두 시간 동안 그는 비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P384

천국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하느님 아버지와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삶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모든 신념을 잃은 터였다.
영원한 삶이 있든 없든 그것이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이 불확실하고도 덧없는 삶뿐이었다. 숨을 쉬고, 살아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오직 살아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P385

나는 늘 조물주를 완벽한 존재로 경배하긴 했지만 피조물이 완벽하다고 한 적은 없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한 번도 부인한 적은 없어. 진정한 사상가라면 이 세상의 삶이 조화롭고 정의롭다거나 인간이 선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네. 오히려 인간의 마음속에서 꾸며 내고 지어 내는 것이 악하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서도 강조하고 있어. 우리는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지. - P402

세상이 온통 죽음과 공포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쾌락을 도피처로 삼는단 말이로군. 하지만 그런 쾌락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일세. - P404

사람들이 벌이는 바보짓과 죽음의 무도 가운데서도 뭔가 오래도록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그게 바로 예술 작품이었어. 예술 작품 역시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불타거나 망가지거나 파괴되겠지. 그래도 예술 작품은 인간의 일생보다 훨씬 오래 남고, 덧없는 순간을 넘어 성스러운 형상이 충만한 조용한 왕국을 이룬단 말일세. 그런 작업에 일조하는 것이 나에겐 다행히 위로가 되었던 것 같네. 그것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에 영원의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 P405

그런 걱정조차 오히려 달콤할 정도였다. - P426

나는 그저 의례적으로 예술을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실은 교만하게도 예술을 얕잡아 보았었네. 그런데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 얼마나 다양한지 이제야 알 것 같네. 또 정신의 길이 유일한 길은 아니며 어쩌면 최상의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 P436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아. 물론 평화가 있긴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늘 깃들어 있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 법일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평화는 잠시도 마음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서 얻어지는 평화, 나날이 새롭게 쟁취해야만 하는 그런 평화뿐일세. - P438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모습도 실은 싸움과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걸세. 인생을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다 마찬가지겠지. - P438

엄청난 갈등과 고통에 시달렸던 이 예술가는 현재와 미래의 무수한 인간들을 위해 그들이 겪을 고통과 노력의 비유적 형상을 보여 준 것은 아닐까? - P450

어쩌면 골드문트가 이 처녀를 유혹했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속이고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남편보다도 더 진실하게 그녀를 자신의 영혼 속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 P452

어릴 적이나 학생 시절에는 자네처럼 지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네. 그런데 내 소명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자네가 깨우쳐 주었지. 그러고는 삶의 다른 쪽에, 감각의 세계에 투신하기 시작했네. 여자들 덕분에 관능의 세계에서 쉽게 쾌락을 얻을 수 있었지. 여자들은 호의와 욕망이 넘쳐흘렀지. - P463

그녀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잡아뗐다네! 나는 그녀와 어울리기에는 너무 늙었던 게지. 그녀에겐 내가 더 이상 매력이 없었고, 나한테 싫증이 나고 아무 기대도 없었던 걸세.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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