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 명이었다고 들었다. 20만 명이 갔다가 해방 후 돌아온 숫자가 고작 2만 명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자신이 20만 명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2만 명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 놀랐다. 20만 명 중 2만 명이면 10분의 1이었다. 말하자면 열 명 중 한 명……. 그녀는 자신의 셈이 틀렸지 싶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열 명 중 한 명만 살아서 돌아왔을까 싶다. - P125

열세 살이던 그녀는 어느새 스무 살이 되어 있었다. 7년 동안 그녀의 키는 손가락 두 마디밖에 자라지 않았다. 7년 전 함께 만주 위안소에 왔던 소녀들 중 그곳을 떠나지 않은 소녀는 그녀와 애순, 둘뿐이었다. 분선도 어느 날 오토상을 따라 그곳을 떠났다. 언제까지나 잊지 말자며 실과 바늘과 물감으로 왼손 손목 위에 문신을 새겼던 연순과 해금도 뿔뿔이 흩어졌다.
7년 전 북쪽으로, 북쪽으로 달리던 열차에 타고 있던 소녀들 중 가장 어리던 그녀는 제법 나이가 든 축에 속했다.
오토상은 소녀 둘을 더 데리고 왔다. 그중 하나는 열세 살이었다. 열세 살 먹은 소녀는, 7년 전 대구역에서 열차에 오르던 그녀의 환영도 함께 데리고 왔다. 검정 광목 저고리에 깡똥하고 얄궂은 바지를 입고,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던.
"애기가 어쩌다 이런 델 다 왔을까?" 영순이 소녀에게 말했다. 열여섯 살이 된 영순의 손에서는 담배가 타들고 있었다.
"왔으니 할 수 없지. 팔자려니 하고 사는 수밖에……."
영순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매운 담배연기가 영순의 얼굴을 지우면서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하는 소녀들에게 일본 이름을 지어주었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사다코다."
사다코가 한옥 언니의 이름이라는 걸 깜빡하고는. 606호 주사를 맞고 늘어져 있던 한옥 언니가 트림을 하다 말고 경기하듯 떨었다. - P138

살아 있는 증인이 있는데, 세상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니까, 눈물이 나고 기가 막히고 감감해서…….
김학순 그 여자는 그래서 자신이 당한 일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신문기사 군데군데 붉은색 펜으로 밑줄이 쳐져 있다. 그녀는 신문지 쪼가리를 집어 들고 붉은색 펜으로 밑줄 친 부분들을 소리 내 읽기 시작한다. 한 문장을 연달아 읽지 못하고, 언 동태를 토막 내듯 끊어가면서 읽는다.

오직 나 홀몸이니

거칠 것도 없고

그 모진 삶 속에서

하느님이 오늘까지 살려둔 것은

이를 위해 살려둔 것.

죽어버리면 그만일 나 같은 여자의 비참한 일생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

왜 나는 남과 같이 떳떳하게 세상을 못 살아왔는지.

내가 피해자요.

그 여자를 따라 위안부였던 여자들이 하나둘 고백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나도 피해자요……. - P143

내가 아는 이는 시집갔다가 남편에게 매독균을 옮기는 바람에 들통이 나 쫓겨났잖아. 얼마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멀쩡하게 살다가 마흔 안짝에 정신병이 왔잖아. 그런데 글쎄 정신병원에서 어머니를 데리고 오라고 하더래. 그래서 갔더니 의사가 어머니만 남고 다른 가족들은 다 나가라고 하더니 혹시 매독 앓은 적 있냐고 묻더라네.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나왔다지 뭐야. 매독이 그렇게 무서운 거더라구. 그이도 참 안됐지. 본의 아니게 아들 인생까지 망쳐놓은 셈이지 뭐야. 아들이 정신병원에서 나오기는 했는데 가끔 발작을 하는가봐. 의사가 얘기했을 리 없는데 아들이 에미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고는 하나봐. 더러운 개구녕에서 나와서 자신이 그렇게 되었다구.
그 심정이 어땠을까? …… 내가 날마다 두통약을 한 알 먹는데 그날은 두 알을 먹었어.
신고하고 더 쓸쓸해졌어. 과거가 알려지면 조카들 시집가는 데 지장 있으니 그냥 조용히 지내라고 큰언니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뿌리치고 신고를 했더니, 언니하고 조카들이 발길을 뚝 끊더라구.
94년 정월부터 보조금 탔어. - P146

신빙성이 없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위안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리고 다니는 이들을 향해서. 몇 살 때 끌려갔는지, 누구한테 끌려갔는지, 어디로 끌려갔는지 분명히 대지를 못하니까. 고향 지명조차 제대로 모르는 데다, 학교에 다니지를 못해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던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걸 고려도 않고. 수십 년이 흘러 기억들이 토막 나고 뒤죽박죽 뒤섞여버렸다는 걸 모르고.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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