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뜨고 싶었던가? L의 몸을 떠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미처 예기치 못했던 진실이 드러나리라 믿었던가? 그것을 내 손으로 거머쥘 수 있으리라 여겼던가? 오산이었다.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싹하고 꺼림칙한 탈 한 조각이 남았을 뿐이었다. - P270

이따금 나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왜?’라는 단말마의 물음을 들이댔을 때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진짜 이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진짜를 보고 싶다면 결국, 심연 앞에 서는 일만이 남는 것 아닐까. 그 텅 빈 심연 속에서 대체 어떤 대답을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일까. 언젠가 H를 다시 만난다면 그녀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다. - P271

"껍질?"
E가 하이 톤으로 되물었다.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껍데기와 껍질이 어떻게 다른지, 예전에 국어 시간에 배웠던 것 혹시 생각나요?"
"……글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감은 분병히 다르게 들리는군요."
"껍데기는 조개나 게, 거북이처럼 단단한 걸 말해요. 하지만 껍질은 내용물에 완전히 엉겨 있죠. 사과나 배, 고양이와 개, 그리고 사람처럼."
그녀의 은밀한 시선이 탁자에 놓인 흰 석고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저 딱딱한 물건은 껍데기였으며, 껍질은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문을 닫을까요?"
습기찬 바람이 세차게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내가 물었다.
"아뇨. 좋은데요."
그녀의 갈색 머리칼이 고요히 팔락거렸다. - P285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불분명했다. 진실로 잔인한 것은 흥분이나 격노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순간만큼 그것을 실감한 적은 없었다. - P307

나는 문득 그녀의 왼손이 자신의 허리 뒤로 숨겨져 있는 것을 알았다. 내가 손을 뻗어 그녀의 왼손을 잡자 그녀는 소스라쳤다.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내 무릎 위에 놓았다. 그 왼주먹은 몇 시간 전에 석고를 바르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그 쓸쓸한 미식거림을, 시큼한 침이 고여오는 혀뿌리 아래로 눌렀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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