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잠들기 전에 L은 뜻밖의 고백을 했다.
"사랑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L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나를 사랑한, 혹은 사랑한다고 믿은 최초의 여자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 아이는 따뜻함과 사랑을 혼동해왔다.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희미한 쓸쓸함을 느꼈고, 그보다 희미한, 까닭을 알 수 없는 구역질을 느꼈다. - P168

나, 살 빼고 나서 잘난 척 많이 했었어요. 몇 달 사이에 나한테 비굴해진 남자들, 그제야 상대해주고 끼워주는 여자애들…… 속으루 죄다 비웃어줬어. 백이면 백, 모두 구역질나는 이중인격자들이더라구. 그러면서 나도 함께 살찐 애들을 무시하고 싫어했어요. 왜 그런지 쳐다보기두 싫더라구요. - P175

"내가 진짜 참을 수 없는 건, 그 새끼가 아니야. 지금까지두 그 새낄 못 잊고 있는 엄마도 아니야. 내가 정말로 증오하는 건, 내 병신 같은 모습…… 그렇게 병신같이 당하구 있었던, 나중엔 반항도 안 하구, 다 포기하구, 어디 신고할 생각도 못 하구, 비겁하게 가출도 못 하구…… 그래요, 내가 진짜 용서할 수 없는 건, 바로 나야…… 그렇게 몇백 번을 당해도 쌌던…… 나."
(…)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서 물러나 앉았다. 그렇지 않아. 넌 단지 어렸을 뿐이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너무 어렸을 뿐이다. - P177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무엇인가가, 내 내부의 무엇인가를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이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결코 알아낼 수 없었다. - P187

"나…… 과거는 생각 안 해요. 미래두 생각 안 해요. 상담 선생님도 그게 좋대요. 내 이빨, 내 몸이 이렇게 된 거, 내 청춘이 흙탕물처럼 떠내려가버린 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무 것두 생각 안 해요. 생각하려다가두 얼른 잊어버려요. 그냥, 순간순간 살아요. 그러니까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그녀는 문득 미소 지었다. 수수께끼 같은 평화가 그녀의 입가에 어려 있었다.
"……천국이 따로 없어요."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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