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베네딕트회, 프란체스코회, 도미니크회, 이 밖에 다른 모든 수도회는 무엇보다 남성과 여성의 분리로 특징지어지는 생활 규칙을 제정했다. 물론 이러한 여자의 거부는 아마 가차 없이 억압된 이성애의 욕망을 나타냈을 테지만, 교회법에 의거한 담론은 바로 ‘자연적이고‘ 어쩌면 지나치게 자연적이고 육욕적이고 심지어 악마적인 경향을 문화와 구도의 영역 안으로 불러들이지 않으려는 태도의 표명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이처럼 모든 이성애 문화로부터 멀리 떨어져 남성과 여성의 가장 엄격한 분리 속에서 경건한 평신도회와 성스러운 영성지도의 윤리를 옹호했다.
동시에 가톨릭교회는 이성애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다. 실제로 13세기 초부터 종교 제도는 전적으로 축출할 수 없는 것이라면 때때로 실행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고, 거부하기보다는 차라리 관리하겠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에 의해 채택된 실용주의적 입장이었다. 즉, 새로운 사목 활동에 따라 남녀의 사랑은 부부의 범위 내에서 가톨릭교회에 의해 제정된 규칙을 받아들인다는 조건에 한해 더 큰 그리스도교적 존엄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의미심장한 현상으로서 1215년의 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결혼이 성사로 지정되었다. 이로써 남녀 커플이 공인되었고, 이와 동시에 특히 불륜의 단죄가 강화됨으로써 사랑의 문화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늘어났다. 가령 매우 상징적이게도 예전에는 신랑과 신부의 부모에 의해 행해지던 혼례의 축복기도를 이제부터는 사제가 올리게 되었는데,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사제는 지배력을 되찾았다. - P121
성사는 가톨릭 교리의 본질적인 요소이고, 자신의 행위를 의식하는 자유로운 인류만이 성사에 참여할 수 있다. 성사는 여성을 위한 잠재적인 해방의 놀라운 수단이다. 성직자들은 이 ‘위험‘을 재빨리 이해했다. 따라서 그들은 12세기부터 결혼의 의례를 체계화하고 이와 병행하여 가사에 전념하는 아내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상술하기에 열중했다. - P124
따라서 그는 남색의 혐의가 입증된 모든 성직자를 해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레오 9세는 다미앵의 지극한 경각심에 대해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지만, 그토록 엄정할 이유가 없다는 대답을 그에게 보냈다. 사실인즉 당시의 참회 규정서 대부분이 이 죄를 덜 중대한 침해로 간주했고 흔히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반면 12세기에는 이 주제에 대한 입장이 더 엄정해졌다. 3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이에 관해 입장을 표명하기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랐다. 누구라도 자연을 거스르는 무절제, 즉 하느님의 분노가 타락의 자손에게로 떨어지고 다섯 도시가 불타버리는 원인이었던 그 방탕을 저지른 사람은 성직자라면 면직되거나 수도원에 갇혀 회개해야 하며 평신도라면 파문과 신자 공동체로부터 배척받아야 한다. 13세기에는 훨씬 더 태도가 강경해졌다. 가령 알베르 르그랑과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온 힘을 다해 남색을 단죄했는데, 그들이 보기에는 모든 가능하고 상상할 수 있는 죄 중에서 남색이 가장 가증스럽고 아마 가장 심각한 죄였을 것이다. 따라서 고작 한 세기만에 유럽 전역에서 자연을 거스르는 죄에 대한 태도가 상대적인 무관심에서 화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엄정한 단죄로 바뀌었다. - P134
에라스무스로부터 유래한 다른 ‘발견‘은 결혼이 사랑에 근거를 둘 수 있다는 것이다. 결혼은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요구(혈통 잇기)에 부응하지만,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참된 사랑은 결혼의 범위 밖에서만 실천될 수 있다는 생각이 유럽사회에서 통용되었던 듯하다. 에라스무스의 동시대인인 장-루이 비베스는 부부의 사랑, 즉 그가 ‘신랑과 신부의 화합‘이라 명명한 것을 적극 권한다. 가톨릭 쪽에서 신학자들은 결혼생활보다 하느님을 위한 독신생활이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성 프랑수아 드 살은 <신앙생활 입문>(1609)에서 그리스도교도들은 결혼을 통해 성스럽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열었다. - P1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