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스무 해 전이군. 내가 캘커타에서 첫 뱃길에 올랐을 때, 편지 한 장을 받았어. 까닭없이 나를 버린 어떤 여자한테서 온 편지였지. 퍽 나무랄 줄 알지만 자기 일이 그랬노라고. 탈없는 뱃길을 빈다고. 처음 뱃길에, 게다가 뜻밖의 편지로 어수선해서 멀어져가는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갈매기 한 마리가 우리 배를 자꾸 따라오는 걸 봤지. 아까 30 내가 한 얘기는 바로 그때 캡틴이 내게 한 거야. 난 그게 꼭 그녀 모습이라고 생각했어. 그 후에도 가끔 그런 일이 있었지. 허지만 다 옛날 얘기고, 지금은 뱃길마다 어김없이 아들 마누라에게 선물 사가는 것이 즐거움인 늙은일세." - P29
명준은, 대들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숨을 죽였다. 그를 향하고 있는 네 개의 얼굴. 그것은 네 개의 증오였다. 잘잘못간에 한번 윗사람이 말을 냈으면, 무릎 꿇고 머리 숙이기를 윽박 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짜증 끝에 성 낸, 미움에 일그러진 사디스트의 얼굴이었다. 빌자, 덮어놓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그의 생각은 옳았다. 모임은 거기서 10분 만에 끝났다. 명준은 사무친 낯빛을 하고, 장황한 인용을 해가며, 허물을 씻고 당과 정부가 바라는 일꾼이 될 것을 다짐했다. 지친 안도감과 승리의 빛으로 바뀌어가는 네 사람 선배 당원의 낯빛이 나타내는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명준은, 어떤 그럴 수 없이 값진 ‘요령‘을 깨달은 것을 알았다. 슬픈 깨달음이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슬기였다. 그는 가슴에서 울리는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옛날 그는 S서 뒷동산에서 퉁퉁 부어 오른 입언저리를 혓바닥으로 핥으면서 이 소리를 들었다. 그의 마음의 방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이번 것은 더 큰 울림이었다. 그러나 먼 소리였다. 무디게 울리는 소리. 광장에서 동상이 넘어지는 소리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 엎드려서 울고 싶었으나, 울기 위해서는 그는 네 개의 벽이 아직도 성한 그의 방으로 가야 했다. 아니 그의 마음에 방이 아니다. 마음의 방은 벌써 무너진 지 오랬으므로. 그의 둥글게 안으로 굽힌 두 팔 넓이의 광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혼자서 운다는 일은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젓한 몸가짐이었다. 눈에 보이건 안 보이건 사람을 우상 앞에서만 운다. 멍석 없이는 못 하는 지랄도 있던 것이다. 이제 명준에게 남은 우상은, 부드러운 가슴과 젖은 입술을 가진 인간의 마지막 우상이었다. 오늘 일로 하여 그는 절박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 P127
그녀는, 명준의 낌새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챘는지, 아무 소리도 없이 따라 앉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가슴이 비었다. 뱃속도 비었다. 시장기가 심할 때, 가슴과 배가 쓰리고 허할 때 같았다. 그러면서 먹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 P129
당장에는 단 한 술을 뜰 것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 가슴에서 배 쪽으로 뻗치는 빈 기운이 있었다. 몸 속에 있던 내장들이 깡그리 비어버리고, 그처럼 휑뎅그런 몸뚱어리 속을 바람이 불고 지난다. 감았던 눈을 번쩍 떴을 때, 수그린 이마 바로 앞에, 그녀의 비스듬히 옆으로 뻗친 두 다리가 있었다. 아직도 해가 있어서 불을 켜지 않은 방안에는, 땅거미 질 무렵의 은근한 붉은 기운이 알릴락말락 녹아 있었다. 양말을 신지 않은, 맵시 있게 살이 붙은 두 다리는, 문득 생생했다. 명준은 가슴이 꽉 막혔다. 보고 있으면 볼수록, 그 기름한 살빛 물체는 나서 처음 보는 듯이 새로웠다. 곤색 스커트 무르팍에서부터 내민 다리는, 뚝 끊어져서 조용히 놓인 토르소였다. 사랑하리라. 사랑하리라. 명준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이 잔잔한 느낌만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위해서라면,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모든 소비에트를 팔기라도 하리라. 팔 수만 있다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진리의 벽을 더듬은 듯이 느꼈다. 그는 손을 뻗쳐 다리를 만져보았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한 진리다. 이 매끄러운 닿음새, 따뜻함. 사랑스러운 튕김. 이것을 아니랄 수 있나. 모든 광장이 빈터로 돌아가도 이 벽만 남는다. 이 벽에 기대어 사람은, 새로운 해가 솟는 아침까지 풋잠을 잘 수 있다. 이 살아 있는 두 개의 기둥. 몸의 길은 몸이 안다. 그녀는 예사로운 애무로 아는 모양인지 하는대로 보고만 있다. - P129
"은혜" "네." 고즈넉이 네 하는 이 짐승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밖에서 졌기 때문에, 은혜에게 이처럼 매달리는 걸까. 이긴 시간에도 남자가 이토록 사무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아마 없을 테지. 졌을 때만 돌아와서 기대는 곳. 기대서 우는 곳. 철학을 믿었을 때, 그녀들에게 등한했었다. 사회 개조의 역사 속에 새로운 삶의 보람을 걸어보려던 월북 직후의 나날, 윤애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무엇이 남았나? 나에게 남은 진리는 은혜의 몸뚱어리뿐. 길은 가까운 데 있다? 명준은 거칠게 그녀를 껴안았다. 그의 품속에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늘 그랬다. 이 여자가, 인민을 위한 ‘예술 일꾼‘ 이며, 인류의 역사를 뜯어고치는 거창한 대열에 발맞춰나가는 ‘여성 투사‘라? 좋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은혜다. 내 거다. 그 밖에 그녀가 되고 싶어하는 여러 것일 수 있다. 그는 그녀의 뺨에 자기의 그것을 비볐다. 도톰한 입술을 깨물어 열고 부드러운 혀를 씹었다. 어느새 해가 지고 방안은 어두웠다. 그는 한 팔로 그녀를 받쳐안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만져본다. 목을 더듬었다. 가슴과 허리를 짚어 내려갔다. 벅찬 깨달음을 준 다리를 쓸었다. 몸의 마디마디 그 자리를 틀림없이 알고 싶었다. 움직일 수 없이 자기에게 기대는 따뜻한 벽을 손으로 어루만져, 벽돌 하나하나를 다짐해보고 싶었다. 손이 떨어지면 그것들은 자기한테서 떠날것만 같았다. 순례자가 일생에 몇 번이고 성지를 찾아 의심을 죽이고 믿음을 다짐하듯이, 손에 닿고 만져지는 참에만 진리는 미더웠다. 남자가 정말 믿을 수 있는 진리는, 한 여자의 몸뚱어리가 차지하는 부피쯤에 있는 것인가. 모든 우상은 보이지 않는 걸 믿지 못하는 사람의 약함 때문에 태어난 것. 보이지 않는 것은 나도 믿지 못해. - P130
순간 그의 주먹이 태식의 얼굴을 갈겼다. 수갑이 채인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쓰러지는 태식을, 발길로 걷어찼다. 태식의 얼굴은 금시 피투성이가 됐다. 그 핏빛은, 몇 해 전 바로 이 건물에서, 형사의 주먹에 맞아서 흘렸던, 제 피를 떠올렸다. 그때 형사가 하던 것처럼, 태식의 멱살을 잡아일으켜, 또 한 번 얼굴을 갈겼다. 제 몸에 그 형사가 옮아앉은 것 같은 환각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의 몸을 짓이기는 버릇은 이처럼 몸에서 몸으로 옮아가는 것이구나. 몸의 길. - P148
그는 끝내, 윤애의 몸에서 똑똑한 응답을 받아보지 못했었다. 깡그리 그녀를 차지했다고 믿기가 무섭게 그녀가 보이곤 하던, 알 수 없는 버팀은, 유리를 사이에 두고 물건을 만지려고 할 때처럼, 밑창 없는 안타까운 허망 깊이 그를 차넣었었다. 사람의 사귐이 몸의 그것조차도 얼마나 믿지 못할 길인가를 말해주었다. 고문은 그렇지 않다고 처음에 생각한 것이다. 그가 준 팔의 힘에 꼭 맞먹는 외마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믿은 것은, 그러나 잘못이었다. 엄살을 부리는 사람이 있었고, 참아내려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는 쪽과 받는 쪽의 셈을 헷갈리게 했다. 다섯을 줬는데 여섯을 받는 사람과, 넷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어긋남을 줄이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매를 더하는 것, 꾀죄죄한 체면을 차릴 수 없도록 녹초를 만들어버리는 길이었으나, 그 길은 길이자, 벼랑 끝이었다. 저쪽을 없애버리고는 내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분별이 없어져버린 몸은 어울릴 값어치가 없었다. 지칠 대로 지쳐서 함부로 지르는 헛소리를 참다운 항복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의식을 되찾고 숨을 돌리자마자, 그들은 또다시 점잔을 부리려 했고, 또 녹초를 만들면 의식을 잃은 살덩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명준은, 고문에서도 졌다. 그리고 그 무렵, ‘역사‘를 앞지르는가 싶던 ‘어른‘들의 ‘밖‘의 움직임도 ‘역사‘의 느린 걸음걸이에 져가고 있었다. - P156
"왜 이런 전쟁을 시작했을까요?" "고독해서 그랬겠지." "누가?" "김일성 동무지."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한참만에, 이쪽으로 돌아누우면서, 명준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자기가 외롭다고 남을 이렇게 할 권리가 있나요?" "권리? 권리가 있어서만 움직인다면 벌써 천당이 왔을 거야." "김일성 동무는 애인이 없었던가보지요?" "있어도 신통치 않았겠지." "이동무가 수상이라면 어떡하시겠어요?" "나? 나 같으면 이따위 바보 짓은 안 해. 전쟁 따윈 안 해. 나라면 이런 내각 명령을 내겠어. 무릇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삶을 사랑하는 의무를 진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적이며, 자본가의 개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스파이다. 누구를 묻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한다. 이렇게 말이야." "하하하." 그녀는 남자처럼 웃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명준의 목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런 시인을 수상으로 가진 인민들만 봉변이군요." "시인? 아 그럼 그 과학적인 친구들이 앉아서 한다는 게 요꼴인가? 아니야." - P161
눈을 뜨고 은혜를 들여다본다. 그녀도 눈을 뜨고 남자의 눈길을 맞는다. 서로, 부모미생전 먼 옛날에 잃어버렸던 자기의 반쪽이라는 걸 분명히 몸으로 안다. 자기 몸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사랑스러울 리 없다. 그는 팔을 둘러 그녀의 허리를 죄었다. 뉘우치지 않는다. 내가 잘나지 못한 줄은 벌써 배웠다. 그런 어마어마한 이름일랑 비켜가겠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 이 햇빛. 저 여름풀. 뜨거운 땅. 네 개의 다리와 네 개의 팔이 굳세게 꼬여진, 원시의 작은 광장에, 여름 한낮의 햇빛이 숨가쁘게 헐떡이고 있었다. 바람은 없다. - P163
에덴 동산에서의 잘못에서 법왕제에 이르는 기독교의 걸음걸이는, 그대로 코뮤니즘의 낳음과 자람의 걸음에 신기스럽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들은, 쌍둥이 그림이었다. 철학을 배운 그는, 이 곡절을 흘려보지는 못했다. 곡절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제자였다는 데 있었다. 헤겔은, 바이블에서, 먼저, 역사적 옷을 벗기고, 다음에 고장 색깔을 지워버린 후, 그 순수 도식만을 뽑아낸 것이다. 말하자면, 헤겔의 철학은, 바이블의 에스페란토 옮김이었다. 도식이란, 그것이 뛰어날수록 본뜨기 쉽다. 마르크스는 선생이 애써 이루어놓은 알몸에다, 다시 한번 옷을 입혔다. 경제학과 이상주의의 옷을. 초대 교회의 고지식한 정열과 알뜰한 믿음을, 현대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듯이, 비록 코뮤니즘이 겉으로는 넓은 땅을 거느리기에 이르렀지만, 그 창시자들의 바르게 생각하고 착하게 살려던, 고지식한 마음은 없어진 지 오래다. 유럽 사람들의 믿음에서, 헤겔의 철학이 달콤한 아편이요 씻어낼 수 없는 독소가 된 것처럼, 이명준에게 있어서, 스탈린주의 사회에서 살아보았다는 겪음은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굿마당에서 그들은, 헛것을 섬김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제 머리로 참을 헤아림이 아니라 푸닥거리에 기대는 곳이었다. 제가 낸 신명이 아니라, 무쇠 같은 멍에가 다스리는 곳이었다. 사랑과 용서가 아니라, 미움과 앙갚음이었다. 그것은, 러시아 정교회 성경 대신 마르크스주의를 택한, 짜르 나라였다. - P167
스탈리니즘에 있어서의 마틴 루터는, 아직 없다. 크렘린의 서슬에 맞선 사람은, 이단 신문소에서 화형이 되었다. 권위는 아직도 튼튼하다. 하느님이 다시 온다는 말이 2천 년 동안 미루어져온 것처럼, 공산 낙원의 재현은 30년 동안 미루어져왔다. 여기까지가 그가 알아볼 수 있었던 벼랑 끝이었다. 벼랑을 뛰어넘거나 타고 내리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 무서운 밀림에 과연 얼마나한 자리를 낼 수 있을지, 자기 힘에 대한, 지적 체력에 대한 믿음이 자꾸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북조선 사회에서는 이런 물음을 누군가와 힘을 모아 풀어나간다는 삶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벌써 전쟁이 나기 전에 알고 있은 일이었다. 오랜 세월을 참을 차비가 되어 있었다. 역사의 속셈을 푸는 마술 주문을 단박 찾아내지 못한다고 삶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참고, 조금씩, 그러나 제 머리로 한치씩이라도 길을 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그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북조선 같은 데서, 적에게 잡혔다가 돌아온 사람의 처지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이명준은 자기한테 돌아온 운명을 한탄했다. 적어도 남만큼한 충성심을 인정받으면서, 자기가 믿는 바대로 남은 세월을 조용히, 그러나 자기 힘이 미치는 너비에서 옳게 써나간다는 삶조차도 꾸리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제국주의자들의 균을 묻혀가지고 온 자로서, 일이 있을 적마다 끌려나와 참회해야 할 것이었다. 마치 동네 안에 살면서도 사람은 아닌 문둥이처럼. 그런 처지에서 무슨 일을 해볼 수 있겠는가. 이것이 돌아갈 수 없는 정말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남녘을 택할 것인가? 명준의 눈에는, 남한이란 키에르케고르 선생식으로 말하면,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 아닌 광장이었다. - P168
미친 믿음이 무섭다면, 숫제 믿음조차 없는 것은 허망하다. 다만 좋은 데가 있다면, 그곳에는, 타락할 수 있는 자유와, 게으를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정말 그곳은 자유 마을이었다. 오늘날 코뮤니즘이 인기 없는 것은, 눈에 보이는, 한마디로 가리킬 수 있는 투쟁의 상대—적을 인민에게 가리켜줄 수 없게 된 탓이다. 마르크스가 살던 때에는 그렇게 뚜렷하던 인민의 적이 오늘날에는, 원자 탐지기의 바늘도 갈팡질할 만큼 아리송하기만 하다. 가난과 악의 왕초들을 찾기 위하여, 나누어지고 얽히고설킨 사회 조직의 미궁 속을 헤매다가, 불쌍한 인민은, 그만 팽개쳐버리고, 예대로의 팔자풀이집, 동양 철학관으로 달려가서, 한 해 토정비결을 사고 만다. 일류 학자의 분석력과 직관을 가지고서도, 현대 사회의, 탈을 쓴 부패 조직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드는 판에, 김서방 이주사를 나무라는 건, 아무래도 너무하다. 그래서 자유가 있다. 북녘에는, 이 자유가 없었다. 게으를 수 있는 자유까지도 없었다. 그건 제 멋 짓밟기다. 남한의 정치가들은 천재적이었다. 들어찬 술집마다 들어차서, 울랴고 내가 왔던가 웃으랴고 왔던가를 가슴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대중을 위하여, 더 많은 양조장 차릴 허가를 내준다. 갈보장사를 못 하게 하는 법률을 만들라는 여성 단체의 부르짖음은 그날 치 신문 기사거리를 만들어주는 게 고작이다. 그들의 정치철학은 의뭉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런 데로 풀리는 힘을 막으면, 물줄기가 어디로 터져나올지를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에겐, 진심으로, 교회에 나가기를 권유하고, 외국에 보내서 좋은 가르침을 받게 하고 싶어한다. 이런 사회, 그런 사회로 가기도 싫다. 그러나 둘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박헌영 동지가 체포되었다 하오. 전해듣게 된 그 흉한 소식. 아버지.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짐승이었다. 그때, 중립국에 보내기가 서로 말이 맞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얼이 빠져 주저앉을 참에 난데없이 밧줄이 내려온 것이었다. 그때의 기쁨을 그는 아직도 간직한다. 판문점. 설득자들 앞에서처럼 시원하던 일이란, 그의 지난날에서 두 번도 없다. - P169
준다고 바다를 마실 수는 없는 일. 사람이 마시기는 한 사발의 물. 준다는 것도 허황하고 가지거니 힘도 철없는 일. 바다와 한 잔의 물. 그 사이에 놓인 골짜기와 눈물과 땀과 피. 그것을 셈할 줄 모르는 데 잘못이 있었다. 세상에서 뒤진 가난한 땅에 자란 지식 노동자의 슬픈 환장. 과학을 믿은 게 아니라 마술을 믿었던 게지. 바다를 한 잔의 영생수로 바꿔준다는 마술사의 말을. 그들은 뻔히 알면서 권력이라는 약을 팔려고 말로 속인 꾀임을, 어리석게 신비한 술잔을 찾아나섰다가, 낌새를 차리고 항구를 돌아보자, 그들은 항구를 차지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참을 알고 돌아온 바다의 난파자들을 그들은 감옥에 가둘 것이다. 못된 균을 옮기지 않기 위해서. 역사는 소걸음으로 움직인다. 사람의 커다란 모순과 업(業)에 비기면, 아무 자국도 못 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대까지 사람이 만들어낸 물질 생산의 수확을 고르게 나누는 것만이 모든 시대에 두루 맞는 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 아닌가. 벌써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 동네가 알아낸 슬기. 사람이라는 조건에서 비롯하는 슬픔과 기쁨을 고루 나누는 것. 그래봐야, 사람의 조건이 아직도 풀어나가야 할 어려움의 크기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이루어놓은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이루어야 할 것에만 눈을 돌리면, 그 자리에서 그는 삶의 힘을 잃는다. 사람이 풀어야 할 일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그것이 ‘죽음‘이다. 은혜의 죽음을 당했을 때, 이명준 배에서는 마지막 돛대가 부러진 셈이다. 이제 이루어놓은 것에 눈을 돌리면서 살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다. 팔자소관으로 빨리 늙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된 몸의 길, 마음의 길, 무리의 길. 대일 언덕 없는 난파꾼은 항구를 잊어버리기로 하고 물결 따라 나선다. 환상의 술에 취해보지 못한 섬에 닿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 섬에서 환상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서운 것을 너무 빨리 본 탓으로 지쳐빠진 몸이, 자연의 수명을 다하기를 기다리면서 쉬기 위해서. 그렇게해서 결정한, 중립국행이었다.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지도 모를 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 P173
이런 모든 것이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는 이루어지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중립국을 골랐다. - P177
우리 목숨을 주무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장삼이사, 그놈이 그놈이다. 자기만 별난 줄 알면 못난이 사촌이다. 광장에서 졌을 때 사람은 동굴로 물러가는 것. 그러나 과연 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사람은 한 번은 진다. 다만 얼마나 천하게 지느냐, 얼마나 갸륵하게 지느냐가 갈림길이다. 갸륵하게 져? 아무튼 잘난 멋을 가진 사람들 몫으로 그런 짜리도 셈에 넣는다 치더라도 누구든 지는 것만은 떼어놨다. 나는 영웅이 싫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 좋다. 내 이름도 물리고 싶다. 수억 마리 사람 중의 이름없는 한 마리면 된다. 다만, 나에게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을 달라. 그리고, 이 한 뼘의 광장에 들어설 땐,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만한 알은체를 하고, 허락을 받고 나서 움직이도록 하라. 내 허락도 없이 그 한 마리의 공서자를 끌어가지 말라는 것이었지. 그런데 그 일이 그토록 어려웠구나. - P179
가까운 사이에 흔히 그렇듯이, 선장은, 명준을 새삼 거들떠보는 일도 없이,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서, 해도 위에 몸을 굽혔다. - P184
서랍을 열고, 아까 선장이 들어오는 바람에 미처 돌려놓지 못한 총알을 제자리에 놓는다. 몹시 중요한 일을 마친 사람처럼, 홀가분해진다. - P186
모르는 나라, 아무도 자기를 알 리 없는 먼 나라로 가서, 전혀 새사람이 되기 위해 이 배를 탔다. 사람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성격까지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있다고 믿는다. 성격을 골라잡다니! 모든 일이 잘 될 터였다. 다만 한 가지만 없었다면.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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