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호흡을 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를 유지하려 애썼다.
"좋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지내게 됐으니까,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보는 게 어떨까요."
그때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 어쩐지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똑바로 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고 턱이 약한 경련으로 씰룩거렸다.
"그냥…… 다른 사람과 같이 보내기에는 굉장히 긴 시간이라서요. 하루 종일이니까." 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하시고 싶은 일이나, 좋아하시는 걸 좀 말씀해주시면 제가……."
이번엔 정적이 고통스러웠다. 찔끔찔끔 기어드는 내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고 두 손을 어디 둬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트리나의, 그 애 특유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공중으로 휘발되어 사라져버렸다. - P57

처음 2주 동안 나는 월 트레이너를 아주 가까이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옛날의 자신과 한 군데도 닮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작정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장발로 방치하고 수염도 턱을 다 덮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두었다. 육체적 피로, 아니면 꾸준한 심신의 불편(네이선은 그 몸이 편할 날은 거의 없다고 했다) 탓인지 회색 눈가에는 잔주름이 져 있었다. 눈에는 세상에서 늘 몇 걸음 떨어져 살아가는 사람 특유의 공허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가끔 그게 방어기제 때문일까 생각했다. 그가 삶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일을 겪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믿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 P64

발소리가 들리기에 나는 마치 방금 들어온 것처럼 땔감 바구니 위로 허리를 굽혔다.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알리샤가 내 앞에 나타났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목 멘 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말없이 화장실이 있는 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녀가 내 얼굴을 매섭게 노려보는 걸로 봐서 아마 내 감정이 얼굴에다 드러난 모양이다. 감정을 숨기는 데는 항상 젬병이었다.
"그쪽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난 노력했어요. 정말로 노력했다고요. 몇 달 동안이나. 하지만 그가 나를 밀쳐냈단 말이에요." 턱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격분한 얼굴이었다. "그이는 진심으로 내가 여기 있는 걸 싫어했어요. 아주 명확하게 의사를 표명했다고요."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사실 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에요." 한참 있다가 내가 말했다.
우리 둘 다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이봐요, 아무리 도와주고 싶어도 도움받기를 싫어하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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