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정치‘가 ‘사랑‘을 압도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이 안전할 수 있는 자리를 잡으려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자리를 잘못 잡으면, 불행이 찾아오리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삶은 결코 우리에게 안정과 평화를 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본과 권력의 감언이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이 생계와 생존만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 결과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게 된 것 아닐까? 대립과 갈등이 심화될 때,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려고 드는 것이 바로 자본과 권력의 생리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시대 자본과 권력이야말로 우리가 사랑과 공존의 지혜를 포기하도록 만든 주범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치‘의 길이 아닌 ‘사랑‘의 길도 있다는 소중한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만큼 우리는 비속해졌고, 갈수록 약육강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분명 사랑의 길은 엄청난 고행을 예약하는 길이다. 이성복 시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것은 생리이며, 결코 인간적이라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비록 힘들지만 사랑을 통해 ‘적과 동지‘라는 해묵은 대립과 갈등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 P276

기독교도들은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을 자주 언급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말이 가진 혁명적인 힘을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육신을 낳아준 아버지보다 우리의 영혼을 창조한 하느님이 진정한 아버지라는 선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가족, 민족, 인종이란 육체적 구별을 넘어서 모든 인간을 유일한 아버지의 피조물로 볼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가 지역 종교가 아니라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던 비밀이 있다. 이제야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함축하는 파괴력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유대인을 지배했던 로마인마저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란 민족적 구별을 넘어서지 않았다면, 예수가 어떻게 이런 가르침을 선포할 수 있었겠는가? 유대인 입장에서 로마인은 원수지만,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모두 자신의 피조물, 즉 자식들에 지나지 않는다. - P279

세 명의 자식을 둔 어느 아버지가 있다. 불행히도 막내 아이는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몸이 성하지 않다. 아버지는 세 명의 자식 중 누구에게 가장 애정을 기울일 것인가? 당연히 막내 아이일 것이다. 몸이 성한 나머지 두 자식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그들은 막내 동생을 사랑하고 돌볼 때 아버지가 가장 흡족해하리라는 것, 그리고 오직 그럴 때에만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제 아버지를 ‘하느님=아버지‘로 확장해보자. 기독교도들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당연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이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노동자들일 것이다. 물론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라면 남성보다는 여성들을 더 아끼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 - P280

어느 고등학교에서 인문학과 관련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강의 말미에 어떤 여학생이 내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이상과 현실은 타협할 수 있는 것인가요?" 잠시 숙고하다가 나는 그 학생에게 말했다. "이상과 현실의 타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현실이란 급류, 그러니까 모든 것을 휩쓸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압도적인 강물과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이런 급류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럼 이상이란 무엇일까요? 그건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나무토막 같은 겁니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그 나무토막을 강바닥에 박고 버텨야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급류의 힘이 너무 강해 질질 끌려가기 쉬울 겁니다. 그렇지만 강바닥에 박은 나무토막이 없다면, 우리는 급류의 힘에 저항할 수도 없을 겁니다." - P284

사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주체‘라는 말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살았다"는 표현은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수 있다. 이것은 역으로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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