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지배 전략은 고통을 사유화하고, 그럼으로써 고통의 사회성을 은폐하여 고통의 사회화와 정치화를 가로막는 것에 주력한다. 정치화는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으로 해체된다. 공공성은 사적 공간들로 분해된다.
공적 공간과 경청자들의 공동체, 그리고 정치적 경청자 집단을 만들어내려는 정치적 의지는 근본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화는 이러한 과정을 촉진시킨다. 인터넷은 오늘날 공동의 소통 행위 공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터넷은 오히려 자아의 전시 공간으로 해체되고, 이 공간들 안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광고한다. - P116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우리는 경청의 윤리학을 읽어낼 수 있다. 모모의 우선적인 특징은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모모가 넉넉히 갖고 있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모모의 시간은 특별한 시간이다. 이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다시 말해 모모가 타인들을 경청함으로써 그들에게 주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모모의 뛰어난 경청 능력을 칭찬한다. 모모는 경청자로서 등장한다. "어린 모모가 누구보다도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경청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딱히 특별한 능력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독자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경청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진실로 경청할 줄 아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모모터럼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모모밖에 없었다." 모모는 그저 거기에 앉아 들을 뿐이다. 그런데도 모모의 경청은 기적을 낳는다. 모모는 사람들이 혼자서는 결코 떠올릴 수 없었을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다. 실로 모모의 경청은 헤르만 브로흐의 환대하는 경청, 타인을 그 자신에게로 해방시키는 경청을 연상시킨다. "그럴 때 모모는 그 크고 짙은 눈으로 다른 사람을 쳐다보았고, 상대는 자기 안에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경청하면 혼란에 빠지거나 어찌할 줄 모르던 사람들도 갑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사람들도 갑자기 자신이 자유롭다고, 용기가 솟는다고 느꼈다. 불행하거나 우울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기쁨을 느꼈다. 또 자신의 삶은 완전히 실패했고 아무 의미가 없으며, 자기는 수백만의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하고,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고장 난 냄비처럼 다른 사람들로 금세 교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린 모모에게 가서 이런 모든 이야기들을 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말하는 도중에 이미 자기가 자신을 아주 잘못 생각했고, 정확하게 자신과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고, 그래서 자신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모모는 그렇게 경청할 줄 알았다!" 경청은 누구에게나 그에게 속한 것을 되돌려 준다. 모모는 순수한 경청만으로 싸움도 조정한다. 경청은 화해시키고, 치유하고, 구원한다. "언젠가는 어린 소년 하나가 모모에게 노래를 하지 않는 카나리아를 데리고 왔다. 모모에게는 훨씬 더 어려운 과제였다. 모모는 일주일 내내 그 새를 경청해야 했다. 그러자 결국 새는 다시 지저귀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