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범죄인을 찾아간 기자들이 감금이나 폭행 또는 그 이상의 해를 입어 언론의 역할이 꾸준히 위축돼왔을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테러범을 만났고, 그가 대중을 상대로 한 대규모 살상을 곧 저지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신고밖에 선택 사항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결국 원칙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불행히도 지금까지 딱히 정해진 것이 없다. 그래서 이런 기준을 제시해본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기자도 한 명의 보통 시민 역할을 한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은 미국 법원에서 개인의 자유를 유보하고 그에게 도덕적 의무를 강제할 때 활용한 개념이다. 이에 비춰본다면 정씨 신고 문제에는 어떤 답이 나올까. 내가 덴마크 현장에 있었다면 계속 기다리는 쪽을 택했을 것 같다." 고려대학교 공대 교수 윤태웅은 「시민적 정체성과 전문가적 정체성」이라는 칼럼에서 이 문제를 ‘시민적 정체성과 전문가적 정체성을 분리하는 문제‘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훌륭한 방송사의 기자가 선의로 좋은 일을 했으니 괜찮다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럼 극우 언론사의 기자가 수배 중인 해고 노동자를 뒤쫓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경찰에 알리는 경우는 어떤가요? 기자의 가치관이 판단의 기준일까요? 간단치 않습니다. 시민으로서 신고하고 기자로서 취재한 제이티비시 기자의 선택이 정당했다 하더라도, 제기된 문제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겠다 싶습니다(참고로 제가 제이티비시 기자였어도 신고는 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이후의 영상을 방송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P259
이 기자들은 "왜 진작 나서서 이 사태를 막지 못하고 이제 와서 이러냐고 혼내셔도 좋다. 일선에서 취재한 우리 막내 기자를 탓하셔도 좋다. 다만 엠비시가 다시 정상화될 수 있도록 욕하고, 비난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달라"고 했다. "(시청자 여러분들이) 엠비시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영상 말미의 자막에는 "‘보도 정상화‘를 위해 김장겸 보도본부장, 최기화 보도국장 사퇴, 해직 · 징계 기자의 복귀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2012년 파업 이후 MBC에서 해고된 박성제 기자는 페이스북에 "아마 이 영상을 만든 후배들은 중징계를 받겠지만 MBC 뉴스를 되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썼다. - P262
손석희는 25년 전 공정방송을 위한 50일 파업을 마친 뒤, 1992년 12월호 『말』과의 인터뷰에서 ‘생에서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실체는 분명하지 않더라도 지금껏 제 일생에 지켜온 어떤 일관성이 있다면 그것을 끝까지 지키고 싶습니다." "나이가 든다고, 지위가 달라진다고 해서 제 자신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겁니다." - P274
"권력은 종편에서 나온다?" ‘손석희 현상‘에 대한 나의 기록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이 글은 이제 여기서 끝맺어야 할 것 같다. 종편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무리를 지어보자. 변호사 정정훈은 2015년 12월 16일 『한겨레』에 「권력은 종편에서 나온다?」는 칼럼을 기고했는데, 이 칼럼에 대해 ‘konstar‘라는 아이디를 가진 네티즌이 장문의 댓글 반론을 폈다. 그 내용이 재미있다. 잠시 감상해보자. "나도 그 <내부자들> 이런 영화를 봤습니다. 거기 보면 보수 언론 논설주간인 이강희(백윤식 분)가 국가 운영의 디자이너처럼 묘사됩니다. 집권당 후보나 재벌 회장까지 그가 조정하는 것처럼 말이죠. 매우 비현실적인 과장입니다. 지금 종편 운운하는데, 글쓴이, 국민은 종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에요. 종편이 내가 하고픈 말을 해주니까 시원하게 생각하면서 보는 거요. 아무리 김대중이라도 『한겨레』같은 헛소리해보세요. 독자들이 당장 떠나갑니다. 명심하세요. 예전에 강준만이란 자가 안티조선운동을 할 때, 그 세력들은 국민들이 『조선일보』를 보고 세뇌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국민들은 『조선일보』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조선일보』가 자신들의 의견을 시원하게 대변해주니까 애독하는 거예요. 이젠 종편 탓을 합니다. 이 글쓴이는 종편을 보면, 아 박근헤 지지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던가요? 아니지요? 당신도 생각이 있으니까. 보슈, 다른 국민들도 당신만큼은 알고 선택합니다. 그걸 아세요. 이 글쓴이와 친노들에게 좀 묻지요. 종편을 보면 새누리당과 박근혜를 지지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던가요? 아니라구요? 그런데 왜 다른 시청자들은 종편에 넘어간다고 생각하나요? 당신네들이 국민들보다 지적 능력이나 판단력에서 더 우월하고 소신도 있다는 건가요?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가당치도 않은 자만심은 지나가는 개구리에게 던져주길 바랍니다. 친노들, 당신들보다 못한 국민은 없어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제 파악을 하길 바랍니다. 나는 일개 서민에 불과하지만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이라도 내 생각과 다르면 그냥 웃고 넘깁니다. 『한겨레신문』의 무슨 저 곽병찬, 성한용, 김종구니 무슨 김의겸이니 이런 사람들 글……읽어보고 내가 현혹되겠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나도 그런데 다른 국민들은 어떨까요? 대한민국에 이 Konstar보다 못한 국민은 없습니다. 다들 소신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주관이 있는 거예요. 누가 언론에 넘어간다는 가당치도 않은 억지부터 접어야 글을 제대로 쓸 겝니다." - P276
‘의제설정‘과 ‘순진한 냉소주의‘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을망정 ‘konstar‘의 댓글은 꽤 일리도 있고 그럴듯한 주장이다. ‘konstar‘가 의제설정議題 設定, agenda-setting 이론을 좀더 깊이 있게 알고 썼더라면 더욱 좋은 반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신문의 1면 머리기사나 TV의 저녁 뉴스 첫머리에 어떤 기사를 내보낼 것인가? 언론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어떤 기사는 크게 보도할 수도 있고 작게 보도할 수도 있다. 즉, 기사의 중요성을 언론이 결정하는 것인데, 이게 바로 의제설정이다. 의제설정 권한은 언론의 존재 근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언론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의제설정을 어떻게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언론의 영향력이 결정되기 떄문이다. 미국의 대선 캠페인을 분석한 저서를 여러 권 낸 바 있는 정치 전문 저널리스트인 시어도어 화이트는 언론의 의제설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에서 언론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공중 토론의 의제를 제공하며, 이 대단한 정치적 힘은 어떤 법률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다. 언론은 사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생각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독재자, 성직자, 정당, 정당 총재에게나 부여될 수 있는 권한이다." 언론이 특정 이슈를 강조하거나 부각함으로써 수용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이슈들을 중요하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효과 또는 기능을 가리켜 ‘의제설정 기능‘이라고 한다. 즉, 언론이 수용자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도록what to think‘ 하기보다는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도록what to think about‘ 이끈다는 것이다. 미국 정치학자 버나드 코헨은 "언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데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데엔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다" 고 했다. 이 말은 디지털 혁명의 와중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konstar‘가 잘 지적한 것처럼, 언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데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혹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konstar‘의 말마따나 그런 가당치도 않은 자만심은 지나가는 개구리에게 던져주는 게 좋겠다. 물론 지나가는 개구리 보기가 쉽진 않을 테니, 지나가는 개에게 던져주는 게 무난하겠다. 이와 관련된 ‘konstar‘의 주장에 대해선 나는 대체적으로 지지를 보낸다. 아니 지지를 보낼 뿐만 아니라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일각(진보 진영)이 거대 보수 언론을 평가할 때에 보이는 ‘순진한 냉소주의naive cynicism‘도 의심의 대상으로 삼으면 좋겠다는 제안이다. ‘순진한 냉소주의‘는 다른 사람이 실제보다 이기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향이나 편견을 가리키는 말로, 심리학자 저스틴 크루거와 토머스 길로비치가 1999년에 제시한 개념이다. 냉전 시 소련의 군축 협상 제의를 미국이 거절한 것이나 정치에서 상대편에게 무슨 속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어떤 제안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을 악화시키는 효과를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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