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술작품이나 풍경 앞에서 전율할 때가 있다. 그것의 아우라를 느낀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느끼게 될 것이다. 살아 있기 때문에 이런 매혹적인 것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에서 아우라를 느끼는 순간은 동시에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모나리자가 아니어도 좋다. 주변의 작은 것에서도 아우라를 느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무더운 여름 하늘 위를 떠가는 구름에서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에서도, 아니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에서도, 아우라를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까. - P226

산업자본은 기본적으로 시간적 차이, 즉 유행을 만들면서 이윤을 얻는 체계이다. 이 점에서 산업자본은 미리 주어진 공간적 차이를 이용하여 이윤을 얻으려는 상업자본과는 질적으로 다른 논리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을 획득한다. 가령 동대문 패션타운에서의 옷 가격과 춘천 의류 매장에서의 옷 가격 사이에 차이가 난다면, 상업자본은 이윤을 남길 수 있다. 동대문에서 5만원에 사서 춘천에서 7만 원에 팔면, 2만 원이란 이윤이 남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상업자본이 이용한다는 공간적 차이는 단순한 공간적 차이라기보다 가격 차이가 나는 공간적 차이인 셈이다.
반면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달리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기려고 한다. 가령 핸드폰을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서 기존의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오직 그럴 떄에만 산업자본은 소비자들이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산업자본은 상업자본보다 더 탁월한 이윤 획득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상업자본이 이미 존재하는 공간적 차이를 이용할 수 있을 뿐이지만, 산업자본은 스스로 유행을 만들어서 시간적 차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상업자본의 이윤 추구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만약 가격 차이가 나는 공간들이 사라진다면, 상업자본의 이윤 추구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산업자본의 이윤 추구는 논리적으로 한계가 없다. 새로운 유행, 혹은 시간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 P230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행을 소비자들이 집단적으로 특정 스타일을 선호하고 선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본 것이다. 유행은 소비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리오타르가 보았던 것도 바로 이런 산업자본의 생리였다. ‘새로운‘ 상품을 내놓아 기존 상품을 낡은 것으로 만들면서, 소비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하는 매커니즘을 산업자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업자본이 기존의 가치나 통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우리 인간은 드디어 ‘새로움‘ 혹은 ‘낡음‘과 관련된 시간의식을 얻게 된 셈이다. - P231

1997년 외환 위기 때 정부는 비겁한 짓을 했다. 경제 위기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마치 우리 국민들이 낭비와 사치를 일삼았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선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국민들이 자신의 무분별한 소비를 반성하면서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나 혹은 장롱에 들어 있던 금붙이를 아낌없이 내놓았다. 심지어 정부 조직을 중심으로 ‘아나바다‘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꾸어 쓰고 다시 쓰자‘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을 일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자신이 벌어들인 돈으로 자신이 만든 상품을 활기차게 구매할 경우에만 유지되는 체제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이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베버는 자본주의 번성의 원인을 금욕적인 태도와 정신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부와 자본가들이 이 책을 놓칠 리가 없었다. - P233

이 책에서 베버는 서양에서 유독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된 원인을 해명하려고 했다. 마침내 그는 선언한다. 프로테스탄티즘과 그로부터 유래하는 금욕 정신이야말로 서양에서만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된 주된 원인이라고 말이다.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현세의 삶은 심판의 대상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도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사후의 심판 그리고 심판 이후의 영원한 삶이다. 그들이 육체적 삶이 아닌 정신적 삶을 지향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사후의 삶은 육체적인 쾌락과 무관한 정신의 삶인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육체적 욕망이나 쾌락 추구를 사탄의 유혹이라고 저주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것이 베버가 주목했던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였다.
베버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직업을 일종의 소명, 즉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의무로 간주한다. 이런 생각은 직업을 뜻하는 ‘vocation‘이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에는 ‘직업‘이라는 의미와 함께 ‘소명‘, 즉 ‘신의 부르심‘이란 의미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도들에게 있어 직업은 천직, 하늘로부터 유래한 임무라는 발상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천직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양분되었다. 그렇지만 두 계급 사이에는 갈등의 요소가 있을 수 없다. 자본가나 노동자는 모두 자신의 역할을 하나의 소명으로서, 다시 말해 ‘금욕적‘으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두 계급이 ‘소비‘ 부분을 억제하고 ‘생산‘ 부분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소비‘란 곧 현세의 육체적 쾌락을 도모하는 것으로, 금욕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을 통해 발생한 이윤을 소비로 탕진하지 않는다면, 자본가는 이윤을 다시 생산 부분에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생산성을 계속 높이게 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발달과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의 은밀한 관계에 대한 베버의 진단이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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