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소통에는 시선과 음성이 매우 부족하다. 연결과 네트워크는 시선과 음성 없이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연결과 네트워크는 음성과 시선을 필요로 하는 관계나 만남과 다르다. 실로 관계와 만남은 음성과 시선의 특별한 경험들이다. 그것들은 몸의 경험들이다. 디지털 메체는 탈육체화하는 작용을 한다. 디지털 매체는 음성으로부터 거칢을, 육체성을, 나아가 공동과 근육, 점막, 연골의 심층을 빼앗는다. 음성은 매끄러워진다. 음성은 의미를 위해 투명해지고, 완전히 기의로 변한다. 이 매끄럽고, 육체가 없고, 투명한 음성은 유혹하지 않고, 아무런 육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유혹을 낳는 것은 기의로 환원될 수 없는 기표의 과잉이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아무 정보도 전달해주지 않는 그 음성은 "기표들의 육욕"을 가능하게 한다. 유혹은 기표가 기의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유통되는 공간에서 일어난다. 명료한 기의는 유혹하지 않는다. 의미 위에 펼쳐지는 피부가 육욕의 장소다. 또한 단순히 가려지고 은폐된, 덮개를 벗겨 모습을 폭로해야 할 기의가 아니라, 기의로는 풀어낼 수 없는 기표의 잉여가 비밀이다. 이 기표는 폭로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덮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P90
아도르노는 "세상에 대한 낯섦"을 예술의 한 계기로 본다. 세상을 낯선 것으로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전혀 지각하지 않는다. 음전압, 즉 부정적 긴장은 예술에 본질적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편안함의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낯섦은 철학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신 자체에 내재한다. 따라서 정신은 본질적으로 비판이다. - P93
‘좋아요‘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 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주관적 정신과 다른 것을 확정적인 네트워크로 빈틈없이 뒤덮을수록, 인간은 저 타자에 대한 경이의 습관을 버리게 되고, 익숙함의 증가와 함께 낯선 것을 잃어버린다. 예술은 미약하게, 금방 지쳐버리는 몸짓처럼, 이를 보상하려고 애쓴다. 선험적으로 예술은 인간을 경이로 이끈다. [……]." 오늘날 세상은 주관적 정신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 디지털 네트워크로 뒤덮인다. 그 결과 낯선 것, 다른 것의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 익숙한 시각 공간이 생겨났다. 이 디지털 반향공간에서 주관적 정신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만날 뿐이다. 말하자면 주관적 정신은 자신의 망막으로 세계를 뒤덮은 것이다. - P93
예술은 수수께끼의 특징을 갖고 있다. "예술은 수수께끼의 성질을 통해 행동 객체의 의심할 여지 없는 현존에 가장 단호하게 대립한다. 결국 예술의 고유한 수수께끼는 이 수수께끼의 성질 속에서 지속된다." 행동 객체는 경이의 능력을 상실한 행동 주체의 생산물이다. "폭력 없는 관찰"과 "거리의 가까움," 나아가 멂의 가까움만이 사물들을 행동 주체의 강제로부터 해방시킨다. 아름다움은 오래 지속되는 관조적 시선에만 자신을 드러낸다. 행동 주체가 뒤로 물러날 때, 객체를 향한 주체의 맹목적인 충동이 꺾일 때, 그럴 때만 사물들은 그 다름을, 그 수수께끼의 성질을, 그 낯섦과 비밀을 돌려받는다. - P94
예술은 자기초월을 전제한다. 예술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자신을 망각한다. 예술은 "나에 대한 멂"을 만들어낸다. 자신을 망각한 채 예술은 섬뜩한 것, 낯선 것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나의 의문에 불과하지만, 문학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망각한 자아와 함께 저 섬뜩한 것, 낯선 것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지상에서 시적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안락한 디지털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이름이 없거나 자신을 망각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에고가 거주하는 디지털 네트워크는 모든 낯선 것, 모든 섬뜩한 것을 잃어버렸다. 디지털 질서는 시적이지 않다. 우리는 같은 것의 수적인 디지털 공간 속을 돌아다닌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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