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세계는 거의 대부분 인간 자신이 제작한 사물과 질서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하이데거의 세계는 인간의 개입 이전부터 언제나 존재해온, 이미 주어져 있는 그런 세계이다. 이처럼 이미 늘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하이데거적 세계의 소여성을 이룬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는 하나의 산물이며, 영원한 반복의 세계이다. 근대의 기술로 인해 인간이 점점 더 땅에서, 대지에서 멀어져가고 동시에 땅의 강제에서 해방되어가는 상황에서, 하이데거는 오히려 "토착성"을 고집한다. 인류가 결국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탈소여화와 세계의 제작 덕택이겠지만, 하이데거는 어떤 탈소여화도, 어떤 형태의 세계 제작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이데거는 조종할 수 있고 제작할 수 있는 과저으로 탈소여화된 세계에 맞서 "만들 수 없는 것" 또는 "비밀"에 강하게 호소한다. - P119

사물은 제작과정에 종속되는 생산품이 아니다. 사물은 인간에 대해 일정한 자율성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일정한 권위를 획득한다. 사물은 인간이 수용하고 따라야 할 세계의 중심이 된다. 제약 작용을 하는(사물적으로 만드는) 사물 앞에서 인간은 제약받지 않는 자(사물적으로 되지 않은 자)를 자처하며 반항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신은 "만들어낼 수 없는 것." 개입하는 인간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를 상정한다. 신이야말로 제약받지 않는 자der Un-Bedingte이다. 세계는 탈소여화되고 전면적인 제작의 대상이 됨에 따라 완전히 신이 없는 상태가 된다. "궁핍한 시간"은 신이 없는 시간이다. 인간은 마땅히 "사물적으로 제약된 존재" "유한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한다. 죽음을 폐기하려는 모든 시도는 신성모독이며 인간적 간게일 뿐이다. 죽음의 폐기는 결국 신의 폐기로 이어질 것이다. 하이데거는 고통받는 인간, 고통의 철학자로 남았다. 고통받는 인간만이 "영원한 것"의 향기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하이데거라면 죽음의 폐기가 안트로포스(인류)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불멸의 존재가 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새로이 발명해야 할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 P121

하이데거는 다른 시간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길고 느린 것의 시간, 머무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간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노동은 결국 지배와 동화를 지향하게 된다. 노동은 사물과의 거리를 제거한다. 반면 사색적 시선은 사물을 지켜준다. 그러한 시선은 사물이 고유한 공간과 고유한 빛깔 속에 머물도록 놓아둔다. 그것은 친절의 실천이다.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일상적 진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포기는 취하는 것이 아니다. 포기는 주는 것이다. 포기는 무한정한 단순함의 힘을 준다." 사색적 시선은 거리의 제거와 사물의 동화를 포기한다는 점에서 금욕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도르노와 하이데거는 가깝다. "오랜 사색적 시선이란 [......] 속에서 언제나 대상에 대한 충동이 굴절되고 반사되는 그런 시선을 말한다. 비폭력적인 관찰은 모든 진리의 행복을 낳는 원천이며, 이는 관찰하는 자가 대상을 자기에게 동화시키지 않는다는 사실과 긴밀하게 관련된다. 오랜, 사색적 시선은 사물을 바라볼 때 사물과의 거리를 지키면서도 그것에 대한 가까움 또한 잃지 않는다. 그러한 시선의 공간적인 정식은 "거리에의 가까움"이다. - P126

카미유는 오히려 과거의 시대를 돌아보며 그리워한다. "사람들이 건전한 이성이라고 이름 붙인 일반적인 통념은 참을 수 없이 따문해. 가장 행복한 인간은 자기가 신이고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성령이라고 멋대로 상상할 수 있었던 사내였어." - P129

사건이 없는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깊은 권태가 찾아노는 것은 아니다. 다름 아닌 역사와 혁명의 시대,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지속성의 반복의 상태에서 이탈한 이 시대야말로 권태에 취약한 것이다. 아주 약간의 반복조차 이제는 단조로운 거승로 느껴진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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