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것의 정의"는 헤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것은 결론이다." 여기서 결론Schluss은 형식논리적 범주가 아니다. 헤겔이라면 아마도 삶 자체가 하나의 결론이라고 말할 것이다. 결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제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성급한 결론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 타자에 대한 폭력적 배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 결론은 타자 속에 한동안 머문 뒤에야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찾아온다. 변증법 자체가 끝맺고 열고 다시 끝맺는 운동이다. 결론을 맺을 능력이 없다면 정신은 타자의 부정성에 상처 입고 피를 흘리며 죽어버릴 것이다. 모든 결론, 모든 끝맺음이 폭력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맺고 우정을 맺는다. 우정은 하나의 결론이다. 사랑은 절대적 결론이다. 사랑은 죽음, 즉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헤겔의 노예는 의식이 제한되어 있다. 그의 의식은 절대적 결론을 맺을 능력이 없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죽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절대적 결론으로서의 사랑은 죽음 속을 통과한다. 사랑하는 자는 타자 속에서 죽지만 이 죽음에 뒤이어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흔히 타자를 폭력적으로 붙들어 자기 소유로 삼는 것을 헤겔 사유의 중심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다.
우울한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어떤 결론도 맺지 못한다. 하지만 결론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흘러가고 떠내려가버릴 것이다. 우울증의 주체가 안정된 자아상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유부단함, 결단력의 결핍이 우을증의 전형적 증상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울증은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의 와중에서 끝맺음을 하고 완결지을 수 있는 능력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의 특징적 현상이다. 사람들은 삶을 완결지을 줄 모르기 때문에 죽는 법도 잊어버렸다. 성과주체 역시 결론을 맺지 못하고, 완결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그는 더 많은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바스러진다. - P57

마르실리오 피치노에게도 사랑이란 타자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버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 피치노는 사랑하는 자가 다른 자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하지만 이러한 소멸과 망각 속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되찾고" 심지어 "소유"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유는 곧 타자의 선물일 것이다. 타자가 우선한다는 점에서 에로스의 힘은 아레스의 폭력과 구별된다. 권력 관계, 혹은 지배 관계 속에서 나는 타자에 맞서 나 자신을 주장하고 관철하기 위해 타자를 내게 굴복시키려 한다. 반면 에로스의 힘Macht은 무력함Ohn-macht을 함축한다. 무력해진 나는 스스로를 내세우고 관철하는 대신, 타자 속에서 혹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타자는 그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지배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타자를 장악하지만,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자신에게서 걸어나와 상대방에게로 건너간다. 그들은 각자 자기 안에서 사멸하지만 타자 속에서 다시 소생한다." - P59

죽음의 부정성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이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때 죽음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에로스적 삶의 충동은 나르시시즘적이고 상상적인 자아의 정체성을 흘러넘치고, 그것의 경계를 해체한다. 에로스적 삶의 충동은 그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죽음의 충동으로 표출된다. 벌거벗은 삶의 끝이 죽음의 전부는 아니다. ‘나‘의 상상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도, ‘나‘에게 사회적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징적 질서를 폐기하는 것도 죽음이며, 그러한 죽음은 어쩌면 벌거벗은 삶의 끝보다 더 심각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갈망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죽음의 근본적인 매혹이 작용한다. 에로티즘의 핵심은 언제나 구성된 형태들의 해체다. 다시 말하면, 뚜렷하게 구분된 개별자들의 불연속적 질서를 구성하는 사회적, 규칙적 형태들의 해체." - P60

모두가 자기 자신의 경영자인 사회에서는 생존의 경제가 지배한다. 그것은 에로스, 혹은 죽음의 비경제와 정반대된다. 자아의 충동과 성과의 충동이 전혀 억제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사회 질서 속에서 에로스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죽음의 부정성을 밀어내버린 긍정사회는 오직 "불연속성 속에서 생존을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만이 지배하는 벌거벗은 삶의 사회다. 그러한 삶이란 노예의 삶일 뿐이다. 벌거벗은 삶에 대한 염려, 생존에 대한 염려는 삶에서 모든 생동성을 빼앗아간다. 생동성은 대단히 복합적인 현상이다.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생동성이 없다. 부정적인 것은 생동성의 본질적 계기를 이룬다. "그러니까 오직 모순을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 모순을 자기 안에 품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지닌 것만이 살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생동성은 벌거벗은 삶의 활력 또는 건강한 체력과 구별된다. 벌거벗은 삶의 활력에는 어떤 부정성도 없다. 생존하는 자는 살아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는 산송장과 비슷한 존재다. - P61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영혼을 조종한다.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epithymia, 용기thymos, 이성logos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충동이 영혼의 쾌락 경험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따라 용기를 동력으로 하는 행동은 드물어진다. 용기와 관련된 것으로는 이를테면 기존의 질서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촉발하는 분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분노는 사라지고 짜증과 불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짜증과 불평에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다. 또한 에로스 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으로 전락한다. 계산으로서의 이성은 사건,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다. 우리는 에로스를 결코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한다. 에로스의 자극에 의해 용기는 아름다운 업적을 이룰 수 있다. 아마도 에로스와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용기일 것이다. 하지만 용기도, 에로스도 사라져버린 오늘날의 정치는 단순한 사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락한다. 신자유주의는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초래한다.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각자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도의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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