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를 통해 우리는 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생각하려고 하고, 그럴 때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행복에 젖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슬픔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생각하기보다, 그 사람을 자신의 곁에서 없애줄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기쁨의 만남이 아니라 슬픔의 만남을 영위하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공적 생활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우울하고 슬픈 감정 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가족을 위해 그들은 그런 우울한 상태를 불가피하게 감내하고 있다. - P161

다행스럽게도 가족이나 연애와 같은 사적인 관계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나마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이마저도 불가능하다면 과연 기쁨과 행복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더 큰 완전성, 기쁨, 그리고 쾌활함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업무가 끝난 뒤 오락거리를 찾아서 밤거리를 헤매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에게 오락 산업은 슬픔과 불행에 붙이는 일회용 반창고인 셈이다. 호프집에서, 카페에서, 영화관에서, 음악회에서 슬픔과 우울함으로 만들어진 종기를 핥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은 제대로 된 처방전일까? 인스턴트로 제공된 기쁨, 값싸게 구입한 쾌활함이 삶에 진정한 행복을 부여할 리 만무하다. - P162

삶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삶의 현장에서 기쁨과 유쾌함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역설했던 ‘기쁨의 윤리학‘이다. 분명 잃어버린 행복과 기쁨을 되찾는 일은 손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초인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 P162

"만일 행복이 눈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 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에티카』 - P162

선물을 받고 나면 항상 그 선물의 액면가와 유사한 대응 선물을 고르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관례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고받는 대부분의 선물이 명목상으로만 선물일 뿐, 그 이면에는 뇌물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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