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말하는 적에 대한 사랑도 [교환]경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돌려주기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일방적으로 주라는 요구는 성스러운 경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신이 보상해주기를 기대하기 떄문입니다. "잘 돌려주는 사람들에게만 무엇인가를 빌려주면서 그대들은 왜 보상을 기대합니까? 빌려주면서 돌려주기를 요구하는 것은 신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대들은 적도 사랑해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리고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빌려주십시오! 그러면 그대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습니다. [...] 선사하십시오. 그렇다면 신이 그대들에게 선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은 그대들이 다 들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많이 선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넉넉한 기준을 사용하십시오. 신은 그대들에게 동일한 기준을 사용할 것입니다."(「누가복음」6장 32-38절) 그와 반대로 선불교에는 더 높은 차원의 경제를 재건할 신과 같은 판관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혀 경제[가계]적으로 계산하지 않은 채 주고 나누어 줍니다[용서해줍니다]. 가계를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 P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