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습니다‘라는 말이 일상에서 사용되면 항상 인간의 측면에서 소유의 대상이 되는 존재자와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시내에 송어가 있습니다‘라는 말은 송어의 단순한 ‘존재‘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런 강조에 앞서 그리고 그런 강조와 함께 시내의 특징이 말로 표현됩니다. 시내는 송어의 시내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시내는 낚시를 위한 특별한 시내가 됩니다. 그러니까 ‘있습니다‘를 직접적으로 사용할 때는 이미 인간과 맺는 관계가 고려됩니다. 이런 관계는 일반적으로 처분 가능한 것과의 관계이고, 인간의 측면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과의 관계입니다." - P108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는 정착한 사람을 위한 책으로, 즉 집의 관리와 유지에 관한 책으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화편은 경제[가계]적 실존을 묘사합니다. 거기서 플라톤이 시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동시에 방랑과 변신에 대한 비판입니다. "성스럽고" "우아하고" "친절한" 시인은 "지혜롭기 떄문에 자기를 다양한 형태로 보여줄 수 있고, 만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그런 시인이 국가로 들어오는 것을 막습니다. 플라톤은 시인이 국가 외부에서 방랑하게 합니다. 많은 선사의 커다란 웃음도 플라톤에게 몹시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시인이 웃음을 묘사하는 것을 급지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웃음은 "격렬한 변화"를 야기합니다. 그렇게 변화하면서 사람들은 자기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 P128
"큰 죽음"은 모르스 뮈싀카와 비슷한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습니다. 죽을 때 영혼의 "모든 욕구"가 사라진다고 에크하르트는 가르치긴 합니다. 그러나 더 높은 영역에서 영혼의 욕구는 반복됩니다. "신 안에서 죽는" 것은 무한에 대한 욕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신적인 죽음"을 맞는 영혼은 신과 완전히 결합합니다. 신 앞에서는 "아무것도 죽지 않습니다." 고결한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 에크하르트가 드는 예는 존재의 특징인 욕망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애벌레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벽을 따라 기어오릅니다. 그렇게 고귀한 것이 존재입니다." 신 안에서 죽을 때는 아무것도 사라져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의 [교환]경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신 안에서 죽는 것과 함께 갑니다. "자연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 대가로) 더 좋은 것을 주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 자연이 (이미) 이런 일을 행하면, 신은 더 많이 행합니다. 신은 결코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 대가로) 더 좋은 것을 줄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신이 우리를 [현재의] 삶보다 더 좋은 존재 속으로 옮기도록 신 안에서 죽는 것을 우리는 찬미합니다. [...]" 더 나아가 신 안에서 죽는 것은 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도취에 빠지게 합니다. 신비로운 죽음은 내면성 자체를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면성은 "신성"의 무한한 내면성 속으로 거두어지거나, 그 속에서 빛나게 됩니다. 신성은 "자기 자신 속에서 떠다니고", "자기 자신 말고는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살지 않습니다". - P152
도오와 점원[당나라 선승, 도오의 제자]은 위로의 말을 전하기 위해 집[상가]으로 갔습니다. 점원은 관을 두드리며 "그가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도오는 "나는 그가 살아 있다고도 말하지 않고, 그가 죽었다고도 말하지 않겠네"라고 답했습니다. 점원은 "왜 스승님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도오는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네,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네"라고 답했습니다. 그들은 돌아가기로 했고 절을 향한 길에 올랐습니다. 점원은 "존경하는 스승님, 그것을 저에게 빨리 말해주십시오! 스승님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 저는 존경하는 스승님을 결국 때려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도오는 "때리고 싶으면 떄리게!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겠네"라고 답했습니다. 그리하여 점원은 도오를 한 대 때렸습니다. 그 뒤에 도오가 변신한 [*즉 죽은] 후에 점원은 석상[당나라 선승, 도오의 제자]에게 와서 지금 이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석상은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네,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점원은 단번에 꺠달았습니다. - P154
태고의 친절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자기를 알리기 위한 교제용 친절과 다릅니다. 교제에서 ‘친절한‘ 말은 다른 사람이 방해받지 않은 채 자기를 비추는[조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말입니다. 교제용 친절의 중심에는 자기가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태고의 친절은 자기가 없는 상태에 근거합니다. 태고의 친절은 사람들이 자기 내부를 지키거나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친절과도 다릅니다. 이런 보호용 친절과 정반대로 태고의 친절은 무한한 개방성으로부터 솟아납니다. 태고의 친절은 니체가 말하는 귀족적 친절과 전혀 다른 근원을 가집니다. 그의 책 『아침노을』에 들어 있는 다음과 같은 잠언은 생각해볼 만합니다. "다른 종류의 이웃 사랑, 흥분 잘하고, 시끄럽고,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사람은 큰 정열[을 가진 사람]과 반대됩니다. 큰 정열은 어두운 화염과 마찬가지로 내부에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모든 뜨거운 열기를 모읍니다. 그런 정열을 가진 사람은 겉으로는 냉정하면서 무관심하게 보이고, 무감각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 사람은 때떄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이웃 사랑은 사교적이면서 아양을 떠는 사람의 이웃 사랑과는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큰 정열을 가진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때의 친절은 온화하고, 관찰하고[사려 깊고], 태연합니다. 그 사람은 마치 자기 성의 창문으로부터 내다보는 것 같습니다. 그 성은 그의 요새이고, 바로 그 때문에 그의 감옥입니다. 낯설고 자유로운 것, 즉 다른 것을 바라볼 때 그는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이런 귀족적 친절을 위해서는 넘칠 듯 가득한 내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내부는 "요새"를 통해서 외부로부터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귀족적 친절은 "창문"의 친절입니다. 창문 뒤에는 내면성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 내면성은 창문이 달린 단자의 친절입니다. 이런 친절은 다른 곳에서 산책하는 온화한 관찰자의 시선의 고귀함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성" 혹은 "요새"에는 태고의 개방성이 없습니다. 성과 요새의 태연함은 자기만족과 같습니다. "통과 불가능성[무감각성]"과 대조를 이루는 것은 내부와 외부 간의 모든 차이가 제거된 태고의 친절입니다. 태고의 친절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기 위한 "창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집에도 성에도 거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면과 내부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떄떄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가길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바깥에 거주하거나 혹은 어디에도 거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태고의 친절은 충만한 내면성 혹은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비어 있음으로부터 솟아납니다. 그런 친절은 정처 없이 떠다니는 구름과 마찬가지로 정열을 가지지 않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 친절에는 내부의 "화염[격정]"이 전혀 없습니다. 더 나아가 태고의 친절은 귀족적 ‘고귀함‘을 가리키는 장티예스[신사다운 친절]과도 다릅니다. 태고의 친절은 ‘귀족적‘이거나 ‘고귀하기‘보다는 오히려 평범합니다. 태고의 친절은 ‘선한[좋은]‘ 것보다 더 오래되었고, 모든 도덕법칙보다 더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친절은 근거[근본]가 되는 윤리적 힘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법과 규범을 넘어서 자유롭게 놀이를 하는 삶은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놀이를 하는 삶으로부터 비로소 모든 도덕법칙과 모든 종교 규범이 솟아났을 것입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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