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헤라클레이토스
서구 철학은 약 3천 년 전에 이오니아 제도에서 탄생한 이후로 줄곧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자세로 분열되어 온 듯하다.
그 중 하나는 우주의 참다운 최종적인 실재는 전혀 변화하는 일이 없고 본질적으로 불변하는 형상 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서 또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닌 운동과 진화 속에 우주의 유일한 실재가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에서 화이트해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자명한 일이지만 이 모든 형이상학적 인식론은 항상 그것을 엮어낸 사상가 자신의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관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이데올로기적 구축물은 선험적인 것으로 제시되어 오기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미리 품고 있던 윤리와 정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후천적 구조물이었던 것이다.
과학에서 유일한 선험적인 것은 객관성의 공준이다. 과학은 이 공준에 의해서 이러한 논쟁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혹은 오히려 그것이 금지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진화를 연구한다. 그것은 우주 자체의 진화일 경우도 있으며 또 인간도 포함한 생물권과 같은 우주 속의 여러 가지 시스템의 진화일 경우도 있다. 일체의 현상, 일체의 사건, 일체의 인식은 어떤 상호작용을 의미하고 있으며, 그 상호작용 자체가 시스템의 구성요소에 어떤 변화를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과, 우주의 구조 속에는 변화하지 않는 실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관념과는 양립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모든 현상을 분석할 경우에 과학의 근본적인 전략은 먼저 불변하는 것을 찾는 일이다. 모든 물리적 법칙은ㅡ모든 수학적 전개도 마찬가지지만ㅡ불변적 관계를 명확히 서술한 것이다.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명제는 보편적인 공존이라는 공준이다. 어떠한 예를 택하든간에 거기에 보존되어 있는 어떤 불변하는 것으로 표시하지 않고는 어떤 현상을 분석하기란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가장 명백한 예는 동력학 법칙의 수식화일 것이다. 그것은 즉 불변적인 것들의 말로 변화를 정의하고 있는 미분 방정식을 발명할 것을 필요로 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의문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즉 과학적 논술을 엮어 나가는 데 있어 기본요소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불변성, 보존, 대칭성 등은 모두 실재에 대한 오퍼레이셔널한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서 실체와 바꿔놓은 허구가 아니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오퍼레이셔널한 이미지에 의하면 실체 그 자체는 부분적으로 상실되어 버리지만 완전히 추상적인 또는 단순한 ‘약속‘인 동일성의 원리에 입각한 논리는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약속 없이는 해나갈 수 없는 듯하다.
내가 여기에서 이러한 고전적 문제에 언급하는 것은 그 입장이 양자 혁명에 의해서 심각한 변화를 받은 점을 주의하기 위해서다. 동일성의 원리는 고전적 과학에서 물리학의 공준으로는 꼽히지 않고 있다. 이 원리는 고전적 과학에서는 단지 논리적 조작으로 사용되고 있음에 불과하며, 그것이 어떤 실질적인 실재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현대 물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공준의 하나는, 동일한 양자적 상태에 있는 두 개의 원자는 절대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자론에 있어서도 원자와 분자의 대칭성은, 그것이 완전한가의 여부보다도 오히려 절대적인 표현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이미 동일성의 원리를 단순한 정신 지도상의 규칙이라는 입장에 국한시킬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원리가 적어도 양자의 레벨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실재를 표현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31

화학적인 불변성
그러나 형의 다양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생물권 속에서는 상이한 수많은 거시적인 조직의 원형이 공존해 온 것은 명백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남조류와 적충류(원생동물 섬모충강. 짚신벌레 등)와 문어와 인간 사이에 어떠한 공통점이 있을까? 세포의 발견과 세포 이론의 도움으로 이 다양성 뒤에 새로운 통일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생물계 전체의 매우 엄격한 단일성이 미시적 레벨에서 완전히 밝혀지기까지는, 20세기 제 24반기의 생화학의 발달을 기다려야만 했다. 오늘날에는 잘 알려져 있는 일이지만 박테리아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그 화학적 기구는 구조에서나 기능에서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1. 구조. 모든 생물은 예외없이 어느 것이나 같은 두 종류의 주요 고분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단백질과 핵산이다. 또한 모든 생물에 있어서 이 고분자는 동일하고 유한한 종류의 잔기의 집합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단백질은 20종류의 아미노산에서, 핵산은 4종류의 누클레오티드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2. 기능. 모든 생물에 있어 기본적인 화학 조작 ㅡ 즉 화학 포텐셜의 운용과 저장 또는 세포 구성 성분의 생합성 ㅡ은 모두 동일한 반응으로ㅡ오히려 일련의 화학 반응계라고 하는 편이 좋겠지만ㅡ수행되고 있다.
확실히 대사반응의 중심 주제 위에, 다양한 기능적 적합에 대응한 많은 변주가 각각 연주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주는 거의 언제나 원래는 다른 기능에 사용되고 있던 일반적인 대사경로가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질소의 배설 방식이 새의 경우와 포유류의 경우는 다르다. 전자는 요산으로서 후자는 요소로서 배설한다. 그러나 새의 경우, 요산의 합성경로는 모든 생물의 체내에 있는 푸린 누클레오티드(핵산의 보편적 구성요소)를 합성하는 일련의 반응이 약간 수정된 것일 뿐이다. 포유류의 요소의 합성반응도 이와 마찬가지로 보편적 대사 경로ㅡ모든 단백질에 포함되어 있는 아미노산, 즉 알긴의 합성에 참여하는 반응 경로ㅡ가 약간 변한 것뿐이다. 이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다.
세포의 화학이 생물권 전체에 걸쳐 사실상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 세대의 생물학자들이 밝힌 사실이다. 일찍이 1950년에는 그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발표가 있을 때마다 점차 확인되어 갔다. 가장 신념이 굳은 ‘플라톤파‘의 희망이 충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세포 화학의 보편적인 ‘모습‘이 이처럼 서서히 나타남에 따라서, 그만큼 한편으로는 증식 떄의 불변성이라는 문제가 역설적인 곤란성을 띠게 되었다. 모든 생물의 구성요소와 그 합성경로가 화학적으로 동일하다고 하면 생물이 보여주는 형태학적, 생리학적 다양성의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각 생물종이 다른 모든 종과 같은 재료와 같은 화학반응을 영위하면서 다른 모든 종과 구별되는, 그 종에 특징적인 구조적 규준을 각 세대를 통하여 불변한 채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오늘날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가지고 있다. 핵산의 경우에는 누클레오티드, 단백질의 경우에는 아미노산이라는 두 가지의 보편적 구성요소가 있다. 그것들은 논리적으로 말하면 단백질의 구조, 즉 그 입체특이적인 결합 능력을 나타내는 알파벳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생물권이 포함하고 있는 구조와 작용의 다양성 전부를 이 알파벳으로 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때 DNA 속의 누클레오티드의 배열이라는 형태로 쓰여진 텍스트가 각각 세포 증식 때에 불변인 채로 복제됨으로써 종의 불변성이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 P135

결국 단백질의 구조와 작용이 변경되거나 이러한 변경이 비록 부분적이나마 자손에게 전달되는 기구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다만 DNA의 어떤 부분의 누클레오티드의 배열에 표시되는 지령에 변화가 생긴 결과로써 단백질에 어떤 변경이 일어날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어떤 지령이나 정보를 거꾸로 DNA로 옮길 수 있는 기구는 머릿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지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생물이라는 시스템은 전면적으로 극도로 보수적이고 또 자기 폐쇄적이며 또한 외계로부터 어떠한 지시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그 특성으로 보거나 그 미시적인 시계 장치와 같은 작용ㅡ그것은 DNA와 단백질 사이에도 그리고 생물과 환경 사이에도 일방 통행적인 관계를 수립하고 있다ㅡ으로 보아도 모든 ‘변증법적‘ 기술에 저항하고 그에 도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데카르트적인 것이지 헤겔적인 것은 아니다. 세포는 바로 그러한 것이다. - P144

그러나 물리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에 의하면(도달될 수 없는 한계온도인 절대온도 이외에서는) 어떠한 미시적 존재도 양자적인 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이 거시적인 계 속에서 축적되면, 서서히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구조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생물은 정확한 번역을 보증하고 있는 완벽한 보존기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다세포 생물의 노화와 죽음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번역의 우발적인 과오의 축적이라는 것으로 설명이 된다. 이 과오, 특히 번역을 정확히 행하는 일에 관계되고 있는 구성요소에 영향을 주는 과오는 과오를 일으키는 빈도를 더욱 높이고 생물의 구조를 가차없이 조금씩 붕괴시켜 가는 결과가 된다. - P145

현대 생물학 연구 중에서 방법론적 면에서나 그 중요성의 면에서나 특히 두드러진 작업은 소위 분자유전학이라 불리는 분야에서 생기고 있다(벤저, 야놉스키, 브렌너, 크릭).
이 분자유전학에 의해서 DNA 이중쇄 중의 폴리누클레오티드의 배열이 입는 여러 타입의 우발적인 변화를 분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돌연변이가 다음과 같은 원인에서 일어남을 알게 되었다.
1. 하나의 누클레오티드의 대(對, 페어)가 다른 대로 바뀐다.
2. 한 개 또는 몇 개의 누클레오티드 대가 결손되거나 부가된다.
3. 길이가 각기 다른 DNA가 도치되거나 되풀이되거나 전치되거나 융합되어 유전암호의 텍스트가 여러 모양으로 ‘뒤섞인다‘.
이 변화는 우발적인 것이며 무방향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가 유전의 텍스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이며, 이 텍스트가 생물의 유전적 구조의 유일한 저장물이므로, 그 결과 필연적으로 생물권에 있어서의 모든 신기한 것과 모든 창조의 원천은 다만 단순한 우연에만 있다고 할 수 있다.
진화라는 기적적인 구축물의 밑바닥에는 순수하고 단순한 우연, 즉 절대적으로 자유롭지만 본질은 맹목적인 우연이 있을 뿐이다. 현대 생물학의 이 중심 개념이 오늘날에는 이미 많은 가능성이 있는, 또는 단순히 생각할 수 있는 가설 중의 하나라고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관찰되고 실험된 제사실과 양립할 수 있는 또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가설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우리의 개념이 장래에 수정될지도 모른다거나 수정될 게 틀림없다고 상상하게 하는(또는 희망하게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또 이 개념은 모든 과학 분야의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인간 중심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며, 합목적성을 굳게 믿어온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본능적으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기설적, 물활설적 이데올로기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어떻게 해서든 추방해야 할 개념이며, 유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의 원인으로서의 돌연변이에 대해서 논할 경우에 우연이라는 말을 정확한 의미에서는 어떻게 사용할 수가 있으며,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가를 밝혀둘 필요가 있다. 우연이라는 개념의 내용은 단순하지 않으며 매우 잡다한 상황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해서 몇 가지의 예를 드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 P1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