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케이스 스터디 3 재다신약: 욕망의 레이스

돈과 ‘운명’, 그 생극의 드라마

2011년, SBS에서 <마이더스>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제목에서 보듯 부(돈)를 둘러싼 불꽃튀는 승부가 주 내용이었는데, 엄청난 돈을 주무르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심리와 논리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서 나름 열심히 챙겨 보았다. 예상대로 속고 속이고 뒤통수 치고...... 참으로 저속한 이합집산을 거듭했는데, 그렇게 지지고 볶다가 마침내 한쪽이 승리하면 자축파티를 하는데, 그 파티의 형식이 아주 흥미로웠다.

먼저, 고급 룸살롱에서 폭탄주를 진탕만탕 마신다.

다음 머리에 넥타이를 두르고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른다.

드라마에선 생략되었지만 그다음 수순은 안 봐도 알 것 같다.

아마 화려한 성접대가 이어질 것이다.

폭탄주-노래방-성적 쾌락. 이것이 그 피 말리는 ‘쩐의 전쟁‘을 치른 이후에 받는 거의 유일한 휴식이자 보상이었다. 거의 유일하다고 단정하는 이유는 평소에는 늘상 전시 체제라 잠시도 쉴 틈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불을 다루는 사람들의 삶은 1.긴장과 스릴의 일상화 2.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술-노래-섹스‘의 삼종세트로 이루어진 셈이다.

동의보감식으로 말하면 이 모든 과정은 전부 화(불)기운을 끌어올리는 것들이다.

화기가 항진되면 가장 먼저 신장에 저장되어 있는 ‘정‘(진액)을 말려버린다.

‘수승화강‘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물은 올라가고 불은 내려가야 몸의 신진대사가 활발해진다는 의미다.

한의학과 양생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면 반대로 화기가 올라가고 수기가 쫄아들면? 신진대사에 치명적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이런 상태를 장기간 지속하면 각종 질병에 노출되는 건 물론 정력과 수명이 줄어든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시대 남성들의 정자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평균 수명은 늘었다지만 암과 치매, 당뇨와 뇌졸중 등 각종 불치병들은 점점 더 세를 넓혀 가고 있다. 결국 우리 시대는 돈과 생명의 정기를 맞거래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참 궁금했다.

부자들은 저런 삶의 패턴을 진짜로 행복하다고 여길까?

또 과연 저 정도 삶을 위해서 저렇게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 걸까?

아, 물론 고급주택에 고급 승용차, 해외여행에 명품쇼핑 등등의 물질적 풍요가 수반되긴 할 것이다.

글쎄? 과연 그게 더 좋은 보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쾌락지수야 다소 높아질 수 있다.

하지만 쾌락은 종류와 대상이 뭐든 ‘화기‘를 소진할 뿐 존재의 충만감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오히려 쾌락 지수가 높아질수록 정신적 공허함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부자들일수록 각종 신경증에 더 많이 노출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만약 부가 행복과 자유의 원천이라면 부자들은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더 지혜로워야 한다. 형제 간의 우애와 효성이 지극해야 하고, 나눔과 배려의 정신도 충만해야 한다.

어이가 없다고? 그런 부자가 어디 있느냐고?

그런 사람이 어떻게 부자가 되느냐고? 그렇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지혜와 우애, 효성과 배려 같은 덕성을 가진 부자는 실로 드물다는 걸.

그런 덕성을 가진 사람은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걸. 그 말은 부자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왠고 하니, 이 우주에는 지혜도 없고 나눔의 기쁨도 모르면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단연코!

그렇다면 참 이상하다. 불을 통해 행복하기는커녕 생명의 정기를 빼앗길 뿐더러 정신적으로도 공허감만 커지는데 대체 왜 저토록 돈에 집착하는 것일까?

돈을 엄청 만지기는 하는데 삶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이건 대체 어떤 팔자 탓인가? 명리학적으로 보면, 재다신약이 바로 그것이다. 재다신약이란 재성은 많은데 그러다 보니 일간이 아주 신약해진 팔자를 의미한다.

재성이 많으면 재물이 콸콸콸 들어와서 참, 좋은 팔자일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인가? 일간이 약해서 재물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당하지 못하는 재물은 재앙이다.

그 제물은 삶을 잠식하고 존재를 붕괴시킨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돈은 그저 무성의 숫자가 아니다.

돈에는 무수한 인연들이 들러붙어 있다.

더구나 지금은 자본주의, 그 중에서 금융자본의 시대가 아닌가. 천문학적 단위의 돈들이 신기록처럼 떴다 사라졌다 하고 있다. 하여,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들 돈을 인생의 유일한 가치로 삼고 있다.

바야흐로 재성을 ‘존재의 축‘으로 삼는 시대인 것이다. 다시 복습하면, 존재의 축은 일간이다.

일간이 극하는 것이 재성이다.

식상이라는 상생의 운동을 거친 다음 재성이라는 유형의 자산이 구축된다고 했다. ㅡ식상생재.

하지만, 금융자본은 식상의 단계를 생략한 채 곧장 재성으로 건너뛴다. 증권이든 부동산이든 거액의 돈이 오가는 현장에는 노동과 생산이 없다.

실제로 현물 시장이 어떤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숫자 놀음을 할 뿐이다. 집을 수없이 팔고 샀지만 그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고 증권거래소에 매일같이 출근하지만 그 주식이 어떤 현장에서 산출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숫자놀음이기 때문에 정말로 노름과 비슷해진다.

한탕주의, 대박, 로또, 급등 등의 낱말들이 말해주듯,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액의 돈들이 똬리를 틀게 된다. 재성의 부피가 점점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일간은 점점 더 왜소해져 간다.

결국 존재의 축이 점점 무게 중심을 재성 쪽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본디 일간은 재성을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재성이 점점 비대해지면 역주행이 일어난다.

재성이 오히려 일간을 뒤흔드는 격이다. 예를 들어, 물은 불을 극한다. 하지만 불이 너무 거세면 물로는 절대 진압이 안 된다.

오히려 더 기세등등해진다 수극화에서 화모수로. 이와 비슷한 이치다. 이것이 재다신약이라는 팔자가 대세를 이루게 된 과정이다.

금융자본주의는 모두에게 이 리듬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체제다. 즉, 재다신약의 팔자가 아닌 사람들도 이런 팔자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재성이 극대화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럼 재성이 많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 과다는 고립과 다를 바 없다. 하나의 오행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당연히 팔자의 모든 힘이 그쪽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예컨대, 식상을 쓰지 못하니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 미국의 월가나 여의도 증권맨들이 햄버거,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돈이 많다고 식상에 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억대 연봉인데 의식주의 수준에선 노숙자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뭣하는가?

그걸 누릴 시간도, 체력도 없는데. 또 재성에 집중하니 관성이 꽉 막혔다.

관성은 단지 출세와 승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리더십과 인복도 거기에 해당한다. 관성의 기운을 터득하려면 가장 먼저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

사람들과 같이 일과 활동을 조직하고 구성하는 것을 즐겨야 한다.

그러면 돈은 저절로 이 관계와 활동 속으로 흘러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각양각색의 좌충우돌을 겪게 된다. 이걸 절대 피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맞서고 헤쳐 나가다 보면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이 펼쳐진다.

이것이 재성과 관성이 통하는 길이다. 이 길을 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재성은 일복이기도 하다.

출세는 하는데 인복은 점점 희박해지고 그러면 거의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린다.

결국 연봉은 올라가지만 몸과 마음은 한없이 피로해지는 운세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가장 먼저 몸이 무너진다.

재다신약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재물이 들어오면 건강을 잃는 것이다. 과로사 아니면 우울증 혹은 자살충동, 기타 등등. 들은 이야기지만, 한 벤처 사업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500억 대박을 치고 승승장구하다가 50도 안 된 나이에 교통사고로 즉사했다.

이런 것이 돈과 운명이 펼치는 한판 승부다. 이 생극의 드라마는 어떤 픽션보다도 극적이고 또 치명적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또 가족 관계가 파탄날 수 있는데,

특히 아버지와의 극심한 갈등 아니면 (남성의 경우) 성적 추문이 수반될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익혔듯이 재성은 육친상 아버지이자 여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흔히 보듯이 큰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집안이 쑥밭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재성은 성욕과 깊이 연동되어 있다. 특히 남성에게는 따라서 재성이 활성화되면 당연히 성욕도 항진된다.

그런 점에서 ‘쩐의 전쟁‘과 ‘술-노래-섹스‘ 삼종세트는 찰떡궁합인 셈이다.

또 관성이 막혔으니 인성으로 가는 길은 실로 험난하다. 더구나 재성은 인성을 극하는 관계 아닌가.

재성이 넘친다는 건 인성에겐 치명타다. 이것은 평생 재물을 일구었지만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우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배움이 없으면 상생이 없다.

지혜와 유머, 우애와 효성 등은 추상적인 가치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나를 살아 움직이게 해주는 상생의 기운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성이 지나치면 거기에 함몰되지만, 인성이 막히면 나를 충전할 백그라운드가 없게 된다.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디디듯‘ 위태롭기 그지없다.

부자들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그럼, 이런 팔자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명리학적으로는 아주 간단하다.

먼저 곧바로 재성으로 가지 말고 식상의 단계를 거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워밍업을 충분히 한 다음에 재성을 일구라는 것이다. 먹고 떠들고 끼를 발휘하고...... 이런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면서 돈을 벌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쉽사리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그 다음엔 앞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당연히 재성을 관성으로 터주어야 한다. 재물은 고이면 위험하다.

무수한 인연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그 속에 담긴 에너지장이 실로 엄청나다.

그것을 가두어 두면 언제 어떻게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사회적 관계 안으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

단순한 기부보다는 증여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삶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것이 관성의 핵심인 까닭이다.

관성이 충만해지면 인성의 문은 저절로 열리게 되어 있다.

타자를 만나고 새로운 활동이 구성되면 인성, 곧 배움의 열정은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법이다.

멜로의 화신

재다신약이 겪어야 할 ‘통과의례‘가 하나 더 있다. 재성은 육친상 아버지 혹은 (남성에겐) 부인이나 애인에 해당한다고 했다.

따라서 재성이 비대하다는 건 아버지와 아내의 자리가 몹시 크다는 뜻이다. 예전엔 가문 내에서 양자로 입양되는 일이 많았으니 생부와 양부를 동시에 모셔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 처첩제가 통용되던 시대이니 처첩이 여럿인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의 집안에 양자로 간다는 건 매우 드문 일일뿐더러 우리 시대는 일부일처제를 신앙처럼 떠받들고 있다. 그럼 대체 어떤 양상이 펼쳐질까?

먼저 남성의 경우. 재다신약인 사람은 직장엘 들어가도 차분히 돈을 벌기보다는 주식이나 펀드, 기타 돈과 관련된 일을 쉬지 않고 벌인다.

당연히 돈과 관련된 사건 사고가 그치질 않는다. 아울러 남성에게 돈과 애로스는 동반자다. 돈을 움직이는 기운과 에로스가 함께 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다신약의 운을 가진 남성은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남자는 다 그런 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의 어법이 단순해서 그저 "이뻐~"만 외쳐 대지만 실제로는 남자들마다 꿍꿍이가 다 다르다. 미모의 기준 자체도 각양각색일뿐더러 무게중심이 튼실한 남자는 절대 미모와 몸매를 짝짓기의 척도로 삼지 않는다.

사실 예쁜 여자를 밝히는 경우는 그 대상에 대한 연모라기보다 내부에 꿈틀거리는 ‘도화살‘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라고 할 수 있다(단지 바람기가 있다고 해서 추문에 휘말리는 건 아니다. 많은 여성 편력을 하면서도 절대 휘둘리지 않는 남성들도 간혹 있다. 예를 들면 조르바 같은 경우!

그건 재다신약이 아니다). 그래서 여자가 생기면 항상 스캔들에 연루되고 그러다 보면 재물이 줄줄 샐뿐더러 아버지와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 재다신약은 원초적으로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기가 어렵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재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 부자지간은 상극이 되기 마련이다. 아버지의 파산으로 곤경을 겪거나 아니면 아버지의 유산을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지거나. 멜로 드라마의 흔한 공식, 재벌 2세가 가난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면(혹은 혼외정사를 벌이게 되면) 아버지가 극심하게 반대하다가 뒷목을 잡고 쓰러진다.

요컨대, 남자의 팔자에서 ‘재물-여자-아버지‘는 하나의 계열이다.

당연히 관성에도 치명적이다. 만약 이런 남자가 공직에 있으면 반드시 스캔들로 인한 송사를 겪게 되어 있다. 제비족이 관운이 있기는 어렵고, 관성이 발달한 남자가 여자에게 친절하기는 불가능하다.

인기와 리더십은 전혀 다른 기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멜로의 주인공들은 재다신약의 대표적 케이스에 해당한다. 그런 캐릭터의 경우, 일단 사랑을 하면 뭔가 장애가 생긴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랑과 장애가 동시적으로 리듬을 타는 것으로, 이건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기제다. 멜로의 판타지를 낳는 건 사랑 자체가 아니다. 사랑에 수반되는 ‘생고생‘이다.

솔직히 말하면 사랑을 원하는 것인지 생고생을 원하는 것인지 구분이 잘 안 갈 정도로 둘은 뒤엉켜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랑과 ‘죽음충동‘이 혼동되고, 사랑이 삶을 질식시키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전도망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 몸도 마음도 괴로운 상태에 빠지는 것, 이건 결코 아름답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팔자가 ‘꼬인‘ 케이스다. 굳이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상대를 찾아 헤매는 격이라고나 할까. 혹은 몸과 마음을 스스로 괴롭히기 위해 어떤 대상을 선택하는 것인지도.

따라서 사랑을 "한다"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질투, 분노, 광기, 변덕 같은 힘들에 끌려다니게 된다. 그 힘들이 바로 나의 능력을 갉아먹는 수동촉발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힘들에 끌려다니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감정들에 붙들려서는 안 된다. 붙들리면 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힘들보다 더 강한 긍정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미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중에서)

요컨대, 사랑은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다니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새로운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능동적 활동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멜로의 주인공이야말로 사랑이라는 정의와 가장 먼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사랑이란 자신의 결핍감과 욕구를 채워주는 수단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걸 채워줄 수 있는 대상은 없다. 그러니 괴로움이 끊임없이 이어질밖에.

짧은 쾌락과 긴 괴로움, 이것이 멜로의 주인공들이 밟아가는 보편적 코스다.

명리학적으론 재성에 사로잡힌 인생이다. 존재 자체가 재성으로 가득 차 있으니 다음 마디로 넘어갈 수가 없다.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는 그 지독한 사슬을 끝내려면? 죽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멜로의 주인공들이 보이지 않는 ‘운명의 덫‘에 걸렸다고 안타까워하지만 그 모든 것을 불러들이는 건 사실 자기 자신이다.

사랑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계속 인연을 만드는데, 그러기 위해선 사랑을 둘러싼 사건사고가 그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기껏 죽을 힘을 다해 그 늪에서 벗어난 뒤에도 다시 또 그런 대상에 꽂힌다. 그런 사랑을 해야만 ‘미친 존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건 사실 사랑이라기보다 중독이라고 해야 맞다. 사랑의 격정을 느끼는 순간을 지속·반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 더 많이, 더 세게......

평범한 수준의 감정으로는 직성이 안 풀린다.

그러자면 장애가 없는 사람하고는 불가능하다. 평온하고 덤덤한 것은 사랑이 아니니까. 유년기의 상처도 있어야 하고, 계층 간의 격차도 심해야 하고, 주변관계도 복잡해서 방해꾼도 엄청 많아야 하고, 당연히 삼각·사각으로 꼬여야 하고.

음모와 배신, 사기와 거짓말 등등 온갖 협잡이 자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의 파토스가 강렬해지니까. 사랑의 짜릿함을 확인할 기회가 많아지니까.

어디서 많이 본 증상 같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돈에 대한 ‘중독증‘과 동일하다. 돈에 대한 욕망 또한 이런 레이스를 밟는다.

다다익선에 긴장의 일상화, 쾌락의 증식 등등. 팔자에서 돈 문제와 에로스를 오버랩시킨 건 이런 점에서 실로 적확하다. 최근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재벌 2세, 3세인 이유도 이런 맥락의 소산이다. 경제적 격차가 벌어질수록 그만큼 더 멜로의 파토스를 만끽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드라마의 문법은 이렇다 치고 그럼, 현실에선 어떨까? 이런 패턴을 지닌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 처음엔 아주 황홀하다. 지극 정성으로 아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유통기한이 짧다. 순식간에 다른 대상을 향해 떠나 버린다. 그런 점에서,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예쁘다는 게 꼭 좋은 전략은 아니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재다신약일 경우가 많고 그런 남자는 결코 하나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왜? 세상에는 예쁜 여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남성의 경우는 처음 대시를 하고 상대를 손에 넣을 듯 말 듯한 상황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아무리 예쁘다 한들 이런 욕망의 패턴을 만족시켜 줄 도리가 없다.

그래서 아주 역설적인 말이지만 예쁠수록! 버림받을 확률이 높은 것이다.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이런 함정에 곧잘 빠지곤 한다 이런 남자와 사랑을 할 때는 여성들이 훨씬 강건해져야 한다.

여성의 재다신약일 경우는 좀 다르다. 재성이 강하면 일단 일복이 억수로 많다. 엄청 벌어도 또 누군가 털어간다. 그것이 아버지일 수도 있고 형제일 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있다.

차라리 벌지 않으면 털릴 일도 없다. 그런데 재주가 많으니 또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재물이 일을 낳고 일이 또 제물을 낳는데, 재물이 모이기보다는 계속 여기저기로 흘러간다.

재다신약인 남성이 자신을 힘들게 하는 여성한테 끌리듯이, 재다신약의 여성은 재물을 일구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고 할 수 있다.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이런 뜻이리라.

그래서 어찌 보면 가장 고생스러운 팔자라고도 할 수 있다 돈을 많이 벌거나 만질 가능성도 많지만 그만큼 정기신의 소진도 많다.

‘성공의 희생양‘이라는 말은 그래서 명리상으로는 형용모순이 아니다.

연예인들의 삶이 여기에 아주 가깝다. 연예인들도 처음엔 춤과 노래, 연기를 그 자체로 즐기고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이 ‘자발적 불꽃‘은 꺼져 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제 노래와 춤, 연기는 다 ‘노동‘으로 전화된다. 나 같은 평범한 팬의 입장에서 보자면 연예인보다 힘든 직업도 없어 보인다.

드라마를 찍으려면 겨울에 여름을, 여름엔 겨울을 연출해야 한다.

밤을 새는 건 다반사고 철인 3종 경기 버금가는 고난도의 동작을 반복해야 한다. 특히 댄스가수들의 경우, 그토록 과격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다니, 의학적으로 보자면 근육과 관절에는 치명적이다. 좀 과장에서 말해보면, 인류 역사상 어떤 노예도 저렇게 과격한 노동을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미천하다 해도 밤에는 일단 잤기 때문이다. 불이 귀했던 탓에 야간 노동을 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요즘 잘 나가는 연예인들은 하루 2, 3시간도 자지 못한다.

겉보기엔 건강해 보이지만 뼈는 중년처럼 노화되었고, 이명에 안구건조증, 공황장애 등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 더 무서운 건 그렇게 강도 높은 노동을 감내해도 대중의 욕망은 어디로 ‘튈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엄청난 관심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열광적 환호가 순식간에 증오의 돌팔매로 바뀐다. 하지만 이건 지극히 당연하다. 인간이 즐기는 모든 쾌락에는 커다란 슬픔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이 슬픔과 마주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쾌락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중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 욕망의 ‘파도타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걸 대책 없이 따라가다가는 결국 인정욕망에 의해 삶 전체가 잠식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재다신약의 비극에 다름 아니다. 재성은 소유를 향한 집착 혹은 집중력이다. 재성이 많으면 당연히 재주가 많다.

어떤 일을 해도 마무리를 하는 야물딱진 성격일 테니 말이다. 대신 그만큼 소유욕도 강할 것이다. 정재가 발달하면 다소 인색하거나 깍쟁이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는 거의 모든 재능을 화폐화 하기 때문에 재성만 쓸 경우 존재 전체가 화폐의 속성을 닮아 버린다. 모든 가치를 먹어 치우는 단 하나의 척도로서의 화폐! 그래서 자신의 재능을 오직 교환의 차원에서만 쓰려고 들고, 그래서 몸은 한없이 경직되게 된다.

따라서 이럴 경우, 앞에서 강조했듯이 이 넘치는 재성을 반드시 관성으로 터주어야 한다. 나의 스톡을 사회적 조건으로 소통시켜 주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인디언 추장의 자격은 선물과 증여의 달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관성은 낯선 관계망에 들어감으로써 전혀 다른 내가 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래서 여성이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건 새로운 세계와의 마주침을 의미하고, 남성에게는 자식이 그렇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관성도 다 재성처럼 쓴다는 게 문제다. 에로스를 자본화하는 흐름이 워낙 강고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남성이 여성을 재물로 간주했지만, 요즘은 여성도 남성을 제물로 환원한다. 그래서 상품을 구매할 때와 거의 차이가 없다.

관성을 통해 새로운 주체로 재탄생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재성의 연장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재성이 ‘특권화‘되면서 관성의 리듬에도 상당한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여 관성이 작동하는 사회적 배치를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 P204

팁으로 ‘재성을 관성으로 터주는’ 몇 가지 비책을 덧붙인다.

첫째, 회사를 공동체적 관계로 바꿔야 한다. 우리 시대에 회사나 공장 등 작업장은 경쟁과 암투가 벌어지는 격전지로 간주된다. 회 225 사/공동체를 적대적으로 나누어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정당한가? 근대 이전에는 작업장에서 배움과 밥과 인생을 동시에 해결했다. 정글 혹은 격전지로 바뀐 건 교환의 법칙이 지배하면서부터다. 자본주의 사회라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숙명론이다. 전쟁터와 포로수용소 같은 곳에서도 우정과 연대는 가능하다. 심지어 지옥에서도 그렇다고 나는 확신한다. 하물며 직장에서야. 생각해 보라. 정규직을 가지면 하루의 대부분을 작업장에서 보내야 한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만나는 사람이 곧 나다! 그런데 그들을 오직 라이벌이나 적으로만 여긴다면 그건 무엇보다 자신의 운명을 소외시키는 일에 다름아니다. 양생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정기의 소모가 너무 크다. 매일 얼굴을 맞대는 사람들끼리 서로 ‘밀당’을 해야 한다면 그것처럼 피곤한 일도 없다. 사람에겐 오직 사람만이 필요하다. 돈을 버는 것도 사람들과 연결되기 위함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떤 작업장이건 일단 몸을 담고 있는 한 거기에서 공동체적 연대감과 의리를 배워야 한다. 스승과 벗을 만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스승과 벗이 없는 인생이란 그 어떤 금액의 돈으로도 결코 보상받을 수 없음을 꼭 되새길 필요가 있다. - P224

언뜻 보면 인의예지신이 다 그게 그거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금기운이 용신인 경우는 의(義)를 체득해야 하는데, 의로움이란 옳고 그름을 날카롭게 분별하는 덕목이다. 이게 필요하다는 말은 평소의 행동거지에 맺고 끊음이 불분명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말투에서 발걸음까지 매사를 또박또박 표현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애를 써야 252 한다. 주변을 늘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편이다. 이 정도만 해도 응용할 사항이 넘친다. 그 다음엔 이걸 몸에 착! 달라붙게 해야 한다. 몸이 바뀌면 인생도 바뀐다. 그래서 ‘보면 안다’고 하는 것이다. - P251

흔한 통념과는 달리 공동체에선 사건사고가 그치지 않는다. 팔자들이 원색적으로 난무하기 때문일 터이다. 해마다 겨울이면 연례행사처럼 터지는 연애사건들도 하나같이 블록버스터 감이다. 연예인들의 스캔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세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에 감정의 태풍이 휘몰아친다. 거기에 휩쓸리다 보면 공동체가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아무리 기이한 사건일지라도 거기에는 배움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기다림의 지혜를 터득하기로 작정했다. 태 254 풍이 지나갈 때까지, 사건의 맨살이 드러날 때까지, 번뇌의 한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새로운 배치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헌데,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또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사건들이 또 우리를 맞아준다. 와우~ 덕분에 공동체에선 고독과 소외를 느낄 틈이 없다. 지루하고 심심할 겨를이 없다. 생극의 파노라마 속에서 삶의 진면목을 대면할 수 있는 것, 기다림과 끈기를 훈련할 수 있는 것, 권태와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 이보다 더 좋은 용신이 있을까.

세존께서 싹끼야족의 마을에 계실 때였다. 존자 아난다가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훌륭한 벗과 사귀는 것, 훌륭한 친구와 사귀는 것, 훌륭한 도반과 사귀는 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세존께서 답하셨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훌륭한 벗과 사귀는 것, 훌륭한 친구와 사귀는 것, 훌륭한 도반과 사귀는 것이야말로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한다. 아난다여, …… (그것은)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을 닦고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길을 익히는 것이다." (전재성 역저,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 한 권으로 읽는 쌍윳따니까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 335~336쪽)

벗과 친구와 도반, 이것은 가족삼각형 안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세존의 말은 이것이 불가피한 대안이 아니라 가장 성스러운 길이라는 것. 이 길은 다른 게 아니라 돈과 가족이라는 가치에서 벗어나야 255 하고 몸의 안일함을 벗어나야 하고, 정신적 의존성을 벗어나야 한다. 한마디로 지혜를 갈고닦는 수행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또 제빵왕 김탁구가 보여 주었듯이 이 길 위에서는 반드시 스승과 도반을 만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주적 차원에서 볼 때, 배움과 만남은 같은 율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고로, 지혜와 공동체는 하나다! 지혜와 공동체가 오버랩되는 순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리듬과 강밀도로 살아가게 된다. 하여, 이보다 더 좋은 개운의 기술은 없다!
팁 하나. 일간이 뭐건, 사주팔자가 어떤 격과 형식을 가졌건 간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취해야 하는, 또 취할 수 있는 보편적 용신이 있다. 약속과 청소다! 약속을 지킨다는 건 시공간과 몸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또 말과 행을 일치시킨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약속을 지키는 건 소통의 핵심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고서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명리학적으로는 식상이 관성을 극하는 코스가 아니라, 재성을 통해 관성을 북돋아 주는 코스를 밟는 것이다. 비겁-식상-재성-관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쓸데없는 잉여를 쌓아 두지 않는 것이다. 몸 안에 잉여가 쌓이면 담음이 되고 어혈이 되고 종양이 된다. 마찬가지로 동선과 관계에 찌꺼기가 쌓이면 그것이 불신과 분노, 그리고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약속을 지킨다는 건 내가 살아가는 시공간을 청정하게 만드는 일에 해당한다. 청소가 중요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유불도를 막론하고 동양의 공부법은 청소를 ‘쿵푸’(工夫)의 기초로 삼았다. 쓸고 닦고 정돈하고…… 사찰에 가보면 알겠지만 구도자들은 256 무엇보다 청소의 달인들이다. 티끌 한조각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하는 발우공양을 수련의 중요한 코스로 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약속과 청소, 이 두 가지만 잘 지켜도 인생역전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아니, 이 두 가지를 지키지 않고 좋은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가장 보편적이고도 가장 쉬운 용신에 해당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엔 가장 절실한 용신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식상과다의 상태에 빠져 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고,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을 쏘아 댄다. 말과 행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그럴수록 몸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진다. 그 간극과 거리에서 탄생하는 무수한 질병과 번뇌들! 이것들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아주 간단하다. 약속을 지키는 훈련을 하면 된다. 어떤 과정을 거쳤건 일단 말로 내뱉은 일에 대해선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또 지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침묵하라! 동시에 청소를 일상화하라. 현대인들은 청소를 할 줄 모른다. 화려하고 멋진 집과 건물을 갈망하면서 정작 그런 공간을 소유하고 나면 쓰레기통처럼 취급한다. 사방에 짐을 늘어놓고 그 위에 또 새로운 상품을 쌓아 둔다. 일 년 동안 한 번도 만지지도 쓰지도 않는 물건들이 사방 곳곳에 방치되어 있다. 궁전 같은 집에서 거지처럼 사는 존재들! 그러고서 위생을 따지고 질병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학교에서도 청소를 가르치지 않는다. 학부모나 청소업체가 대신해 준다. 급식을 먹을 때도 그렇다. 제멋대로 먹고 마구잡이로 버린다. 청소의 윤리, 음식에 대한 예의를 가르칠 엄두도 내지 못한다. 공부의 생기 257 초를 배우지 못하는 학교라니, 이것은 학교가 아니다!
참, 이래서 역설적으로 현대인들에겐 최고의 용신이 된다. 자기 팔자가 팍팍하다고 느낀다면, 이유없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롭다면, 다른 건 일단 제쳐 두고 먼저 점검해 보라. 내가 얼마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를. 약속을 지키고 청소를 잘 하고 있는지를. 산다는 건 별 거 아니다. 시공간이 곧 나다. 시공간과 내가 조응하는 만큼이 곧 나의 일상이다. 고로, 일상의 구원은 약속과 청소로부터 온다! - P253

접속의 방법도 아주 구체적이어야 한다. 먼저 소리를 통해 내 몸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 낭송과 암송이 바로 그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를 잘 몰라도 상관없다. 계속 읽다 보면 문득 뜻을 깨치기도 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뜻을 새길 수도 있다. 한번 생각해 보라. 디지털 세대는 뭔가를 기억하기 위해 몸부림쳐 본 경험이 없다. 교육의 영역에서도 암기는 점차 사라져 간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는 명목으로. 미리 말하지만 주입식과 암기는 동일한 말이 아니다. 암기, 더 정확히 말해서 암송은 인류의 가장 보편적이고도 탁월한 교육법이었다. 독서란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텍스트의 모든 내용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외우는 것이었다. 아니 외운다는 말은 부적합하다. 텍스트와 신체가 한몸이 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냥 몸에 착! 달라붙어 입에서 술술 나와야 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비롯하여 사서삼경, 불경과 성경 등 인류의 위대한 고전은 다 암송을 통해 구전되어 왔다. 하지만 지 262 금의 독서는 오로지 눈으로 스윽 훑는 것이고 각종 리뷰를 클릭하는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생각건대, 암송은 다시금 미래적 대안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필사 또한 좋은 방법이다. 고전 속에서 깊이 촉발되는 ‘씨앗문장’들을 베껴 쓰는 것이다. 손으로 꾹꾹 눌러 쓰노라면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내용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장의 호흡이나 리듬도 익힐 수 있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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