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3 프롤레타리아 교회의 지배권을 쥐고 그 권력을 악용함으로써 교회를 지배적 소수자의 생각대로, 또한 그들의 이익이 되도록 운영하는 신관 계급은 반드시 지배적 소수자에게 소속되는 종전의 신관 계급 가문의 출신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실재로 프롤레타리아의 교회 자체의 지도적 인재가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
로마 공화제 시대의 초기 정치사에서 서민 계급과 귀족 계급 사이의 ‘스타시스(계급전)‘가 종말을 고한 것은, 이들 비특권 계급인 서민의 지도자가 민중의 신뢰를 저버리고 민중을 죽게 내버려 둔다는 묵계 아래 귀족 계급이 서민 계급의 지도자를 한패로 끌어들이는 ‘거래‘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유대 민중은 그리스도 시대 이전에 그들의 옛 지도자였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에 의하여 배반당하고 버림받았다.
이 유대의 ‘분리주의자‘들은 최초에 의도한 뜻과는 반대의 뜻으로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이름에 알맞은 행동을 하였다. 바리새 인은 원래 헬레니즘에 물든 유대인이 외래의 지배적 소수자 진영에 참가하였을 때 이들 변절자로부터 분리된 유대의 퓨리턴(청교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시대에 바리새인의 현저한 특징은 유대인 사회의 충실하고 또 신앙이 깊은 성원인 민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도 민중에 대하여 위선적으로, 자기들의 행동이야말로 유대인의 모범이라고 일컬었던 점에 있었다. 이것이 복음서의 여러 곳에 나오는, 바리새인에 대한 통렬한 비난의 역사적 배경이다. 바리새인은 유대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로마 인 지배자와 함께 유대를 종교적으로 지배한 유대인의 지배자였다. 실제로 그리스도 수난의 비극에 있어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로마의 관헌 측에 가담하여 그들을 욕보인, 그들과 같은 종족의 예언자를 죽이려고 꾀하였던 것이다. - P582

583-7 "놀라운 것은······ 이 새로운(즉 그리스도교의) 신화가 외국으로부터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어로 저술한 그리스도 교 교부들의 신학과 철학이 본질적인 점에서 플라톤적인 것임이 밝혀졌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거의 수정을 가하지 않고 플라톤을 채용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융합으로 미루어 플라톤이 옛날 신들의 이야기로 대체하려고 한 신화는 그리스도 교의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완전한 그리스도 교 자체였다는 점이 된다. ······ 그리고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암시를 통하여 플라톤 자신은 곧 오고야 말 새로운 신의 출현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던 것이며, 그의 우화는 이것이 예언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변명」 속에서 자신의 죽음 뒤에 출현하여 죽음에 보복할 영혼의 존재를 증언하는 다른 증인이 있음을 아테네 시민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철학이 아무리 추리를 하고, 고원한 상상을 전개시켜도 참다운 진리는 신의 은총에 의하여 인간에게 계시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철학이 종교에 몸을 맡기는 역사적 기록은 헬라스 사회에 매우 풍부하므로 우리는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계를 좇아 살펴볼 수 있다.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트라키아의 벤디스 여신 신앙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냉정한 지적 호기심이었으며,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의 헤로도토스의 태도, 즉 그가 때때로 부수적으로 행하고 있는 비교 종교학적 고찰의 태도도 역시 그와 같았다. 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본질적으로 학문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에 의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이 무너진 뒤 그 후계 국가들의 헬라스 사회 출신 지배자는 잡다한 인종이 뒤섞인 민족들의 종교적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어떤 식으로든 종교적 의례를 정해야 했다. 동시에 지배적 소수자에 의하여 신학적 문제가 그때까지보다도 다소 큰 실제 관심사로 떠올랐다. 또한 스토아파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 창시자들이나 전파자들이 정신적 황야에서 절망하여 방황하는 인간 각자의 영혼에 어느 정도의 정신적 위안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 학파의 경향과 기푸을 이 시대 헬라스 사회 철학의 지배적 경향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플라톤의 제자들이 알렉산드로스 이후 200년 동안 점점 회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결정적인 정세의 변화는 스토아의 문호를 크게 개방하여 민중의 종교적 신앙을 맞아들인 시리아의 그리스 인 스토아파 철학자와 아파미아(시리아의 지방)의 포세이도니오스(기원전 100년경 그리스의 천문학자)와 함께 일어났다. 그로부터 200년이 못 되어 스토아파의 지도권은 갈리오의 동생이며 성 바오로와 같은 시대의 철학자 세네카로 옮아갔다. 세네카의 철학적 저작 중에는 바오로의 서한 중 여러 대목을 상기시키는 똑같은 글귀가 여러 군데 나오므로 후세의 멍청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와 그리스도교 전도자 바오로 사이에 서한 교환이 있었다고 상상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와 같은 억측은 사실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같은 시대에 같은 사회적 체험에 의하여 촉진된 정신적 음악의 두 가지 작품에 이와 같이 가락이 일치되는 대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해체기 문명의 변경을 지키는 군인과 경계선 저쪽의 야만인 전투 단체와 관계를 고찰하였을 때, 우리는 제1기에 양자가 서로 접근함으로써 거의 분간할 수 없게 된다는 것, 다음에 제 2기에 양자가 다같이 같은 야만의 평면에서 합류함으로써 뒤섞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과 병행하는 지배적 소수자인 철학자와 프롤레타리아의 종교 신봉자가 서로 접근한 역사에서는 세네카와 성 바오로가 높은 평민에서 ‘접근함‘으로써 제1기를 마무리한다. 제2기에 철학은 자기보다 덜 계발된 종교의 영향에 굴복하여 성실한 신앙으로부터 미신으로 빠진다.
지배적 소수자의 철학적 말로는 이와 같이 가련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힘껏 노력하여 고등 종교의 온상이면서 보다 호젓한 프롤레타리아의 정신적 토양에 침입할 수 있었더라도 이 운명을 모면할 수는 없다. 철학도 그곳에서 간신히 꽃피지만 모처럼 꽃이 피었더라도 씨를 늦게 뿌려 마지못해 피는 이 꽃은 건전하지 못한 타락 상태에 빠진 나머지 철학에 위해를 끼치므로 아무런 쓸모가 없다. 문명의 사멸이라는 마지막 막이 오르면 철학은 사멸하는 데 반하여 고등 종교는 살아남아 장래의 지위를 확보한다. 그리스도 교는 합리성의 포기 가운데 불사의 영약을 발견하지 못한 신 플라톤 철학을 밀어젖히고 살아남았다. 실제로 철학과 종교가 만날 경우, 종교는 반드시 세력을 증대시키고 반대로 철학은 반드시 쇠퇴해 간다. 그러므로 양자가 만나는 데 대한 고찰을 마침에 있어 왜 철학의 패배가 기정 사실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종교와의 경쟁에서 처음부터 철학이 패배하도록 정해지게 하는 약점은 무엇일까? 다른 모든 약점의 근원이 되는 치명적이고 근본적인 약점은 정신적 활력의 결핍이다. 즉, 삶의 ‘엘랑(비약)‘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철학이 무능해진다. 이 결핍은 철학이 대중을 끄는 힘을 감소시키는 동시에, 철학에 매력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이 철학을 펴서 전하는 사업에 모든 힘을 기울이려는 기력을 빼앗는다. 또한 실제로 철학은, 매출이 적은 것을 자기 시집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고답파 시인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지적 엘리트나 ‘소수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세네카보다 1세대 앞선 호라티우스는 「로마의 노래」의 철학적·애국적인 송시에서 다음과 같은 서문으로 시작하면서 조금도 부조화를 느끼지 않았다.

가거라, 너희들 속물들이여!
닥쳐라, 너희들의 더러운 혀로
신성한 노래의 의식을 방해하지 마라.
아홉 여신의 제사장인 나는
다만 젊은이와 소녀들만을 위해 새롭고 숭고한 노래를 만든다.

이 호라티우스의 말과 다음의 예수의 ‘큰 잔치의 비유(<누가 복음> 14:23)‘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물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호라티우스 「송시집」제3권)

이와 같이 철학은 최선을 다해도 도저히 전성기의 종교의 힘에 대항할 수 없었으며, 다만 열등한 신자의 결점을 졸렬하게 모방할 수 있었을 뿐이다. 세네카와 에픽테토스 시대에 겨우 잠시 동안 윤곽이 단정한 대리석상 같은 헬라스 사회 사람들의 지성에 생명을 불어 넣은 종교의 숨결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이후 급속도로 청신함을 잃고 숨 막히는 듯한 광적 신앙으로 떨어졌다. 철학적 전통의 계승자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얻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지성에 호소하는 것을 중지하였으나 달리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할 수 없었다. 현인이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성인도 못 되고 기인이 되고 말았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소크라테스에게 등을 돌리고 디오게네스를 그의 철학적 모범으로 삼았다. 주행자인 성 시메온을 비롯한 추종자인 고행자에게 있어 ‘그리스도 교적‘ 금욕주의의 원천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전설적인 디오게네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희비극적인 종막에서 플라톤과 제논의 마지막 유파들은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모방에 몸을 맡김으로써 그들의 스승으로 추앙하여 모범으로 삼고 있는 위대한 철학자의 불충분함을 고백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앞서 호라티우스가 청중에게 한 말을 거부한, ‘저속한 민중‘과의 거짓 없는 영합이다. 최후의 신플라톤파 철학자였던 이암블리코와 프로클로스는 철학자라기보다는 공상적이고도 비실제적인 가공의 종교의 성직자이다. 성직자의 세력을 지지하고, 종교적 의례에 열의를 보인 율리아누스는 그들의 계획을 실행한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있었는데, 그의 사망과 동시에 국가에 의하여 지지받고 있던 그의 교회 조직이 와해한 것은 현대 심리학의 한 학파 창시자가 한 다음 판단이 옳음을 입중한다!

"위대한 혁신은 결코 위에서부터 내려오지 않는다. 언제나 어림없이 밑에서부터 올라간다. ······ 몹시 바보 취급을 받고도, 말을 하지 않는 지상의 민중ㅡ흔히 높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학문적 편견에 그다지 물들지 않은 사람ㅡ들로부터 일어난다." - P583

587-9 지배자가 나라의 종교를 결정한다?(일부)
우리는 앞 절의 끝에서 율리아누스가 철학자로서 심취한 사이비 종교를 황제로서 백성들에게 강요하다 실패한 데 대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더 좋은 상황 아래서였다면 지배적 소수자가 그들의 정신적 약점을 물리적인 힘을 행사함으로서 보충하고, 부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효과적인 정치적 압력에 의존하여 그들의 피지배자에게 철학이나 종교를 강요함으로써 그들의 정신적 약점을 메꿀 수 있겠는가 하는 일반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는 이 편의 우리 연구에서 논점의 줄거리를 벗어난 문제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볼까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기도는 결국 실패로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은 헬라스 사회의 동란 시대 중에 나타난 계몽기의 사회학설 중 하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학설에 의하면 종교적 관습을 위해서 하급 계층을 향해 계획적으로 강요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거니와 또 이례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실제로 문명의 과정에 있는 사회에서 종교 제도의 정상적인 기원이다. 다음에 게재된 폴리비오스의 유명한 일절 중에 이 설이 로마의 종교 생활에 적용되었다.

"로마의 정치 체제가 다른 나라에 비해 가장 뛰어나게 우수한 점은 종교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로마는 다른 나라가 몹시 싫어하는 것, 즉 미신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주요한 기반으로 만들어 내었다. 로마는 미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사적 생활과 공적 생활에 극단적일 만큼 침투시켰기 때문에, 많은 관찰자는 이것이 부당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의견으로는, 로마 인은 일반 대중을 겨냥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현인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선거민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러한 기만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문제로서 대중은 항상 불안정한 것이며, 또한 무한한 정욕과 비이성적인 기질과 광포한 분노에 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유발과 그와 같은 연극을 꾸며대는 이외에 그들을 제어하는 방법이 없다. 나는 우리들의 선조가, 지금은 전통적인 것이 되어 있는 신학적 신앙이나 지옥에 관한 관념을 대중 속에 심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와 같은 일을 행함에 있어 우리들의 선조는 아무렇게나 그때그때의 방식으로 한 것이 아니고 의식적·체계적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현재 종교를 절멸시켜 버리려는 현대인이야말로 그 무분별과 무책임을 책망받아야 할 것이다."

종교의 기원에 관한 이 이론은 국가의 기원에 관한 사회 계약설과 거의 같은 정도로 진실에서 먼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정치 권력이 정신 생활에 주는 영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력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은 특수한 사정이 조성되었을 때뿐이며 그런 경우에도 작용 범위는 극히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성공하는 것은 예외이며 실패하는 것이 통칙이다. - P587

589
예외의 쪽을 먼저 보면, 때로 어떤 숭배가 참된 종교적 감정의 표현이 아니고 종교의 가면을 쓴 어떤 정치적 감정의 표현인 경우에 실제로 그 숭배를 국교로 하는 데에 성공하는 수가 있다. 예컨대 동란 시대의 고배를 뼈저리게 체험한 사회가 정치적 통일을 갈망하는 표현으로서 행하는 유사 종교적 의식이 그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이미 인간 구세주로서 피지배자의 마음을 장악한 지배자는 그들 자신의 지위와 그의 가계가 예배의 대상이 되는 숭배를 국교로 하는 데 성공한다. - P589

592-3 루이 14세의 야만적인 수법은 프로테스탄티즘을 프랑스의 정신적 토양에서 뽑아 버렸으나, 그것은 회의주의라는 대토작물을 위해 망을 비운 데 불과했다. 낭트 칙령(가톨릭이 앙리 4세가 1598년 국내의 신교파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 폐지 후 9년도 되기 전에 볼테르가 태어났고, 영국도 역시 청교도 혁명의 종교적 호전성의 반동으로 회의적인 풍조가 시작되었다. 이 절의 첫머리에 내건 폴리비우스(그리스의 로마사 역사가)의 인용 중에 명시된 것과 흡사한 새로운 계몽 사상과 종교 그 자체를 조소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사상 경향이 출현했다. 그래서 1736년에 버틀러 주교는 그의 저서 「자연 종교·계시 종교와 자연의 구조·진로의 유사성」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 교는 연구의 대상마저도 될 수 없으며, 이제 드디어 허구인 것이 판명되었다는 생각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이와 같은 견해가 현대의 모든 식자의 일치된 견해인 것처럼, 또 말하자면 오랫동안 이 세상의 즐거움을 방해받은 보복으로 조소와 우롱의 대표적인 대상으로 그리스도 교를 취급하고 있다."

광신을 근절하기는 했지만 그 대신 참다운 신앙의 불이 꺼져 버린 그와 같은 심적 태도는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 계속되어, 서유럽화한 ‘대사회‘의 모든 면에서 극단적인 형태로까지 추진되었기 때문에, 이제 겨우 그 본질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즉 그것은 서유럽 사회체의 정신적 건강은 물론 물적 존재까지 위협하는 최대의 위험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열렬하게 논의되고 시끄럽게 선전되는 우리들의 정치적·경제적 병폐의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더 치명적인 위험이 된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다. 이 정신적 해악은 이제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라 무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병은 진단하기는 쉬우나 치료법을 처방하기는 어렵다. 신앙은 주문하면 곧 입수할 수 있는 표준화된 상품과는 다르다. 그럭저럭 2세기 반이나 계속되어 온 종교적 신념의 점진적 쇠퇴에 의하여 서유럽 인의 마음 속에 텅 빈 정신적 공허를 다시 채운다는 것은 실제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유럽은 아직도 16~17세기에 서유럽 조상이 범한 죄, 즉 종교의 정치 예속 때문에 후유증을 보이고 있다. - P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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