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카스트제의 용인, 전문화에의 경향,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평형 상태를 확보하려는 정열이라는 다양한 논리에서 볼 때, 기원전 4세기의 아테네의 기원전 철학자들은 기원전 6세기의 스파르타의 정치가의 유순한 제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스트 문제는 사실상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근년 우리 서유럽 사회가 자칫 빠지고 만 죄악의 하나인 인종적 편견에 오염되어 있었다. 플라톤의 ‘고귀한 거짓‘(「국가」3권)의 착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보좌관계는 동물과 인간 사이에 있는 관계의 차이처럼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믿게 하는 교묘한 농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 제도 옹호도 같은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노예가 되도록 되어 잇다고 주창한다. 물론 실제로는 자유인이어야 할 많은 인간이 노예로 되어 있고 노예이어야 할 많은 인간이 자유인으로 되어 있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말이다. - P238

246-7 군국주의는 이 본서의 뒷부분에서 기술될 것이지만, 오늘날 기록에 남아 있는 20여 개가 넘는 문명의 쇠퇴가 일어난 과거 4000년 내지 5000년 사이의 가장 보편적인 문명 쇠퇴의 원인이었다. 군국주의가 문명 쇠퇴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 사회가 분화해서 성립한 몇몇 지방 국가들을 골육상잔으로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이 자살적인 과정에서 그 사회의 조직 전체가 몰렉(서부 셈족의 최고신. 어린이를 희생으로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의 황동 가슴 속에 불살려지는 불꽃의 연료가 된다. 단 한 가지, 전쟁의 기술만이 갖가지 평화의 기술을 희생으로 진보한다. 그리고 이 죽음의 제전으로 인해 군국주의 열광자들이 모조리 죽어버리기 전에 군국주의자들은 잠시 동안 광적인 살육 축제를 그만두고 그 동안 완전히 숙달한 살인 무기를 이민족의 가슴에 돌려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헬라스 사회의 역사를 조사해 보면, 내부지향적 성향을 발견함으로써 우리가 얻어낸 결론과 정반대의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미 말했듯이 헬라스 사회는 그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인구 과잉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지리적 팽창을 행하였다. 그리고 이 시도는 약 2세기 동안(기원전 750~550년경) 계속된 다음에 주위의 비 헬라스 세력에 의해 중지되었다. 그리고 난 뒤 헬라스 사회는 수세에 몰리게 되어, 본북에서는 동쪽에서 온 페르시아에게 공격당하고, 비교적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는 서쪽에서 온 카르타고의 공격을 받았다.
이 기간 중 투키디데스가 말했듯이 "헬라스는 장기간에 걸쳐 사방에서 압박받았다"(투키디데스 「전쟁사」1권 17장). 그리고 헤로도토스가 말했듯이 "그 이전의 20세대에 걸친 기간보다도 많은 동란으로 점철되었다. (헤로도토스「역사」6권 98장). 현대인들은 그리스의 2대 역사가의 위와 같은 우울한 문장을 헬라스 문명의 절정으로 회고되는 뛰어난 시대, 즉 헬라스 사회의 천재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있어 헬레니즘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었던 위대한 창조 활동의 시대에 있어 헬레니즘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었던 위대한 창조 활동의 시ㅡ대에 대한 묘사라고는 믿기 어렵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이 창조적인 시대에 대해 그렇게 느낀 이유는 단지 그 이전 시대와 달리 헬라스의 지리적 팽창이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 P246

247-8 거의 모든 문명의 역사는, 지리적 확장이 질적 타락과 동시에 일어난 것을 나타내는 실례를 제공한다. 그 가운데에서 둘만 택하기로 한다.
미노스 문명이 가장 넓은 범위로 퍼진 것은 현대의 고고학자가 ‘후기 미노스 제3기‘라는 명칭을 부여한 시기인데, 이 때는 기원전 1425년경 민족 이동의 물결로 북부 야만족 아카이아족이 내려와 크노소스를 약탈한 이후였다. 다시 말해 그 확장은 미노스 사회의 세계 국가인 ‘미노스 해양 왕국‘이 붕괴하고 미노스 사회가 파산하여 공백 시대가 왓는데 이것이 문화의 지리적 확장으로 대체된 파국이었다. 이 후기 미노스 제3기에 속하는 미노스 문화의 물질적 제작품은 이전의 어느 시기의 제작품보다도 넓은 지리적 분포를 나타냈으며, 그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작품상에 뚜렷이 퇴폐의 낙인이 찍혀져 있는 일이 분명 문에 뜨인다. 마치 생산량의 팽창 때문에 기술의 질적 저하의 대가를 지불해야 헀던 것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현재 동아시아 사회의 선행 사회인 중국 사회의 역사도 대개 마찬가지이다. 성장기 동안의 중국 문명의 지배 영역은 황하 유역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앗다. 중국 문명 세계가 남쪽의 변덕스런 양쯔강 유역과 북쪽인 백하보다 더 먼 평원 지대를 병합한 것은 중국 사회의 동란 시대를 중국인이 ‘전국 시대‘라 부르고 있는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중국 사회의 세계 국가 건설자 진나라 시황제는 그의 정치적 경계선을 여전히 남아있는 길고 긴 장성을 쌓아 정하고 그 선까지 진출했다. 시황제의 유업을 이은 한왕조는 더욱 멀리 남쪽에 진출했다. 이와 같이 중국 사회의 역사에서도 지리적 확장의 시기와 사회적 해체의 시기가 때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 P247

249-50 그럼 다음으로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 기술의 향상에 의한 자연 환경 정복의 팽창이 과연 참된 문명 성장의 타당한 기준이 되는가를 생각해 보자. 기술 향상과 사회적 성장의 사이에 과연 긍정적인 상호 관계가 존재하는 증거가 있는 것일까?
현대의 고고학자가 발명한 분류법으로는, 이 상호 관계는 당연한 일로 간주되어 일련의 물질적 기술 향상 단계를 미루어 정하고 그에 대응하는 문명의 진보를 계속 단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이 사고 방식으로는, 인류의 진보는 구석기·신석기·금석기 병용·청동기·철기, 게다가 우리 자신이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고 있는 기계 시대까지 기술적 명칭에 의해 구별되는 일련의 ‘시대‘로 표현한다.
이 분류법은 널리 일반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분류법이지만, 그래도 그것이 문명 진보의 단계를 나타낸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실증적 검증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단순히 선험적으로 생각했을 경우에도 의문스럽게 생각되는 몇 개의 이유를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로, 이 분류법이 일반시된다는 그 자체부터가 의문시된다. 외냐하면 이 분류법은, 최근에 자기의 기술적 승리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는 사회의 편견에 영합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분류법이 인기 있다는 것은, 각 세대가 그 시대 특유의 일시적인 사고 경향에 따라 과거의 역사를 평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증이다.
둘째로 사회적 진보의 기술적 분류법을 의문시하는 이유로서, 연구자는 우연히 입수한 특정 연구 자료의 노예가 될 경향이 있음을 나타내는 명백한 예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견지에서 보면, ‘선사 시대‘의 인간이 자기를 위해 만든 물질적 도구가 현재까지 자료로 남아 있는 데 반해, 제도나 사상처럼 정신적 제작품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이들 정신적 도구는 그것이 사용되고 있는 동안은 인간 생활에 있어 어떠한 물질적 도구가 이행하는 일보다도 훨씬 중요한 역할을 이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려진 물질적 도구가 유물의 파편으로 남지만, 버려진 정신적 도구는 그러하지 못하므로, 인류의 역사에 관한 지식을 거기서 끄집어내기를 바라고, 인간이 남긴 유물을 취급하는 것이 고고학자의 일이기 때문에 고고학자는 자칫하면,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사유하는 인간을 그 부차적인 역할인 ‘호모 파베르‘의 생산하는 인간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문명이 정지하고 쇠퇴하는 데도 불구하고 기술이 향상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반대로 문명이 움직이고 있는ㅡ전진하는 경우와 후퇴하는 경우를 포함해서ㅡ데도 기술이 정지하는 경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발육 정지된 문명은 모두가 고도의 기술을 발달시켰다. 폴리네시아 인은 항해자로서, 에스키모는 어부로서, 스파르타 인은 군인으로서, 유목민은 말의 조련자로서, 오스만족은 인간 조련자로서 제각기 탁월했다. 이들은 모두가 기술이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명이 정지되었던 예이다.
문명이 쇠퇴해 감에도 불구하고 기술이 향상되는 예로는 유럽의 구석기 시대 후기와 기술적 진보의 계열상으로 보아 바로 그 뒤를 잇는 신석기 시대 전기와의 사이에서 대조적 차이를 들 수 있다. 구석기 시대 후기의 사회는 세공이 조잡한 도구로 만족하고 있었으나, 섬세한 미적 감각을 발달시켜 거기에 회화적 표현을 주는 어떤 종류의 단순한 방법을 발견했다. 그런데 구석기 시대인의 동굴 생활 흔적이 있는 동굴 벽에 남아 있는, 살아 있는 것처럼 솜씨 있게 그려진 동물의 목탄화는 우리의 찬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 전기에 정교하게 연마된 석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것을 구석기 시대인과의 생존 경쟁에 사용하는데 전념했던 탓인지 호모 픽토르(화가적 소질을 타고난 인간)는 자취를 감추고, 호모 파베르가 승리자로서 남았다. 하여간 기술의 견지에서 보아 현저한 진보를 꾀했던 이 변화는 문명의 견지에서 보면 뚜렷한 퇴보이다. 구석기 시대 후기의 예술은 그들과 함께 사멸한 것이다.
또 마야 문명은 기술적으로는 석기 시대의 영역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에 반하여 그 ‘자식‘ 문명인 멕시코 문명과 유카텍 문명은 에스파냐9 인에 의한 정복에 앞선 500년간에 각종 금속 가공법에 있어 눈부신 진보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마야 사회 쪽이 그 ‘자식‘ 사회에 해당하는 제2류의 두 사회보다 훨씬 뛰어난 문명을 달성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P249

273-4 내면적 신비 상태, 즉 긴장 없는 긴장의 상태가 개인적인 것일 때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의미로 베르그송적 천재인이 체험하는 신비의 극치라고 할 수 없다. 이런 모순이 신비적 영감을 받은 인격의 출현과 아울러 인간 사이에 생기는 동적인 사회적 관계의 요점이다. 창조적 인격은 그의 동료인 인간을 그 자신의 모습과 흡사한 것으로 다시 만듦으로써, 창조의 협력자로 변모시키려고 한다. 신비가의 매크로코스모스 속에서 일어난 창조적 변화는 그것이 완전한 것이나 확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 다시 매크로코스모스에 적응해 개조되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가설상 변모한 인격의 매크로코스모스는 또한 변모하지 않은 인격의 매크로코스모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신비가가 그 자신의 변화에 맞도록 변화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마이크로코스모스를 현상대로 유지함으로써 변화하지 않은 자아와 조화하는 것으로 해 두려는 동료의 타성적인 저항을 받을 것이다.
이 같은 사회적 사태가 딜레마를 초래한다. 만일 창조적 천재가 그 자신의 내부에서 달성된 변화와 같은 변모를 그의 환경 속에 실현할 수 없다면, 그의 창조성은 그에게 치명적일 것이다. 그는 그의 행동 범위와 전혀 형편이 맞지 않게 된다. 그리고 활동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살아갈 의욕을 잃고 만다. ㅡ가령 떼를 지어 사는 동물이나 곤충의 고정된 사회에서, 개미나 벌, 가축이나 늑대 떼의 변종이 동료에게 덤벼들어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이전의 동료로부터 직접적 죽음을 당하는 일은 없다 하더라도 살 의욕을 상실하고 만다.
한편, 만일 이 천재가 이전 동료의 타성 또는 적극적 적성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고 그 사회 환경까지도 자아의 변모에 적합한 새로운 질서로 바꿀 수 있었다면, 그 다음에는 범용한 대중이 승리를 얻은 천재의 강대한 창조적 의지로 밀어붙여진 자신들의 새로운 자아를 새로운 사회 환경에 적합하게 하는 일에 성공하지 않는 한, 오히려 평범인들이 생활을 견디기 힘들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복음서 안에 나오는 예수의 다음 말을 뜻하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 생각지 마라. 화평이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라."(<마태> 10:34)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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