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자연적인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고 인간의 손에 의해 가해지는 형벌 중에서 가장 뚜렷하고 가장 보편적인, 그리고 또 가장 가혹한 것이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 P167
167-8 고대 그리스 격언에 ‘노예가 되는 날 인간은 인간성의 절반은 박탈당한다‘(「오디세이아」17권 속에서 소지기 에우마이오스가 한 말)는 말이 있는데, 그때 이 격언이 그대로 무서운 형태로 실현되었다. 노예의 자손인 로마의 도시 프롤레타리아들이 부패하였다. 그들은 빵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빵과 구경거리‘로 소일했고, 이것이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마음껏 사치를 누린 생활 끝에 마침내 파탄을 가져왔으며, 그들이 지구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는 날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 장기간에 걸친 죽음과 같은 생활은 노예화의 도전에 대해 응전하지 않은 벌인데, 헬라스 사회 역사의 최악의 시대에 모조리 노예로 되고 말았던 이들 온갖 잡다한 출신과 내력을 가진 인간의 대다수가 그와 같은 멸망으로의 넓은 길을 다같이 걸어갔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도전에 대항하여 무슨 방법으로서든 ‘교묘하게 뚫고 나가‘ 성공한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자는 하인의 신분으로 차차 입신하여 큰 소유지의 관리 책임자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소유지는 헬라스 사회가 세계 국가로 발전한 뒤에도 계속 카이사르의 해방 노예의 손에 관리되었던 것이다. 어떤 자는 주인으로부터 소규모로 장사할 것을 허락받아서 모은 돈으로 자유를 되찾아 마침내 로마의 실업계에서 부유와 명성을 떨치는 신분으로 출세했다. 그런가하면 어떤 자는 내세에서 철인왕 또는 교회의 사제가 되기 위해, 현세에서는 그대로 노예로 지낸 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르시스와 같은 자아도취에 빠진 난리 중의 부당한 권세나, 트리말키오처럼 영화를 누리는 젊은 부자의 화려한 생활을 거리낌 없이 경멸한 정통적인 로마 사람조차도, 절름발이 노예 에픽테토스(스토아파 철학자, 해방 자유민으로 많은 로마 인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의 조용하고도 맑은 지혜에 대하여 진심으로 존경했다. 또한 이름도 없는 수많은 노예나 해방 노예의 산이라도 움직일 듣한 열렬한 신앙에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니발 전쟁으로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까지 5세기 동안 로마의 위정자들은 힘으로 제지하려고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앞에서 이 노예들의 신앙이 기적을 행하고 또한 그것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자신이 여기에 굴복하고 말았다. - P167
181-3 오늘날, 서유럽의 해방 유대인 중에는 굳이 그들의 사회에다 근대 서유럽식의 민족 국가를 세움으로써 해방을 완성하려고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팔레스타인 땅에 쫓겨났던 유대인을 복귀시키자고 하는 독자적 시온주의자(유대민족주의자)의 궁극적 목적은 몇 세기에 걸친 박해 때문에 생긴 특수한 심리적 컴플렉스로부터 유대 민족을 해방시키려는 데 있었다. 이 궁극의 목적에 있어서는 시온주의자들도 그에 반대 의견을 가진 해방 유대인 사상의 일파와 일치한다. 시온주의자나 동화주의자나 모두 ‘특수 민족‘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염원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시온주의자가 동화주의자와 의견을 달리하는 이유는 후자가 내세우는 방침이 불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화주의자의 이상은 네덜란드나 잉글랜드, 또는 아메리카에 사는 유대인들이 그대로 ‘유대교를 신봉하되 단순히‘ 네덜란드 인·잉글랜드 인·아메리카 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문명국에 사는 유대인 시민이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대신 토요일에 유대교회당(시나고그)에 간다고 해서 단지 그 이유만으로, 동화한 그 나라에서 만족할 만한 완전한 시민이 될 수 없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하여 시온주의자들은 두 가지 대답을 한다. 첫째로, 가령 동화주의자의 방침이 그 지지자의 주장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해도 그것은 문명국에서만 해당될 뿐이지 실제로 문명국의 시민이 되는 행운을 가진 유대인의 수 중 온 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 수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지적한다. 둘째로, 가장 좋은 환경 밑에 있다 할지라도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단지 ‘유대교를 신봉하는‘ 인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뜻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방법으로는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시온주의자의 눈으로 볼 때, 네덜란드 인·잉글랜드 인·아메리카 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유대인은 다만 공연히 그 유대인적 성격을 손상시킬 뿐 그들이 선택한 국적이 네덜란드이건 다른 어떤 이방의 나라이건 그 나라 사람의 성격을 완전히 몸에 지닐 가망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만일 유대인이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무엘기> 85) 되는 데 성공하려면 동화의 과정은 개인적 기초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기초 위에 서서 이루어 나가야 한다ㅡ시온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개개의 유대인이 개개의 잉글랜드 인 또는 네덜란드 인으로 동화하려는 헛된 노력을 하는 대신 유대 민족은 잉글랜드 인이 잉글랜드에서 그러하듯이 유대인이 내 집의 주인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민족의 향토를 획득하거나 또는 회복함으로써 잉글랜드 국민이나 네덜란드 국민과 동화해야 한다. 시온주의 운동이 실제적인 활동을 실천 단계에 옮긴 지 불과 반 세기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사회 철학이 옳다는 것은 실제의 결과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팔레스티나의 유대인 농민 식민지에서 지난날의 ‘유대인 거리‘의 자손들이 완전히 면목을 일신하고 ‘이방인‘의 식민지 개척자 타입의 특성을 다분히 나타내는 개척적 농민이 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실험의 비극적 불행은 이 지방에 전부터 거주하고 있던 아랍 사람과 화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그 역사를 통해 한 번도 자극을 받지 않았고 별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은 유대인 집단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한다. 이들 집단은 모두가 변방의 땅에서 ‘성채‘ 안에 틀어박혀 살며 그 곳에서 완강한 농부, 또는 양성적인 고지 주민의 특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는 서남단의 야만(예멘)의 유대인이나 아비시니아의 팔라샤 인, 카프카스(영어로 코카서스)의 유대계 고지 주민, 크리미아의 투르크 말을 쓰는 유대계 크림차크 인이 바로 그들이다. - P181
223-4 초원에서는 유목민과 사람 아닌 가축 무리와 함께 구성되어 있는 혼합 사회가 그러한 자연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 그렇다고 해도 유목민은 엄밀하게 말해 그의 ‘인간 외의 협력자‘에게 의존하는 기생충은 아니다. 그들 둘은 서로 적절하게 도우며 살아간다. 가축은 자기의 우유뿐만 아니라 고기까지 유목민에게 주어야 하지만, 그 대신 무엇보다도 먼저 유목민이 가축을 위하여 생활 수단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초원 지대에서는 이들이 서로 돕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다. 이와 반대로 농지나 도시에서 이루는 환경에서는 이주해 온 유목민과 토착민 즉 ‘인간 가축‘과의 혼성 사회는 경제적으로 불건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목자‘는 경제적으로는ㅡ정치적으로는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ㅡ늘 남아도는 여분이며, 따라서 기생적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견지에서 보면, 그들은 이미 양떼를 지키는 목자가 아니라 일벌을 착취하는 수펄이 되었던 것이다. 생산적인 주민의 노동이 부양해야 되는 비생산적인 지배 계급이 없다면 주민은 경제적으로 더욱 유복해질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유목민 정복자에 의하여 수립된 제국은 급속히 쇠퇴하여 멸망해 버리는 운명을 겪었다. 마그리브(북아프리카)의 위대한 역사가 이본 할둔(유목민과 농경민 관계를 중심으로 독창적인 역사철학을 세움. 1332~1406)은 제국의 평균 수명은 4대 즉 120년을 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역사가는 유목민 제국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정복이 이루어지면 정복자인 유목민은 이제까지 살던 영토에서 나와 떠돌아 경제적으로 불필요한 여분의 인간이 되기 때문에 타락하게 마련이지만, 그들의 ‘인간 가축‘인 쪽은 자기 토지에 머무르며 여전히 경제면에서 생산적이기 때문에 차차 세력을 되찾는다. ‘인간 가축‘은 다시 자기의 인간성을 주장하고, 그들의 주인인 목자 즉 지배자를 나라 밖으로 추방하거나 동화시킨다. - P223
225-6 초원 지대 사회는 단순히 가축을 사육하는 인간, 그리고 가축 무리만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초원 지역의 땅에 나오는 생산물에 의존하여 살아가기 위해 기르는 동물 외에 그들의 일을 도와주는 다른 동물ㅡ개, 낙타, 말ㅡ도 기르고 있었다. 이들 보조 역할을 하는 동물은 유목 문명의 걸작품인 동시에, 또한 그들의 성공의 열쇠가 되었다. 양이나 소는 인간에게 쓸모있게 하려면, 다만 기르기만 하면 된다(하긴 이것만도 충분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개와 낙타와 말은 단지 기를 뿐만 아니라, 훈련까지 시키지 않으면 한층 어려운 그들의 임무를 해낼 수가 없다. 인간이 아닌 보조자를 훈련시키는 일이야말로, 유목민이 해낸 가장 훌륭한 업적이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아바르 제국과 달리 훨씬 오래 계속되었던 까닭은, 이렇게 뛰어난 유목민의 기술을 정착 사회의 조건에 알맞게 적응시킨 점에 있다. 오스만의 파디샤들은 노예를 훈련항여, 그들의 ‘인간 가축‘ 사이에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도와주는 인간 보조자가 되게 함으로써 그들의 제국을 지탱해 나갔던 것이다. 노예를 군인이나 행정 관리로 삼는, 이러한 주목할 만한 제도ㅡ유목민 천재에게는 그럴 듯 하지만, 우리에게는 낯선ㅡ를 오스만이 발명해낸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것을 정착 민족을 지배했던 다른 몇 개인가의 유목민 제국ㅡ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제국ㅡ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시리아 왕국으로부터 독립한 파르티아 제국에 노예 군대가 존재했던 흔적이 있다. 그것은 기원전 4세기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맞서려는 듯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야망을 때려 부순 군대 중 하나는, 모두 5만 명의 병력 가운데 자유인이 불과 400명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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