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근무하던 학교에 남궁증이라는 선배 교사가 있었다. 그 선생님과 나는, 네 명이 근무하는 작은 교무실에서 함께 근무했다. 당시 나이가 50대 중반 정도셨는데, 아이들이 이 선생님 앞에만 오면 그렇게 까불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흥미로운 것이 있었다. 아이들은 마치 ‘남궁증 선생님이 나를 가장 예뻐한다‘고 믿는 것처럼, 까불고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비단 몇 명의 아이가 아니었다. 선생님을 찾아오는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믿고 까불었다. 선배 교사의 내공이 대단하셨다. 아, 그때 알았다. 당신이 나를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이 있어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도 마음도 자유로이 노닌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꿈도 못 꿀 장면이다. - P90

또 절반. 한 시절을 견딘다는 것을 생각했다. 한 시절을 견디는 일에는 늘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기대어 갈 마음의 언덕 하나 나에게 내준다. 덕분에 이런 길도 저런 길도 울지 않고 깔깔거리며 걷는다. 날마다 전화해서 늘어놓는 온갖 푸념을 다 들어주는 이도, 새로운 일이 있는 길로 손을 끌어주는 이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언제든 연락하게 되는 이도, 다 그런 사람들이다. 강준이도 그런 사람이었다. 소규모의 수업인 데다가 학습의욕이 낮은 녀석들이 많아서, 자칫하면 적당히 때우는 마음으로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준이와 아이들은 다 같이 열심히 하고 뭐든 협력하려고 애썼다. 강준이는 나의 감정을 살피는 담당이기도 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은 얼마나 건방진가. 얼마나 진실하지 못한 자만인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게 될지, 누가 누구에게 어떤 마음을 받게 될지 미리 알 수 없다. 인생이 그렇다. 강준이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 P95

아이들이 적은 인상 깊은 문장은 남의 일기장을 읽는 것 같았다. 얼굴도 모르는 아이의 마음 한복판에 별안간 서게 된 듯하다. 학교에서 전교생의 독서토론 수업을 이끌고, 몇백 명을 독서동아리에 발을 들여놓게 하고도 미처 몰랐다. 인상 깊은 문장을 쓰는 것이 마음을 들키는 결정적인 방법이라는 것 말이다. 마음의 맨살이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몇 글자 안 되는 문장에 가슴이 뻐근하다. - P112

어른인 나에게도 그런 존재는 필요하다. 나의 마음을 순하게 만드는 사람. 사납고 날 선 마음의 결을 조용히 빗질해서 얌전하게 만드는 사람. 싸우듯이 살다가도 팔다리에 긴장 풀고 몸도 마음도 평평하게 눕게 만드는 그런 사람. 이런 사람 하나 없다면 누구도 멀쩡하게 살아가기 힘들다. 소년에게는 더 절실한 존재, 사무치게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 P177

쓸모를 짐작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그것을 주는 사람도, 사용하는 사람도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쓸모라는 것이 세상 어딘가에서 생기기도 한다. 존재하기도 한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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