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길을 택하든 가지 않은 길은 단지 가지 않았기에 아름답다. 내가 밟지 않은 낙엽이 소복이 쌓인 채 저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아름답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숙명적인 동경과 아쉬움도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덧붙여, 그러니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에 너무 빠지지 말고, 그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겨두고, 내가 선택한 길을 가라는 뜻도 있을지 모르겠다. - P49
일라이자는 ‘야수’의 내면을 알기 전부터 그의 외모에도 끌렸다. 물론 자신처럼 물을 좋아하는 고독하고 별난 존재라는 점에서, 또 영화 중에 말하는 것처럼 "그가 나를 바라볼 떄 내 결핍이나 불완전함을 의식하지 않고 나를 있는 그대로 행복하게 바라보기 때문에" 정신적 교감을 느껴서도 그렇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일라이자는 ‘그’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관객들이 어색하다고 지적하는 일라이자의 ‘야수’에 대한 급작스러운 사랑이 설명된다. 성애 장면도 마찬가지다. 미(美)라는 것은 육체의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미묘한 육체적 욕망이 배제될 수 없으니까. - P108
반면에 스트릭랜드는 어류남을 흉측한 괴물이라고 부르며, 러시아 과학자를 보고는 "과학자는 예술가와 비슷해서 자기가 다루는 존재와 사랑에 빠진다."고 빈정거린다. 그런데 스트릭랜드의 이 말에 한 줄기 진실이 있다. 예술가와 과학자는 상통하는 데가 있다는 것, 둘 다 평범한 통념을 넘어선 넓은 시선으로 대상을 보고 뜻밖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 P110
돈키호테와 산초가 방랑하다 어느 양치기 청년의 장례와 맞닥뜨린다. 그는 아름답고 부유한 독신주의 여성 마르셀라 때문에 상사병을 앓다 숨을 거둔 청년이었다. 그 말고도 많은 남자들이 마르셀라에게 반해 상사병을 앓고 있었다. 이때 마르셀라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앞서 『메타모르포세이스』와 『데카메론』의 논리대로라면 마르셀라는 저주를 받아 돌이 되거나 죽어서 양치기 청년의 귀신에게 영원히 쫓겨 다녀야 마땅할 터. 그러나 마르셀라는 당당하고 논리정연하게 항변한다.
"진정한 사랑은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야지 강요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럴진대, 왜 오로지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 말했다는 이유로 내 뜻을 억지로 굽혀 그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까? (…) 나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고독을 선택했습니다. (…) 나는 그것을 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욕망이 희망으로 지탱된다고 한다면, 나는 그리소스토모(상사병으로 죽은 청년)에게 아무런 희망도 준 적이 없으므로, 나의 잔인함이 아니라 그 자신의 집착이 그를 죽인 것입니다." - P130
그러자 돈키호테는 엄숙한 목소리로 "마르셀라는 명확하고 충분한 논거를 들어 자신이 그리소스토모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그리고 어떤 구애자의 소망에도 굴복할 뜻이 없음을 보여주었소. 이 여성을 따라다니고 귀찮게 굴기보다 경의를 품고 찬탄해야 마땅하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원치 않는 구애로 마르셀라를 괴롭히는 자는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돈키호테』는 놀라운 ‘현대성’을 갖춘 소설로 연구되고 있는데, 그 현대성에는 이것도 포함될 것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400년 전 세르반테스의 생각보다도 더 케케묵은 생각을 하고 있는 셈이다. - P131
"우리는 타인이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로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건, 타인의 판단이 거기에 들어간다. (중략)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타인의 판단과 평가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저 말을 보면 ‘남 눈치 보기, 남과 비교하기, 인정과 관심 구걸’이 유난히 많은 우리 사회는 과연 ‘헬’로 등극할 만하다. 저 연극에서 세 남녀가 평범한 방처럼 생긴 저승에서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로 고민하고 싸우다가 그곳이 지옥임을 깨닫는 것처럼, 스스로 지옥을 엮어 갇혀 있는 셈이다. - P158
앞서의 강연에서 사르트르는 "평판에 대해 걱정하면서, 또 스스로 바꿀 의지도 없는 행동에 대해 걱정하면서 사는 건, 죽은 채로 사는 것"이라고, 살아 있다면 "바꾸라."고, "우리는 지옥을 깨고 나올 자유가 있다."고 했다. 한번 그렇게 살아봐야겠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 타인이 주는 상처를 원망하는 대신, 사르트르의 의도대로 스스로 타인의 시선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면서. - P159
어쩌면 ‘나대는 것,’ ‘잘난 척’에 대한 미움은, 본래 스스로 가질 필요도 없는 열등감을 가진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열등감은 개인의 성향 때문도 있겠지만, 획일화된 기준과 정답을 강요하고 거기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모욕하는 기존 우리 문화 때문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긴 열등감에서 비롯된 ‘잘난 척’에 대한 미움이, 자기 자신과 타 166 인 모두의 ‘앎’과 ‘새로운 앎에 대한 욕구’ 즉 창조의 원천인 호기심에 짓밟아 고만고만하게 만들어 버리고, 더욱 획일화되고 정체된 사회를 만드는 악순환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냥 다 같이 나대고 다 같이 잘난 척하면 안 될까? 서로의 나댐, 서로의 잘난 척을 관용하면서 ‘나도 잘나고 너도 잘났어.’, ‘아, 나 특이해. 어, 너도 특이해.’의 마인드로 산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열려 있고 다양하고 여유로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 P165
‘맞아, 바로 이거야.’ 나는 속으로 외쳤다. 왜 이 책이 독일은 물론 유럽에서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경우에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한 게 아니라 규율사회와 성과사회가 공존 및 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한병철이 묘사한 서유럽처럼 ‘다른 것,’ ‘낯선 것’에 대한 배척과 부정이 거의 다 사라지고 ‘긍정성이 과잉’된 사회가 아니다. 여전히 ‘성공한 삶’에 대한 획일화된 기준이 강하고 그에 맞춰 남과 비교하는 강박이 있다. 또 막연한 공동체 도덕 ‘국민 감정’이 있어서 거기 어긋나는 사람들 (범죄자도 아닌 ‘이상’한 사람들까지) 전통의 형벌, 조리돌림을 당한다. 옛날처럼 북을 메고 마을을 몇 바퀴 도는 대신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로 말이다. 하지만 또 한 편에서는 ‘너는 뭐든지 될 수 있어!’ ‘시시하게 평범해지지 말자.’ ‘너만의 길을 찾아 가라!’라고 압박한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한병철의 말처럼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가 되라고 외 189 친다. 그러니 우리는 ‘규율사회의 복종적 주체’로서 남 눈치를 보는 동시에 ‘성과사회의 성과 주체’로서 ‘나 자신이 인정하는 나’가 되어야 한다. 어휴, 환장할 노릇이다. - P187
노리코는 뭐든 구체적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다도를 시작한다. 다도는 다실에 들어설 때 걷는 법부터 수건을 접는 법, 차를 만드는 법, 마시는 법까지 ‘쓸모 없어 보이는’ 엄격한 형식이 잔뜩 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냐고, 이 동작은 무슨 의미냐고 노리코가 묻자 다케다 선생은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집중하다 보면 몸이 저절로 움직일 것이라고 답해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노리코는 그것을 깨닫는다.
"정신이 들자 나는 그저 묵묵히 진한 차를 개고 있었다. 차 한 잔을 개는 일에만 내 마음 전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느새 초조함은 사라져 있었다. 나는 온전히 ‘여기’에 머물고 있었다."
그건 바로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니체를 인용해 말한 "속도를 늦추어 멈춘 상태," "사색적 집중 상태"였다. 무한한 선택지에서 빠른 시간에 최적의 선택을 한다는 강박으로 바삐 움직이며 "활동과잉으로 치닫는 상태, 그럼으로써 도 191 리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아무 저항 없이 바로 바로 응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는 상태"와 정반대의 지점이었다. 공교롭게도 멈춤은 불교 명상 수행의 양날개인 ‘지(止)’와 ‘관(觀)’ 중 ‘지’와 같은 말이기도 하다. 범어의 사마타(Samatha)에서 비롯된 ‘지’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멈추어 고요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 관(觀) 즉, 자신과 세계를 통찰해서, 깨달음에 한 발 더 다가가는 것이다. 한병철은 형식이 사색을 위한 멈춤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모든 형식은 느리다. 모든 형식은 우회이다." - P190
그리고 성인이 되어 새삼 깨달았다. 공덕천과 흑암천은 쌍둥이일 뿐만 아니라 아예 한 몸의 두 얼굴이며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고, 그 어느 쪽의 상태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그럼 둘 다 맞이할 것인가, 쫓을 것인가?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며 ‘불확실성 하의 선택’을 공부할 때 장난스럽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공덕천과 흑암천의 파워가 같아서 251 각각 주는 이익과 손해의 크기가 동일하고 그 확률이 반반이라고 전제하면, 위험회피적(risk-averse)인 사람은 둘 다 쫓아내고 위험선호적(risk-loving)인 사람은 둘 다 맞아들일 것이라고.
불교 철학에서는 둘 다 물리치는 것이 희비와 고락의 굴레에서 벗어나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들은 것 같다. 하지만 속세에서 치열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은 둘 다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 둘이 언제나 함께라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혼탁한 세상에 중심을 잡고 서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 P250
그렇게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은 가족과 인간에 대한 사랑뿐만이 아닐 것이다. 20세기 초 세라핀이라는 괴짜 화가는 가족 없이 남의 집 하녀로 전전하면서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림을 수없이 그렸다. 자연과 예술에 대한 샘솟는 사랑에서였다. 그 사랑에 조응해서, 그와 전혀 연고 없는 이들이 그를 재발견했고 기억한다. 기억되는 것, 그건 결국 사심 없는 사랑만이 받을 수 있는 사랑의 보답인지도 모른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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