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철학과 위진현학 노장총서 12
정세근 지음 / 예문서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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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진현학시대의 두 주인공을 꼽으라면 왕필(王弼, 226-249)과 곽상(郭象, 252-312)이라 하겠다. 왕필과 곽상은 명교(제도)파다. 왕필은 명교(제도)가 자연(본성)에 바탕을 둔다고 하였고, 곽상은 명교가 곧 자연이라고 보았다. 위진현학에 대해 공부하면서 문득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에서 읽었던 ‘유전자 결정주의’가 떠올랐다. 유전자는 곧 위에서 말한 본성의 의미에 가깝다. 즉 곽상은 자크 모노식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비록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이었지만, 동양철학에서도 서양과 유사한 자유의지에 대한 사상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나는 왕필과 곽상의 각각의 입장이 곧 의지론과 결정론을 대표한다고 본다. 사실상, 동양에는 자유의지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이는 외형적으로 ‘제도와 본성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전개되었다.

 인간은 사회 제도를 만들고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이를 꿀벌에 비유하자면, 꿀벌이 육각형 벌집을 짓고 그 곳에서 살아가는 것과 인간이 제도를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 곽상식의 관점이다. 곽상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곧 본성이라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꿀벌의 육각형 집은 자연물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이 만든 각종 도구나 상품들을 우리는 흔히 인공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말한다면,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제도는 자연에 근본을 둔다‘라고 하는 명교에 대한 왕필의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꿀벌 비유는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에서 빌려 온 것이다).

 한편, 내가 제도와 본성에 관한 논의를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로 보는 까닭은 각 입장에서의 인간의 역할 차이와 관련이 있다. 만일 곽상이 제도를 보는 관점에서처럼 ‘제도가 곧 본성‘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주체적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왕필의 주장대로 ‘제도는 (인위이지만) 자연에 근본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을 그의 의지로 볼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여러 철학사상을 자꾸 접하다 보니, 철학의 거대한 흐름 중 하나는 ‘의지론이냐, 결정론이냐’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접한 철학들은 위 기준에 의해 두 가지로 분류가 가능했던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22 철학의 주제라는 것이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몇천 년이 지나도 사람의 본질이 바뀌지 않듯이 현학의 문제도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타당하다. 그것이 바로 이를 테면 ‘제도와 본성’에 관한 논의와 같은 것이다. 과연 우리는 본성적으로 제도를 만들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본성은 제도 속에서 희생되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제도를 완전히 벗어난 순전한 인간 본성의 발휘와 합리적인 제도의 수립을 위한 본성의 억제는 모순되지 않는가를 우리는 묻는다. 제도는 철저히 전체를 위한 구상이고 본성은 분명히 개인을 위한 설정이다. 전체와 부분, 집단과 개인 사이의 알맞은 장치의 고안은 이와 같은 철학적 토론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고민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 P22

168 그런데 이 모습을 곽상은 "작은놈이 큰 것을 바라니 자기를 잃는다"라고 풀이함으로써 ‘큰놈은 큰 데서, 작은놈은 작은 데서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분명 장자의 뜻은 우물보다 큰 바다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곽상은 ‘우물 속에서 뛰노는 즐거움’과 ‘바다의 큰 즐거움’을 같이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투라면 우물 안 개구리의 뜻은 ‘좁은 소견을 지닌 자’가 아니라 ‘분수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자’가 되고 만 169 다. 이른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마는 것이다. - P168

173 한마디로 대소와 생사를 초월하는 소요야말로 참 소요라는 주장이다. 곽상의 이론구조는 사실상 매우 간단하다.

(가) 전체의 세계가 있다.(一)
(나) 상대성으로는 전체를 볼 수 없다.(待)
(다) 그런 세계는 한쪽에 불과하다.(方)
174 (라) 따라서 전체를 하나로 할 수 있어야 한다.(齊)
(마) 그것이 바로 소요이다.(遊)
(바) 그때서야 자기의 본성이 펼쳐진다.(性)

대략적으로 곽상의 어휘에서 (가)에는 ‘아우름’이, (나)에는 ‘대소’, ‘생사’ 등이, (다)에는 ‘유무’가, (라)에는 ‘크게 통함’이 있고, (마)에는 ‘얻음’이, (바)에는 ‘몫’, ‘능력’ 등이 속한다. 결국 곽상이 바라는 세계는 그의 표현대로 ‘제일성’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곽상의 이러한 해석은 문제가 많다.
첫쨰, 그는 「소요유」를 「제물론」으로 풀고 이다. 장자의 「제물론」은 이와 같은 제일성의 논의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고, 「추수」는 이에 버금간다. 그런데 곽상이 벌이고 있는 「소요유」에 대한 해석에는 ‘소요’는 없고 ‘제물’만 있다.
둘째, 평등으로 자유를 억압한다. 평등한 세상이라고 해서 자유로운 개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곽상은 평등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개성은 제일성 속에서 포기된다. 개체는 전체 속에서 함닉되고 말아, 독자적으로 설 자리가 없다.
셋째, 과연 무엇이 본성이란 말인가? 곽상은 본성에 대한 깊은 반성이 없다. 타고난 것이 모두 본성이라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본성대로 한 일이라는 것인가? 임금은 임금의 본성을, 노예는 노예의 본성을 타고났다는 말인가? 성인은 성인의 본성을, 악인은 악인의 본성을 타고났다는 말인가? 이러한 주장에는 함양이나 공부, 나아가 학습이나 교육과 같은 용어가 개입될 여지가 조금도 없다.
175 ‘각자 자기가 타고난 마당(自得地場)에서 본성을 실현하면 된다’는 이러한 곽상의 주장은 도가판 결정론으로 본성이 바뀔 여지가 조금도 없다. 바꾸려고 하다가는 다칠 뿐이다. "본성은 각자의 몫이 있다. 똑똑한 사람은 똑똑함을 지켜 끝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음을 안고 죽음에 이르니, 어찌 그 성을 도중에 바꿀 수 있겠는가!"
이런 해석에 불만을 갖은 역대의 주석가들은 하나둘이 아니다. 현대 판본 가운데에서 가장 정치한 『장자집석』의 저자조차 곽상의 「소요유」 첫 주부터 "곽상(향수)의 주가 다하지 못했다"라고 밝히고 있을 정도이다. 특히, 위에서 말한 세 번째 논의는 불가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의 본성이 곽상식이라면 수행이고 성불이고 아무것도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곽상이 주장하는 이른바 ‘적성설適性說’의 최대 난점이다. - P173

180 지둔이 곽상에게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만일 붕새와 참새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가에서의 수행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중생인 참새는 부처인 붕새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른바 ‘성불’이라는 목적이 인간들에게 부여되고 있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적성이란 허울로 사람을 잣대질한다면, 부처는 부처의 적성이 있고, 보살은 보살의 적성이, 아라한은 아라한의 적성이 있을 뿐, 아귀와 수마에 빠져 사는 내가 부처가 될 길은 아득하다. 건달, 낭인, 한량 그리고 카사노바와 같은 바람둥이도 자신의 적성에 충실할 뿐이다. 슬프지만 적성설에 지독히 충실하다면, 2004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도 지둔의 말처럼 적성일 뿐이다. 괜히 중국 고대의 임금과 도둑의 임금을 181 거들먹거릴 필요도 없다. - P180

214 그리고 현학은 절대의 자유와 절대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더욱이 행복의 동산에서 낭만적 정신을 갈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풍우란은 그것을 바로 서구의 낭만적 정신과 빗댈 만한 중국의 ‘풍류風流’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중국철학의 짧은 이야기』에서는 『중국철학의 정신』 215 보다도 더욱 현학의 낭만성을 강조함으로써 현학자들의 ‘추상과 초월’이 부각된다. 심지어 그는 일시적인 충동이나 자극에 따라 살고, 금욕적 요소가 강하긴 하지만 성性(Sex)의 미화된 모습을 현학자들에게서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풍우란은 ‘신도가’를 향수나 곽상과 같은 ‘합리주의자’(The Rationalists)와 풍류를 즐기는 혜강이나 완적과 같은 ‘감각주의자’(The Sentimentalists)로 크게 나누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표준으로 위진의 사상가를 나누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현학자들의 이성적인 모습을 선대의 명가와의 관련이나 제도에 대한 궁극적인 긍정 태도에서 간신히 발견하는 듯하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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